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수마의 저주
……잊고 있던 기억?
‘……모르겠어. 생각이 안 나……. 난 그냥 갑자기 이 몸에 빙의된 것뿐인데…….’
{음, 아직은 때가 아닌가…….}
{하지만 너에겐 분명 힘이 있어. 지금은 우리가 네 힘을 밖으로 꺼내 올 통로 역할을 해 줄게. 그렇지만 언젠간 너 혼자서도 힘을 쓸 수 있을 거야.}
‘잘은 모르겠지만…… 부탁할게. 서둘러 블레셋을 도와야 하니까.’
{좋아. 그럼 시작한다?}
명랑하게 말한 나비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고는 밀도가 높고 아주 작은 빛의 알갱이로 변하더니, 서로 둥글게 모여 원을 형성했다.
빛으로 이루어진 그 정원(正圓)의 고리가 내 손목에 팔찌처럼 느슨히 채워졌다.
고리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형태였다.
{이제 네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해 봐. 손안에 힘이 모이는 게 느껴질 거야.}
나비들의 말대로 오른손에 정신을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내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진 힘이 손끝에 모이는 게 느껴졌다.
‘우, 우와아? 뭐야?!’
{이게 네가 지닌 힘이야. 블레셋과 같은, 파마의 힘이지.}
‘블레셋과 같은……?’
{음……. 블레셋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빼놓고 간단히 설명하자면, 400년 전 세계의 조율자는 바로 블레셋이었어. 정확히는 그의 전생이.}
‘뭐……?’
원작의 최종 보스가 세계의 조율자?! 심지어 환생자?!
‘너무 뜻밖이라 말이 안 나오는데…….’
{그렇겠지……. 넌 그 진언서를 읽었으니…….}
‘진언서?’
{아무튼, 세계수는 우리 세계를 파괴하려는 숙명의 적에게 맞서기 위한 파마의 힘을 조율자에게 주었지만, 인간의 그릇으로는 한계가 있었어.}
{그래서 세계수는 블레셋을 청룡 수인으로 환생하게 해, 그의 그릇을 늘리고 전생의 기억을 보존했지.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 혼자만으로는 숙적에게 맞설 수 없었어.}
{그래서 새로운 조율자로 네가 선택된 거야. 너와 블레셋이 힘을 합쳐, 우리의 숙적을 이 세계에서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그 숙적이란 게, 세이렌을 말하는 거야?’
{응. 그리고 네가 아직 각성하기 전이기 때문에 원래 힘의 1/3 정도만 끌어올릴 수 있어. 그래도 지금 당장 세이렌을 이 자리에서 몰아내기엔 충분할 거야. 자, 어서 블레셋을 돕자!}
나비들이 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려 블레셋 쪽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막상막하로 버티고 있었지만, 다소 위태로워 보였다.
‘저러다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지겠어.’
나는 서둘러 발을 떼며 그레이안에게 말했다.
“나 잠깐 블레셋을 돕고 올게요.”
“글로리아?”
“걱정하지 마요!”
등 뒤로 그레이안이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후다닥 블레셋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블레셋이 파마의 힘을 세이렌에게 쏘아 보내는 타이밍에 맞춰, 내 힘을 최대한 끌어올려 보태 주었다.
아까보다 훨씬 환한 백색의 빛이 세이렌에게 직격했다.
순간 타격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세이렌이 주춤 물러났고, 블레셋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아니, 아직 각성한 건 아닌 모양이로군요.”
“으응,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움이 된 거 맞지?”
“네, 확실히…….”
블레셋의 시선이 다시 세이렌을 향했다. 멈추지 않고 공격을 퍼붓던 세이렌이 어쩐지 잠잠했다.
그저, 후드 아래 얼핏 보이는…… 백색에 가까운 아주 옅은 눈동자로 우리를 조용히 응시할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세이렌은 외형도 뭔가…….’
로브 자락에 감싸여 있어 자세히는 볼 수 없으나, 가끔 보이는 피부나 눈동자가 몹시 기이했다.
살아 있는 인간의 몸이 아니라, 마치…….
“앗……!”
그때였다. 소맷자락을 펄럭인 세이렌이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블레셋이 공격을 날리며 쫓아갔고, 나도 힘을 보탰다.
세이렌은 그 모든 공격을 민첩하게 피하더니, 커다란 나무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나비들의 힘으로 그 나무가 있는 지면을 허물려던 차―
“……!”
세이렌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누군가 세이렌을 마법으로 이동시킨 듯했다.
아마도 라니에로 왕의 최측근으로 있는 궁정 마법사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놓쳤네…….”
왠지 모를 찝찝한 기분인 채로 중얼거리는데, 의외로 미련 없이 몸을 튼 블레셋이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서둘러 블레셋을 쫓아갔다.
빠르게 두 사람 앞에 다다른 블레셋이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에이프릴의 상태를 면밀히 살펴봤다.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으로 블레셋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아까는 분명…… 에이프릴은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블레셋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저기, 블레셋…….”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운을 뗀 순간이었다.
“히페리온으로 가야겠습니다.”
“뭐?”
블레셋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은 매우 뜬금없었다. 히페리온으로 가야겠다니?
“지금 에이프릴의 상태는…… 간단히 설명하자면, 수마의 저주에 걸린 거라고 보면 됩니다.”
“수마의 저주……? 그게 뭔데?”
“깨어날 수 없는 깊은 잠……. 이 상태로 몸이 더는 버티지 못하면, 에이프릴은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죽게 될 겁니다.”
“뭐……?”
경악한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입을 달싹이던 나는 블레셋이 조심해야 하는 상대라는 것도 잊고 마구 소리쳤다.
“그럼 괜찮은 게 아니잖아! 아깐 괜찮을 거라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에이프릴을 구할 방법이 있으니까.”
“그 방법이란 게 뭔데……?!”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를 풀 방법과 같습니다.”
블레셋은 차분한 목소리와는 판이하게 살기 어린 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저주를 건 주술사를 죽이는 것이요.”
.
그레이안과 토끼 수인들은 프리무스의 시신을 수습해 은거지로 옮겼다.
그리고 이번에 붙잡은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은, 뜻밖에도 제이드가 신병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다.
“제가 데려가 아버지와 함께 이들을 조사하고 정보를 뽑아낼게요. 그 외에도…… 이들은, 특히 루시 언스워트는 라니에로 왕의 최측근으로 잘 알려져 있으니 쓸모가 많을 거예요. 라니에로 왕을 권좌에서 내려오게 하는 데 말이죠.”
“그 말은…….”
칼윈 공작가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제이드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나는 몹시 놀랐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그리 놀랄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칼윈 공작은 친―수인 성향인 데다가, 토끼 수인들과도 연맥이 있어 보였으니까…….
‘라니에로 왕에게 반기를 들 만도 하지.’
역모를 꾸미는 것은 칼윈 가문 하나뿐일까? 아니면 다른 가문들이 함께 뭉친 것일까?
그에 대한 궁금증은 제이드가 곧 해결해 주었다.
“최근 칼윈 가문과 여러 가문이 협력해 아인스턴 왕가의 자금줄을 끊었어요.”
“뭐……? 그게 사실이야?”
“네. 왕가의 타격이 만만치 않겠죠. 아인스턴의 대부호들이 왕가에 반기를 들려 한다는 것도 알아차렸을 테고요. 그중 가장 작은 가문부터 조만간 압박해 올 테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도 이미 마련되어 있어요. 무엇보다…….”
“…….”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라니에로 왕을 끌어내릴 계획이니까요.”
먼 곳을 응시하다가 나를 돌아본 제이드가 설핏 웃었다. 여러모로 소년답지 않은 미소였다.
“위험 부담이 크기는 하죠. 그렇지만 전 아버지의 뜻에 찬성이에요. 부패한 아인스턴 왕가를 끝장내지 않으면 나라에 미래는 없을 테니까.”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에 찾아온 것도, 그 일 때문이었어?”
“네. 프리무스 모르토는 뛰어난 마법사이고, 다른 토끼 수인 마법사들도 강한 전력이 될 테니까요.”
……칼윈 공작은 스무 살도 안 된 어린 아들을 반역에 끌어들인 건가……. 만일 나였더라면, 에이프릴을 미리 대피시켰겠지.
하여튼 여러모로 가치관이 안 맞는 세상이다. 그래도 그레이안과는 통하는 데가 많아 다행인지도.
.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의 신병은 칼윈 공작 측에서 사람을 보내 인수해 갔다.
그리고 제이드는,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에이프릴의 잠든 얼굴을 보며 이렇게 약속했다.
“내가 당신의 저주를 반드시 풀어 줄게요, 에이프릴……. 조금만 더 버텨요.”
……제이드가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저주를 풀 방법에 대한 블레셋의 말을 엿들었을 테고……. 제 나름대로 세이렌을 없앨 방법을 궁리하는 모양이었다.
늘 얄밉게만 보이던 녀석이었는데, 확실히, 철부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애늙은이에 가깝지……. 다 가정환경 탓이라니까.
.
제이드가 떠난 후, 우리는 일단 블레셋과 함께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에이프릴이 수마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은 일단 함구했다. 이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다만 엘로윈의 베노아 왕에게는 이번에 있었던 사건을 비롯해 자세한 이야기를 은밀히 전했다.
베노아 왕의 정보력이라면 칼윈 공작가와 그 밖에 여러 가문이 아인스턴 왕가에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첩보로 들어 알고 있을 테지만, 좀 더 상세하게 알고 있는 편이 머잖아 반역이 일어났을 때 베노아 왕으로서도 대응하기 쉬울 테니까.
‘엘로윈 왕국과 베노아 왕이 아인스턴의 반역 세력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는 않겠지만…….’
필요하다면, 막후에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거였다.
* * *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잠들어 있는 에이프릴은 동화 속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생각나게 했다. 저주에 걸려 깊은 잠에 빠졌다는 사실도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잠자는 숲속의 공주는 언젠가 왕자의 키스로 깨어날 수 있는 반면, 에이프릴은…… 저주를 건 악당을 죽이지 못하면 영영 깨어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에이프릴…….’
성지 히페리온을 향해 달리는 여행용 마차 안.
나는 나비들의 힘으로 계속해서 에이프릴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아이의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토끼 모습으로 장난을 치던 에이프릴, 수줍게 선물을 건네던 에이프릴, 나를 보며 활짝 웃던 에이프릴, 용맹하게 검을 휘두르던 에이프릴, 채 낫지 않은 마음의 상처로 눈물을 흘리던 에이프릴…….
에이프릴의 온갖 모습이 잇따라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럴수록, 마음속 슬픔과 사랑스러움은 커져만 갔다.
“에이프릴……. 구할 수 있겠지? 내가, 어떻게든……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혼잣말로 중얼거린 말에 대답한 이는 그레이안이었다. 나는 그를 돌아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레이안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뺨을 살며시 어루만져 주었다.
그런 우리 둘을, 맞은편에 앉은 블레셋이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워서, 나는 눈물을 훔치며 그를 힐끔거리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저기, 블레셋…….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그나저나…… 존대를 해야 하나? 사실상 조상님이니…….
“저에게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 텐데요.”
블레셋은 확신하는 투로 말했다. 나는 오도카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막 떠오른 생각에 “아, 그러고 보니.” 하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블레셋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세계수의 나비들에게 들었어. 네가…… 환생한 몸이고, 400년 전 세계의 조율자였다는 거……. 사실이야?”
그러자 블레셋은 무덤덤한 투로 대답했다. 그 사실에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이.
“네, 사실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인간을 극도로 싫어합니다만, 한때 저 역시 인간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