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기습당하다
그레이안은 친우의 이마에 가만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싸늘히 식어 가는 체온, 핏기 빠져나간 얼굴…….
두 눈으로 확실히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구나.’
너를 다시 만나게 되면…… 에이프릴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정말 많았는데.
이런 식으로 이별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프리무스.’
결코 순탄치 않은 인생이었다는 것을 안다.
왜 굳이 자신에게 에이프릴을 맡겼는지도.
자신의 소중한 딸만큼은, 자신과 같은 운명을 걷지 않길 바랐겠지.
유복하게, 부족함 없이, 공주님처럼 자라길 바랐을 것이다.
‘……네 바람의 반은 이루어 준 셈이로군.’
에이프릴은 양육하기 수월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을 가장할 줄 아는 데다 무척 영리하고 시야도 넓었다.
무엇보다, 프리무스를 쏙 빼닮아서, 정의감 넘치고 저돌적이었다.
그래서 걱정이 많았다. 한때는 프리무스의 바람대로 ‘공주님처럼’ 자라게 하기 위해 밀턴 부인에게 숙녀의 교양을 배우도록 했더랬다.
그러나 에이프릴은 결국, 공주님처럼 곱고 천진하게 자랄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다.
네 살 무렵 어머니를 눈앞에서 잃었을 때부터, 아이의 세계는 너무도 넓어져 버린 것이다.
에이프릴은 어린아이의 좁은 세계에 있지 않았다.
글자를 떼고 학문을 익힐 무렵부터 대륙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두 나라의 정세와 수인 차별에 대해 공부하려 애썼다.
자신의 양딸이라 괜히 팔불출스럽게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니라, 에이프릴은 진실로 비범한 아이였다.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위대한 인물이 되겠지.’
그런 에이프릴의 앞길을 갈고닦는 것은 양아버지인 자신의 역할.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고 그 책무를 다할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 말고, 편히 쉬어라. 프리무스.’
그레이안은 잠시 눈을 감고 친우의 죽음을 마음 깊이 애도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해결하고 나면, 시신을 수습해 제대로 장례를 치러 줄 것이다.
‘넌 좋은 사람이었고, 좋은 친우였다. 네가 나에게 해주었던 모든 일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애도를 마친 그레이안이 눈을 뜨고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글로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에이프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충격에 젖은 아이의 비통한 얼굴이, 그레이안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착잡한 심경으로 손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곧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레이안은 짧게 한마디를 건네었다.
“프리무스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다.”
“…….”
울먹이는 에이프릴을, 똑같이 울 듯한 표정의 글로리아가 꼭 끌어안았다.
그녀와 계약한 세계수의 나비들이 주변을 날아다니며 에이프릴에게 빛의 가루를 뿌려대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좋지 않은 에이프릴의 몸 상태를 낫게 해주는 것이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힘을 아인스턴 왕국을 위해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글로리아 님.”
그때, 루시 언스워트라고 하는 마법사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그레이안은 살면서 몇 번 지어 본 적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인세구원회의 설립자, 아마도 라니에로 왕의 측근. 그리고…… 프리무스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
그레이안이 눈앞의 여자에게 원한을 품을 이유는 충분했다.
“헛소리하지 마. 성령들의 힘을 너희를 위해 쓸 일은 죽어도 없을 테니까.”
글로리아가 마침 루시 언스워트를 노려보며 따갑게 쏘아붙였다. 루시의 시선이 흘끗, 에이프릴 위를 스쳤다.
“자기 친딸도 아닌 아이를, 그것도 수인을 그렇게 싸고도는 게…… 저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네요. 글로리아 님, 당신은 수인을 싫어했잖아요? 수인만 보면 다 거꾸로 매달아 죽이고 싶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셨죠. 기억나지 않으세요?”
움찔한 글로리아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가 당황스러운 낯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건…… 내가 아니……. 아니, 기억 안 나.”
글로리아를 보는 루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잠시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뭐, 됐어요. 어차피 아인스턴 왕국을 배신한 이상, 당신의 미래도…… 진창으로 처박힐 테니까요.”
싱긋 웃은 그녀가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다시 탐욕 어린 눈동자가 아르윈을 향하고 있었다.
“개는 주인을 물면 안 되는 법이죠. 당신들을 잡아다가…… 수인이 인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확실하게 교육해 주도록 하겠어요.”
그녀와 회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의 지팡이 끝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르윈과 토끼 수인 마법사들 역시 반격할 준비를 했다.
더는 물러설 곳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대로 정면충돌만 남은 것이다.
무엇보다, 저 루시 언스워트라고 하는 마법사를 반드시 사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아르윈은, 혼자서도 저 인간 마법사들 모두를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원래 지팡이 따위의 도구는 잘 사용하지 않던 그가 허공에 오브를 소환해 냈다.
흡사 태양과 달을 연상케 하는 두 개의 동그란 구체가 그의 주변을 위성처럼 선회했다.
그것을 본 루시 언스워트는 아까보다 훨씬 긴장한 기색이었다.
“……대단한 오브네요. 어디서 구한 거죠?”
“넌 몰라도 돼.”
명백히 적의를 담아 툭 대꾸한 아르윈이 선공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잠깐. 다들 멈춰요.”
그레이안에게 에이프릴을 맡긴 글로리아가 앞으로 나섰다.
아르윈도, 토끼 수인 마법사도, 루시 언스워트와 그 부하들도 모두 글로리아를 쳐다보았다.
루시 언스워트 측은 당연히, 곱지 않은 시선들이었다.
“뭐 하실 말씀이―.”
“지금 이 상황, 라니에로 왕에게 중계되고 있지?”
정곡을 찔렸는지 루시 언스워트가 작게 움찔했다.
이내 아닌 척 웃어 보였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간파당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던 것처럼.
“……놀랍네요. 그것도 성령들의 능력인가요?”
글로리아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루시의 말을 무시했다. 대신 또박또박 자기 할 말만 했다.
“보고 있을 테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오늘처럼 토끼 수인들을 습격하고 살해하는 짓, 그밖에도 수인들을 탄압하고 엘로윈 왕국을 적대시하는 모든 행위…… 이쯤에서 그만 멈춰요. 그러지 않으면…….”
잠시 말을 멈춘 글로리아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못내 죄책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인스턴 왕국의 모든 농경지에, 큰 가뭄이 들게 하겠어요.”
그러자 루시 언스워트의 눈이 커다래지고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뒤편에 서 있는 회색 로브의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루시는 입술을 비틀더니, 실소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가능할 리가…….”
“가능해.”
눈부신 빛과 함께, 도저히 몇 마리인지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나비들이 글로리아 주변에 나타났다.
나비들은 영롱한 오팔색 빛을 내뿜으며 루시와 그 부하들을 한차례 파도처럼 훑고 지나갔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아무런 촉감도 들지 않았는데도, 그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흠칫하고 말았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대한 힘…….
이 세계를 창조하고 보살핀 위대한 세계수의 힘을, 성령들은 더는 감추지 않고 고스란히 내보냈다.
그 결과, 이 자리의 모두가 그 압도적이고도 거스를 수 없는 힘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글로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극단적인 조치라는 건 나도 알아요. 죄 없는 사람들도 피해를 보게 되겠죠. 하지만 더는 아인스턴 왕국을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했어요. 이대로 아무런 변화 없이 계속, 수인을 향한 혐오가 이어지다가는…… 이 세계는 결국, 파멸을 맞게 될 테니까.”
“…….”
“역사적으로 혐오가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아무리 작은 혐오의 씨앗이라도 종래에는 큰 전쟁을 일으키게 될 거예요. 그러니 내 경고를 들어요, 라니에로 왕. 세계수의 대행자, 세계의 조율자로서 명합니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 어디선가 차가운 실소가 울려 퍼졌다.
“건방진…….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고, 반쪽짜리 왕녀인 네가 정말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것이냐?”
빙하처럼 온도가 낮은, 오만함 어린 이 목소리는 분명 라니에로 왕의 것이었다.
흠칫한 글로리아가 루시의 주변을 살펴보았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별안간 흐릿한 구체가 나타났다. 그 구체는 점차 선명해지더니 또렷하게 동그란 모양으로 변했다.
멀리 있는 상대에게 영상이나 목소리 등을 전할 수 있는 마도구, 전송구 또는 통신구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어쩐지…….”
아르윈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정확히 전송구에 꽂혀 있었다.
“계속해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더라니. 저걸 감추고 있었군.”
아르윈의 말에 루시가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고, 라니에로 왕의 목소리가 잇따라 들려왔다.
“원래는 너를 다시 아인스턴으로 불러들여 성녀로 추대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
“너처럼 주제도 모르는 계집은 필요 없다. 아인스턴 왕가를 배신한 것을 확실히 후회하게 해주마.”
이윽고 전송구 너머에서 라니에로 왕이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어라 명령하는 냉랭한 음성이 흐릿하게 이어지더니―.
곧이어, 순식간에 누군가 이 장소로 이동해 왔다.
움찔한 글로리아가 눈을 크게 뜨며 미간을 좁혔다. 놀란 것은 글로리아만이 아니었다.
아르윈도 갑자기 난입한 검은 옷의 사람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강한 주술력이 느껴져. 마법사는 아닌 듯한데. 이곳으론 이동 마도구를 써서 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마도구를 사용한 이들에게 남는 마력흔이, 저 자에게선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르윈이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리는데, 제이드와 함께 에이프릴의 곁에 서 있던 로드리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빛은…….”
“……?”
로드리를 흘끗 돌아본 아르윈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소년은, 여태 본 적 없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입을 달싹이던 로드리가 다급히 글로리아에게 말했다.
“공작 부인,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저자는……!”
그러나 글로리아가 그에 채 반응하기도 전에,
홱!
검은 옷의 사람이 예고 없이 팔을 휘둘렀다.
그 순간 아르윈이 본능적으로 보호 마법을 펼쳤지만, 그의 강대한 마력이 무색하게도 보호막은 너무나 쉽게 뚫리고 말았다.
“안 돼……!!”
글로리아가 소리친 찰나, 세계수의 나비들이 한곳에 모여 방패와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검은 옷의 괴한이 날린 새카만 불꽃은 영체인 나비들마저 불태울 기세로 사납게 타올랐다.
그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글로리아가 빠르게 몸을 던졌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검게 타오르는 불꽃이 에이프릴을 휘감았다.
“에이프릴!”
경악해 달려드는 글로리아를 아르윈이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에이프릴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그레이안이 어떻게든 아이를 구하려 했지만, 사납게 타오르는 검은 화염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잠시 후 불꽃이 걷히고 에이프릴의 모습이 드러났다.
뜻밖에도…… 에이프릴은 멀쩡했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에이프릴……?”
그러나 에이프릴은 눈을 감은 채 힘없이 축 늘어졌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