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기억의 행방
검은 불꽃이 자신을 휘감은 순간, 에이프릴은 이것이 진짜 화염이 아님을 깨달았다.
단순히 불처럼 보일 뿐, 이건 자연의 원소가 아닌 전혀 다른 힘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꺼림칙한…….
‘이 힘은…… 대체 뭐지?’
이질적인 감각.
이상한 거북함.
원초적인 생명의 본능에서 느껴지는, 거부감.
‘이건 주술력이 아니야. 여태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힘이야…….’
이대로는 이 힘에 자신의 존재가 삼켜질 것만 같다는,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그 순간, 왼쪽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가 반짝였다. 에이프릴의 위기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에이프릴은 그 반지를 준 사람을 퍼뜩 떠올렸다.
‘블레셋…….’
어째서일까, 지금 이 순간, 그가 자신을 도와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드는 것은.
자신이 지닌 예지 능력의 영향인 것일까?
물론 그 예지 능력이…… 이번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검은 힘에 의식이 흐릿해져 가던 차, 에이프릴은 청량한 푸른빛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을 퇴치하는 파마의 힘.
청룡의 힘이었다.
.
쓰러지는 에이프릴을 받아 안은 글로리아 곁에, 블레셋은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평소처럼 무표정했지만 눈빛만큼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소년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위압감과 기백이 블레셋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블레셋의 시선은 한동안 에이프릴에게 고요히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옆으로 옮겨갔다.
블레셋이 입을 열어 나직이 말했다.
“또 보는군, 괴물.”
괴물이라 불린, 검은 후드의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블레셋을 마주 보았다.
그자와 블레셋은 꽤 오래 시선을 부딪쳤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블레셋이 재차 말을 꺼냈다. 이번에는 글로리아와 수인 일행들을 향해서였다.
“저 검은 후드는 제가 맡을 테니, 여러분은 인간 마법사들을 사로잡으십시오. 에이프릴은…… 괜찮을 겁니다.”
에이프릴은 괜찮을 거라는 말에 눈에 띄게 움찔한 글로리아가 울먹이는 표정으로 블레셋을 쳐다보았다.
블레셋은 그녀를 향해 한 번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예의 검은 후드에게로 몸을 틀었다.
“400년 만인가? 결국 네놈과 다시 맞붙게 되는군.”
400년이라는 숫자에, 블레셋의 나이를 114세 정도로 알고 있던 이들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는 아무런 말 없이 블레셋을 응시할 뿐이었다.
슬그머니 입을 연 이는 다름 아닌 루시 언스워트였다.
“이 소년은 또 누구인가요? 글로리아 님. 범상치 않은 협력자를 둘이나 데리고 계시는군요…….”
“그건 네가 알 필요 없고.”
루시의 말을 자른 것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아르윈이었다.
그는 계속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것처럼 루시를 향해 재빨리 선공을 날렸다.
아르윈의 말에 발끈한 탓에 순간 방심했던 루시가 방어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붉은빛 공격 마법은 정확히 그녀의 오른쪽 어깨에 명중했고, 루시는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아악! 이 비겁한……!”
“누가 누구더러 비겁하다는 건지?”
지휘관이 타격을 입자, 그 부하인 회색 로브의 마법사들이 지체 없이 아르윈에게 공격 마법을 날렸다.
그러나 이번엔 토끼 수인 마법사들이 더 빨랐다. 프리무스를 잃은 그들도 복수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 수인들의 공격 마법이 루시의 부하들에게 잇따라 명중했고, 사방은 곧 아수라장이 되었다.
“물러서지 마! 저 살인자들을 모조리 사로잡자!”
“이 주제도 모르는 미천한 것들이……!”
서둘러 자세를 바르게 고친 루시가 왼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지만, 보호 마법으로 아르윈의 맹공을 막는 데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아르윈의 마법 시전 속도는 가히 비정상적으로 빨랐기 때문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저 속도가 나오는 거야?!’
당황한 루시는 평정심을 잃었다. 상대의 마력은 심지어 매우 강력하기까지 해서, 보호 마법도 곧 효력을 잃을 게 분명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루시가 홱 고개를 돌려 아군을, 특히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루시의 간절한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세이렌 님! 저 좀 도와주세요!”
* * *
‘세이렌?’
낯익은 이름에 나는 퍼뜩 놀랐다.
방금…… 루시 언스워트가 저 검은 후드를 세이렌이라고 부른 건가?
품 안에 안긴 에이프릴의 몸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 온기는 에이프릴이 단순히 잠들었을 뿐이라는 증거였다.
아직도 떨리고 있는 내 몸을 그레이안이 옆에서 감싸 안고 토닥여 주고 있었다.
나는 에이프릴을 좀 더 꼬옥 끌어안으며 검은 후드를…… 방금 세이렌이라고 불린 그자를 바라보았다.
‘세이렌이라고……? 저자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아인스턴 왕궁에서 보았던 모습과 비슷한 인상착의였다.
‘너무 경황이 없어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그때와 마찬가지로 저자의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그때 느꼈던 것처럼 기이한 느낌이 들 뿐.
‘세이렌. 에반젤린의 주술사. 하지만…… 원래는 글로리아의 주술사였지.’
저 세이렌이라는 주술사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왜 내가 아니라 에이프릴을 공격한 거지?
‘라니에로 왕의 명령을 듣고 온 거 같은데, 라니에로 왕은 저자에게 대체 무슨 명령을 내린 거지?’
게다가 블레셋……. 저 세이렌과 구면인 듯하던데.
‘114세가 아니었단 말이야……? 그럼 414세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어린 모습인데. 아무리 용족이 성장이 느리다지만…….’
블레셋은 세이렌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400년 만이라고 했지. 말인즉, 세이렌의 나이도…… 최소 몇백 세라는 뜻.
‘……솔즈베리 가문이 저주에 걸린 게…… 백여 년 전쯤이었지.’
그 저주는 풀리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저주를 건 주술사가, 여태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에…….
‘……설마…….’
어떤 가정 하나가 뇌리에 번뜩이며 스쳤다.
설마 저 세이렌이, 백여 년 전 솔즈베리에 저주를 건 주술사인가?
‘그리고…… 한때는 글로리아의 주술사였던…….’
그 점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왜지? 심장이 왜 이렇게…… 불안정하게 뛰는 거지?
쿵, 쿵―.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명백한 공포.
‘……왜……?’
기억나지 않는, 아주 깊은 무의식에 묻혀 있던 어떤 끔찍한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르려던 차였다.
“공작 부인.”
옆에서 초조한, 동시에 두려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로드리였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로드리의 자못 심각한 낯빛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슨 얘긴데……?”
로드리는 숨을 크게 삼키더니 두려움이 역력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저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자……. 전에 제가 말씀드린 적 있지요? 제가 과거에 아인스턴의 왕녀였던 당신을 보았을 적에, 당신의 영혼이 핏빛 아우라를 띠었었다고…….”
“어……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 그때와 같은 아우라가…….”
로드리는 일순간 공포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참았다. 잠시 후, 호흡을 가다듬은 로드리가 말을 이었다.
“저 검은 후드의 사람에게서 보입니다. 아니, 사람인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다시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저자는……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뭐……?”
나는 멍하니 굳은 채 입을 달싹였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의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와중에 블레셋은 그 검은 후드, 세이렌과 힘을 겨루고 있었다.
세이렌이 쓰는 힘은 점점 붉은빛을 띠었는데, 그래서인지 검붉게 보였다.
그 검붉은 힘이 스치거나 닿은 자리마다 초목이 썩어 부패하거나 땅이 오염되었다.
저런 게 주술력이라고? 아니, 주술력은…… 저런 현상은 일으키지 못한다.
저건 주술력으로 가뭄이 드는 것과는 달랐다.
“……부인, 괜찮으십니까?”
“네? 아…….”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그레이안이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으며 물어 왔다.
에이프릴은 여전히 깊이 잠든 채 그의 품에 안겨 있었고, 제이드가 골몰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 옆에 서 있었다.
나는 그레이안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준 후, 다시 로드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예전의 내게서 보았던 영혼의 빛이, 지금은 저 검은 후드…… 세이렌에게서 보인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
이게 무슨 의미지?
빙의자인 나에게 몸을 빼앗긴 글로리아가…… 저 세이렌의 몸에 들어가 있는 건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을 듯한 예감이 들어.’
분명 뭔가 더 있었다.
내가 모르는…….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가.
쾅―!!
그때, 지척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나는 생각에서 벗어나 다급히 그쪽을 돌아보았다.
폭발에 휘말린 사람은 다름 아닌 아르윈이었고, 폭발 마법을 시전한 이는…… 루시 언스워트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르윈은 멀쩡했다. 그는 움푹 파인 구덩이에서 옷자락을 탁탁 털며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며 루시는 정말로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뭐일 거 같아?”
비뚜름히 웃은 아르윈이 루시에게 속박 마법을 걸었다.
방금 그 폭발이 최후의 일격이었던지, 루시는 저항도 못 하고 속박에 걸려들었다.
“큭……. 이 망할…….”
“잠깐 자 둬.”
곧이어 아르윈이 수면 마법을 시전했고, 루시의 눈이 감기며 고개가 푹 떨어지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그렇게 루시는 속박에 걸려 허공에 둥둥 뜬 채로 잠이 들었다.
루시의 부하들은 지휘관이 붙잡히자 허둥지둥하다가 토끼 수인들에게 승기를 내주고야 말았고, 이동 마법으로 도망친 몇 명을 제외하곤 전부 붙잡혔다.
얼핏 보면 상황은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블레셋과 세이렌 쪽이었다.
블레셋의 힘은 세이렌의 힘과 부딪히면 그 대상을 상쇄하거나 새파랗게 불태워 버렸는데, 마치 극과 극의 대결을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둘의 싸움은 도무지 결판이 나지 않고 막상막하였다.
나는 초조한 기분으로 블레셋을 눈으로 좇았다.
만일 블레셋이 세이렌에게 패한다면…… 기껏 붙잡아 놓은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을 세이렌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
‘……아니, 단지 그뿐만이라면 다행이지.’
블레셋을 제압하고 온 세이렌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웠다.
세이렌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왜 많은 사람 중, 하필 에이프릴을 지목해 공격한 걸까?
{우리가 블레셋을 도와주자, 글로리아.}
때마침 나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 없이 진지한 음성이었다.
{블레셋이 지닌 건 정화와 파마의 힘이야. 정화는 청룡 수인의 특성 중 하나이고…… 파마는…… 그의 전생과 관련이 있지.}
‘……전생이라고? 그럼 400년 어쩌고 했던 게…….’
{음……. 자세한 건 본인에게 듣도록 하자. 아무튼, 블레셋의 힘은 세이렌의 힘을 상쇄하기 때문에 막을 순 있을지언정 승리하긴 어려워. 둘이 지닌 힘의 크기가 비등비등하거든.}
{세이렌이 지닌 건 부패의 힘이야. 원래부터 저런 힘을 지녔던 건 아닐 거야. 아마 여러 세상을 떠돌며 얻은 것일 테지. 아, 그리고 주술력도 분명히 지니고 있어. 그건 연막에 불과했을 테지만…….}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 이따 제대로 설명해 줘. 어쨌든, 너희가 블레셋을 도울 수 있다는 거지?’
{응, 우리와 너의 힘으로.}
‘……? 내 힘?’
{너에겐 힘이 있어, 글로리아. 네가 괜히 세계의 조율자인 게 아니야. 잘 떠올려 봐. 잊고 있던 기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