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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24화 (124/144)

##  124화. 성지 히페리온

블레셋의 과거, 그러니까 전생은 매우 개인적인 이야기일 듯해 묻기가 꺼려졌다.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니, 블레셋은 내 머릿속을 훤히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짧게 냉소하고는 별로 대수롭지 않아 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400년 전 세계의 조율자에 대한 역사는 아인스턴 왕가에서 말살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기록이 없을 겁니다. 저는 뭐, 간단히 말해서…….”

블레셋은 잠시 창밖을 보며 목소리를 흐리더니 말을 이었다.

“인류에게 배신당했지요.”

“……배신?”

“그 뒤로, 인간을 더는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구할 가치가 있다고도 더는 생각지 않게 되었죠. 그런데도 세계수의 의지는 저를 굳이 환생하게 해 의무를 부여하더군요. 이 세계를 지키도록 말이지요.”

처음 만났을 때, 세계의 조율자에 대한 블레셋의 반응이 냉소적이었던 이유는 그래서였을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쩌다 배신을 당하게 되었던 건지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그저 블레셋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경청할 뿐이었다.

“하지만, 뭐…… 당신은 나와는 다르니까…….”

“……?”

블레셋이 허공을 응시하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고, 나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당신이라면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조율자의 역할을.”

그리 말하며 나를 돌아보는 블레셋의 눈빛은……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

성지 히페리온이 시시각각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블레셋에게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세이렌은 왜 에이프릴을 잠들게 한 걸까? 내가 아니라…….”

블레셋의 답은 적당히 시간이 지난 후 돌아왔다.

“에이프릴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겠죠. 이 세계의 역사에서.”

“……에이프릴을 구할 실마리는 히페리온에 있다고 했지?”

“네, 당신도 그곳에 도착하고 나면 전부 깨닫게 될 겁니다. 우리의 숙적이 무엇인지, 당신이 왜…… 힘을 각성하지 못했는지도요.”

“…….”

창밖 풍경에서 눈을 뗀 나는 잠든 에이프릴을 돌아보았다.

미동 없이 조용한 에이프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나는 허리를 숙여 에이프릴을 감싸 안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엄마가 꼭 구해 줄게, 에이프릴……. 조금만 더 기다려.”

그리고 이십여 분 후.

우리는 광활한 호수의 기슭에 도착했다.

바닥을 알 수 없을 만큼 깊은 이 호수의 한가운데 떠 있는 섬.

저 섬이 성지 히페리온이었다.

그리고 성지의 중앙,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나무가, 바로 세계수였다.

“히페리온까지는 이동 마법으로 갈 수 없습니다. 호수를 건너려면 나룻배를 타야 합니다.”

아르윈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잠든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품에 소중히 안긴 채였고, 로드리와 블레셋이 그 근처에 파수꾼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나룻배가 안 보이는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히페리온은 상호 불가침의 성지이다 보니 오가는 사람이 없어 쓸만한 나룻배도 찾기 힘든 모양이었다.

아르윈은 허공에 새카맣고 동그란 구멍을 소환하더니 그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뭔가를 찾듯 뒤적거렸다.

그러다 잠시 멈칫하더니 나무로 된 작은 물건을 쏙 꺼냈다.

그건 성인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나룻배 모형이었다.

‘……저걸로 뭘 어쩔 생각이지……?’

나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아르윈을 지켜보았다.

아르윈은 그 나룻배 모형을 호숫가에 냅다 던지더니, 팔을 쭉 뻗고 손가락을 폈다.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넣는 전형적인 자세였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이 공기 중에 아지랑이를 일으키고, 조그맣던 나룻배 모형이…….

“……?!”

점점 커지는 게 아닌가!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괴상망측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분명 조악한 모형에 불과했던 물건이…… 어느새 번듯한 나룻배가 되어 있었다!

“음……. 한 척으로 되려나?”

아르윈은 중력 저항 마법으로 나룻배를 허공에 띄워놓고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는지 싱긋 웃었다.

“좋아, 완벽하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지? 아르윈의 마법은…… 보면 볼수록 불가사의하다…….

“그럼, 가볼까요.”

아르윈이 나와 다른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멍하니 있던 나는 다른 이들과 시선을 교환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아르윈이 만든(?) 나룻배에 다 함께 올라타게 되었다.

여섯 명이 작은 배에 타려니 조금 비좁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품에 안긴 채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고, 나와 그레이안은 그런 에이프릴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우리를 태운 나룻배는 수면 위를 아주 부드럽게 유영해 나아갔다.

이 호수는 바다처럼 넓어서, 기슭에서 얼마쯤 이동해 오자 마치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호수에도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고개를 살짝 숙이고 관찰했지만, 깊은 물속은 좀처럼 들여다볼 수 없었다.

거대한 호수의 중앙, 세계수가 있는 섬 성지 히페리온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럴수록 내 안의 영문 모를 두근거림도 커져만 갔다.

‘진실은 뭘까? 세이렌의 정체는…… 그리고 나는…….’

저곳에 가면…… 에이프릴을 구할 힘을 얻을 수 있을까?

모든 생명을 태어나게 했다는 세계의 근원, 세계수는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하고 다채로운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 * *

칼윈 공작성으로 돌아온 제이드는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의 신병을 아버지에게 맡겼다.

그들은 숱한 고문을 겪고도 쉬이 입을 열려 하지 않았지만, 칼윈 가의 마법사가 두 시간 만에 완성한 자백제를 목구멍에 쏟아붓자 결국,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왠지 그럴 것 같긴 했지만, 라니에로 왕은 정말로 엘로윈과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군요.”

“그래. 그 작자는 그러고도 남지.”

엘로윈의 국토인 에프로사 대륙 북쪽은 농업이 어려운 척박한 환경이었지만, 각종 자원과 광물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그런 북쪽 땅을 라니에로 왕은 오래전부터 탐내 왔었다.

그의 야욕은 솔즈베리 공작가가 대규모 마정석 광산을 발견해 소유주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정점을 찍었다.

‘글로리아, 그 은혜도 모르는 계집애가 우릴 배신하지만 않았어도……!’

그때부터 라니에로 왕은 알게 모르게 준비 중이던 전쟁 물자와 병력을 더 늘리는 데 박차를 가한 듯싶었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라고. 전쟁이 나면 우리 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텐데.”

거칠게 말을 뱉은 칼윈 공작이 쯧, 혀를 찼다.

제이드는 의자에 묶인 채 기절한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을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서둘러야겠군요, 아버지.”

“그렇지. 라니에로 왕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몇 시간 후, 칼윈 공작은 다른 가문의 가주들을 소집해 은밀히 회동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모두가 왕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그렇게 아인스턴 왕국에서는 칼윈 공작가를 선봉으로 한 반역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이게 다 글로리아 그 계집애 때문이야, 그렇지?”

에반젤린은 감금된 채 미쳐 가고 있었다.

제 자식에게도 잔혹한 왕은 에반젤린을 완전히 묻어 버릴 작정인지, 외부와의 모든 연락 수단을 끊고 단절시킨 뒤 궁에 감금했다.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다 아인스턴을 위한 일이었는데…….”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에반젤린은 손톱을 물어뜯었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일상복은 여기저기 찢겨나가 있었다. 가위를 들고 난동을 부리다 찢어 버린 것이었다.

“용서 못 해……. 글로리아도, 부왕도, 날 무시하고 버린 놈들도…… 전부 다…….”

미쳐 가는 에반젤린의 곁에, 세이렌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후드 아래로 얼핏 보이는 창백한 얼굴은 표정이 없었고, 옅은 색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언뜻, 죽은 사람의 것 같은 그 입술 위로는 조소가 스친 것도 같았다.

“……세이렌……. 넌…….”

문득 세이렌을 돌아본 에반젤린이 작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세이렌을 향해 비틀비틀 다가갔다.

마침내 세이렌의 앞에 다다라서는, 팔을 쭉 뻗어 세이렌의 어깨를 꽉 붙잡고 두 눈을 희번덕 빛냈다.

“넌 나를 도와줄 거지……? 그렇지? 넌 내 주술사니까……!”

“…….”

광기 어린 기세로 재촉해 오는 에반젤린을, 세이렌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 당장 그렇다고 해!”

마음이 급해진 에반젤린이 세이렌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들고 마구 흔들었다.

흔들면 흔드는 대로, 종잇장처럼 휘청거리던 세이렌이 드디어 슬며시 입을 열었다.

겨울밤 불어오는 바람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파리한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당연히…….”

“……!”

“도와드려야지요. 저만 믿으세요.”

“저, 정말이지? 정말로 날 도와줄 거지?”

“그럼요, 에반젤린 님……. 제 계획대로만 하시면…….”

세이렌이 에반젤린을 보며 생긋 웃었다. 드물게 그 얼굴에 떠오른 사람 같은 표정이었지만, 생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에반젤린 님은 과거의 영광을 다시 되찾게 되실 거예요.”

* * *

“도착했습니다.”

마법으로 움직이던 노를 멈춘 아르윈이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십여 분쯤 걸려 도착한 성지 히페리온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신비로운 곳이었다.

생전 본 적 없는 희귀한 꽃이 사방에 가득 피어나 있고, 초목은 내가 본 것 중 최고로 싱그러운 푸른빛을 띠었다.

무엇보다, 바람에 실려 온 빛의 알갱이가 공기 중을 천천히 떠다녔는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섬의 중앙, 세계수가 있는 곳에서 퍼져나가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우리의 고향!!}

{꺄~!}

{정말 오랜만에 와 본다!}

잔뜩 신이 난 나비들이 근처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고향(?)에 돌아온 게 무척 기쁜 모양이었다.

나비들은 저대로 놔두고, 나는 블레셋을 돌아보며 물었다.

“히페리온에 도착했는데…… 이다음은? 뭘 어떻게 해야 해?”

“계속 가십시오. 세계수를 향해서. 세계수가 당신을 인도해 줄 겁니다.”

“음……. 그래, 알았어.”

나는 단서가 적은 게임 퀘스트를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송하긴 하지만…… 블레셋을 믿어 봐야지. 400년 전의 조율자였다고 하니까.

잠든 에이프릴을 데리고서, 나는 일행과 함께 섬의 중앙을 향해 나아갔다.

도중에 날개 모양의 귀가 달린 토끼나 분홍색 털을 지닌 이름 모를 새 같은, 기묘한 생물들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나는 신기해하는 한편, 이 신비로운 생물들과 아름다운 풍경을 에이프릴과 함께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에 서글퍼졌다.

‘꺄앙!’

토끼 모습의 에이프릴이라면 분명 그렇게 외치며 폴짝 뛰었을 것이다.

호기심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생물들을 건드려 보다 사고를 쳤을지도 모르지.

자연히 에이프릴을 돌아보게 된 나는 고요하기만 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슬픔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중에…… 깨어나고 나면, 꼭 엄마랑 같이 오자. 에이프릴.’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끌어안은 채 계속 걷다 보니, 어느덧…….

우리는 세계수 앞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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