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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20화 (120/144)

##  120화. 마지막 인사

강한 충격이 몸에 와닿았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에이프릴이 스르륵 눈을 떴다.

여전히 머리가 어지럽고 심한 두통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단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나…… 의식을 잃었던 건가……?’

멍하니 눈을 깜박이던 에이프릴은 자신이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프리무스였다.

‘뭐지……?’

왜인지 그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에이프릴이 그를 자세히 살펴보려 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계속 공격해!!”

“프리무스와 에이린을 지켜! 다들 보호 마법 준비해!!”

재빨리 두 사람 앞을 가로막은 토끼 수인들이 순식간에 보호 마법을 펼쳤다.

여럿이 모여 만들어 낸 보호 마법의 장막은 제법 튼튼했지만, 적들의 공격이 너무나 매서웠다.

심지어 적들은 토끼 수인들을 모조리 몰살할 생각인지, 폭발 마법까지 시전하기에 이르렀다.

파앗―!

쾅!!

여기저기서 빛이 번쩍이고, 땅과 나무가 폭발하며 폭음이 울렸다.

사람들의 고함과 여러 잡음이 시끄럽게 뒤섞였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상황 속. 에이프릴은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일단, 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해야 해……!’

에이프릴은 프리무스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를 땅에 눕혔다.

그 즉시, 프리무스가 쿨럭, 하고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아, 아버지……!”

“아무래도…… 내상을 제대로 입은 거 같은데…….”

작은 목소리로 말한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시들어 가는 들꽃 같은 미소였다.

“그래도……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에이프릴.”

“아…….”

에이프릴은 한 박자 늦게, 자신이 본명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물기 어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알고…… 계셨어요?”

“네가 우리 은신처에서…… 검을 뽑아 휘둘렀을 때쯤…… 알아차렸지…….”

프리무스가 느릿느릿 눈을 깜박였다. 곧 잠에 들기라도 할 것처럼.

“네 동작이…… 그레이안과 똑같더구나. 누굴 보고 따라 한 건지…… 척 보고 알았지…….”

에이프릴은 자신을 응시하는 프리무스의 눈에 깃든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것은 애정이었다. 그리고 뿌듯함, 대견함…….

“잘…… 자라 주었구나, 에이프릴.”

“…….”

울컥한 에이프릴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꾹 물었다.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향해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에이프릴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어려 시야가 흐릿했다.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알아……. 쿨럭……!”

“말하지 마세요, 제발…….”

프리무스는 입만 열었다 하면 피를 토해 내면서도 계속 말했다. 에이프릴이 그의 손을 꼭 잡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가로저었다.

투명한 물방울이 에이프릴의 눈에서 후드득 떨어져, 프리무스의 창백한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널 원망하지 않아, 에이프릴.”

“……!”

멈칫한 에이프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물론 한때는…… 네가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었지.”

“…….”

“널 보면, 죽은 클로에가 떠올라서 견딜 수 없었어. 클로에가 널 지키다 죽었다는 사실도……”

“…….”

“하지만, 그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야. 클로에가 목숨 바쳐 널 지킨 건……. 그 사실이 아무리 슬프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해도.”

“…….”

“넌…… 우리 소중한 딸이니까.”

기어코 에이프릴의 입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순간, 끝을 직감한 것은 프리무스만이 아니었다.

에이프릴은 익숙한 기시감에 속절없이 휩쓸려 가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 어머니를 잃었던 순간의 그 불길한 예감…….

다시금, 또 다른 작별이 다가오려 하고 있었다.

결코 원하지 않던 형태로.

“아, 안 돼…… 안 돼요, 이렇게는…….”

에이프릴은 프리무스의 손을 품으로 끌어당겨 안으며 오열했다.

원했던 재회는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자신이 얼마나 대단하게 성장했는지 친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여전히 자신을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두려움을 넘어설 만큼, 아버지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겨우, 이렇게 만났는데…….”

이런 식으로, 이렇게 비참하게 작별이라니.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널 다시 만나게 되면……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저도…… 저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 일찍 떠나지 말아 달라고, 에이프릴은 몸을 숙여 프리무스를 꼭 끌어안으며 애원했다.

프리무스의 손이 에이프릴의 뺨에 닿았다. 희미해져 가는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꼭…… 행복해지렴……. 에이프릴, 우리 소중한…….”

채 이어지지 못한 말이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섞인다.

프리무스의 손이 툭,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아…….”

에이프릴은 길게 외마디를 흘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눈을 감은 이의 맥을 짚었다.

고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 아아…….”

에이프릴은 허리를 숙여 두 팔로 프리무스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통곡했다.

그 애절한 울음소리가, 절망과 슬픔이 넓은 숲 한가운데 메아리쳤다.

* * *

시야로 들어온 광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족히 50명은 되는 마법사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여기저기 마법이 날아다녔고, 고함치는 목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렸다.

‘에이프릴은 어디에 있지……?!’

나는 아수라장 속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에이프릴을 찾으려 애썼다.

그런 내 손을 그레이안이 꽉 붙들고 있었다. 내가 갑자기 튀어 나갈 봐 걱정하는 것처럼.

“저 회색 로브를 입은 자들이 아인스턴 왕가의 비밀 부대일 거예요. 저자들의 통솔자는…… 저기, 저 붉은 옷의 여자일 테고요.”

제이드가 손으로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선명한 붉은 옷이 시야로 들어왔다.

그자의 등 너머,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작은 인영은…….

‘……에이프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에이프릴이 확실했다. 내가 에이프릴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으니까.

‘그리고 곁에 누워 있는 사람은…… 누구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레이안과 함께 서둘러 그쪽으로 달려갔다. 에이프릴 주변에는 푸르스름한 장막이 둘려 있었는데, 토끼 수인 마법사들의 보호 마법인 듯했다.

그들은 에이프릴을 보호하듯 둘러싼 채 붉은 옷의 여자와 대치하고 서 있었다.

“에이프릴!”

크게 부르는 내 목소리에 에이프릴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게다가…….

‘……피가 묻었잖아!’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에이프릴이 다친 것일까? 그리고 에이프릴의 품에 안겨 있는 저 남자는…….

“……프리무스…….”

그레이안의 멍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프리무스 모르토였다.

‘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거지? 설마…… 아니, 아닐 거야.’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마침 붉은 옷의 여자도 이쪽으로 몸을 틀더니 우리를 예의주시했고, 우리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본 듯이 냉소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게 누구야……. 귀하신 분이 납시었군요. 글로리아 왕녀님.”

붉은 옷의 여자 마법사는 나와 구면인 듯했다.

그러나 난 그녀의 이름 한 자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노려보기만 하다가, 입을 열어 차갑게 명령했다.

“비켜.”

“그리고 옆의 남자는 솔즈베리 공작일 테고요. ……흐음……. 이제 알겠군요. 저 하얀 머리 여자애가…… 솔즈베리 공녀인가 보죠?”

에이프릴을 슬쩍 돌아본 여자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 올라갔다. 동시에, 여자의 지팡이 끝에 붉은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마력을 아낄 필요 따위 없겠어요. 방금, 아주 좋은 생각이 났거든요…….”

여자가 지팡이로 에이프릴을 겨누었다. 나는 아르윈을 향해 다급히 소리쳤다.

“아르윈, 저 여자를 멈추게 해요!”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조금 화난 듯한 아르윈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다음 순간―.

붉은색과 푸른색의 빛이 번쩍, 충돌했다. 시야를 가린 섬광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깨를 흠칫 움츠렸다.

눈을 찡그린 채 빠르게 깜박이자, 좀 더 강력한 보호막이 에이프릴을 감싸고 있는 게 보였다. 틀림없이 아르윈의 마력일 터였다.

“……무슨…… 이런 터무니없는 마력이…….”

붉은 옷의 여자가 놀란 듯 아르윈을 응시했다.

아르윈은 같잖다는 듯 코웃음 치고는, 준비 동작도 없이 에이프릴 곁으로 순간 이동했다.

그러고는 붉은 옷이 돌아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에이프릴과 토끼 수인들을 이쪽으로 옮겨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당신…… 정체가 뭐죠?”

붉은 옷이 아르윈을 쏘아보며 물었지만, 아르윈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얼른 에이프릴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다친 데 없이 무사했지만…….

{닉스의 힘을 무리해서 사용했나 봐. 몸 안의 활력이 바닥이야.}

{이러다간 쇠약해지겠어.}

{게다가…… 이 남자…….}

어느새 팔랑거리며 나타난 나비들이 에이프릴과 프리무스 모르토의 주변을 맴돌았다.

나비들의 말이 이어지기 직전, 자리에 앉아 프리무스의 맥을 짚어본 그레이안이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맥이…….”

……그 뒷말은 잇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에이프릴이 왜 이렇게 넋을 놓고 있는지도.

그러나 나비들은 굳이 확인시켜 주었다.

{……죽었어.}

{아마 저 붉은 옷이 쏜 공격 마법에 큰 내상을 입었을 거야.}

……참혹한 최후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프리무스는 편안히 눈을 감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에이프릴과 어떤 대화를 나눴던 것일까?

나는 마음속 깊이 그를 애도하다가, 두 팔을 뻗어 에이프릴을 꼭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자 아이의 가냘픈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이, 속으로 삼키고 있을 울음이 너무나 가여워서―

나는 에이프릴을 더욱 힘껏 안아 주었다.

괜찮아, 달래는 말을 애써 중얼거리며.

“에이프릴…….”

옆에서 제이드의 착잡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프릴만 봤다 하면 늘 말 많고 끼 부리던 녀석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다른 사람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그럼 내 소개부터 하죠. 내 이름은 루시 언스워트. 당신들도 이미 잘 아는…… 인세구원회를 설립하고 운영한 장본인이 바로 나예요.”

한편, 아르윈이 계속 신원을 밝히지 않자 붉은 옷은 자기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상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려 할 만큼 아르윈이 인상적인 모양이었다.

“아, 그 미친 종교 집단 말이지. 아동 학대와 금지된 실험을 일삼는.”

아르윈이 냉소적으로 쏘아붙였지만 붉은 옷의 여자, 루시 언스워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르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상대에게 인간으로서의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흥미로운 실험 쥐를 관찰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당신은…… 아마 수인일 테죠. 아, 그래요, 눈동자와 피부를 보니 알겠어요. 분명 파충류과의 수인……. 대체 어떻게 그토록 강한 마력을 타고난 거지? 궁금해……. 잡아다가 해부해 보고 싶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이 루시 언스워트라는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세구원회의 설립자라니…….

‘작위가 있는 귀족처럼 보이진 않는데…… 글로리아와 구면인 데다 아인스턴 왕가의 비밀 부대를 이끌고 있다, 라…….’

이 여자, 틀림없이 라니에로 왕의 최측근 중 한 명일 것이다.

나는 아르윈을 올려다보며 다급히 말했다.

“저 여자, 사로잡아야 해요. 잡히면 자결할지도 모르니 못 하게 막고요.”

“물론이지요, 공작 부인. 저도 막 같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저 여자를 붙잡아 입을 열게 한다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에 더해, 라니에로 왕이 부정한 일을 저질러 왔다는 증거도 되겠지.

토끼 수인들과 싸움을 벌이던 회색 옷의 마법사들이 어느새 루시 언스워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숨을 거둔 프리무스를 흘끗 내려다보고는 비죽 웃더니, 탐욕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아르윈을 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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