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상황이 순조롭지 않다
“웅꺄앙?”
이게 뭔데? 하고 에이프릴이 물었다.
‘그 물건’을 주의 깊게 살펴보던 프리무스는 어깨 위의 토끼를 흘끗 곁눈질하며 입을 열었다.
“왕이 내리는 훈장이야. 여기 보면 아인스턴 왕가의 문장이 찍혀 있지. 보여?”
“웅꺗.”
훈장은 어린아이의 손바닥만 한 크기에 육각별이 새겨져 있었으며, 그 정중앙에는 아인스턴 왕가의 문장이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하사받은 이의 이름과 그 이유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이게 여길 총괄하는 노예상의 본명이야. 그리고 이유가……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왕가의 권위와 존속에 크게 이바지하였음. ……이 노예상, 꽤 애국자였나 보네.”
노예상 주제에 세금도 꼬박꼬박 내고 아인스턴 왕가의 비밀 실험에도 착실히 공헌한 모양이었다.
‘수인들을 실험체로 갖다 바친 것으로 말이지…….’
훈장을 노려보는 프리무스의 얼굴에 극렬한 증오감이 떠올랐다.
“……증거는 이거면 될 듯해. 더 시간을 끌다간 여기로 돌아온 노예상 무리와 마주칠 테니, 이쯤에서 그만 돌아가야겠어.”
“웅꺄앙.”
그리하여 프리무스는 일행을 다시 중심부로 소집했다.
17명 중 하나도 빠짐없이 모인 걸 확인한 후, 그가 이동 마법을 준비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이미 많은 마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이번에 장거리 이동 마법을 쓰고 나면 한동안 푹 쉬어야 할 터였다.
마법에 특화된 종족이라곤 하지만 사람인 이상 한계가 명백했기에, 동족들에게 대마법사라 칭송받는 그라도 휴식은 꼭 필요했다.
“자, 그럼…….”
준비를 마친 프리무스가 이동 마법을 시전하려던 순간이었다.
“저기다! 저놈들이야! 잡아!!”
하필 그 순간 본거지로 돌아온 노예상이 프리무스 일행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쯧, 프리무스가 혀를 찼다.
문제 될 건 없었다. 마법은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곧 강대한 마력이 일행을 감쌌고, 몸이 부유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이동하려던 순간―.
파앗―!
갑작스럽게 마법이 취소되었다.
누군가의 방해를 받은 것이다.
‘이건…….’
당황한 프리무스가 노예상 무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식으로 마법 시전을 방해할 수 있는 건, 자신과 대등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노예상에 그만한 실력자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이 노예상에 고용된 용병이 전부 몇 명인지, 마법사는 몇 명이나 있는지,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전부 파악하고 온 거였다.
자신이 아는 한, 노예상에 자신과 비등한 실력자는 없었다.
‘그렇다는 얘기는…….’
외부에서 온 다른 마법사가 있다.
프리무스는 본능적으로 보호 마법을 시전해 자신과 일행을 감싸게 했다.
푸르스름한 빛을 띤 투명한 장벽이 물거품처럼 동그랗게 부풀어 올랐다.
바로 그 순간, 노예상의 무리 쪽에서 공격 마법이 날아들었다.
“……!!”
붉은색 빛의 화살이 푸르스름한 장막과 충돌했다.
그 찰나 장막이 크게 흔들렸지만, 프리무스가 마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흩어지지는 않았다.
‘이자들은…….’
어느새 자신들과 대치하고 선 노예상 무리를, 아니, 그들을 도우러 온 듯한 정체 모를 자들을 프리무스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옷이며, 보호구며, 마법 장비까지…… 전부 최고급품이었다.
‘이놈들은 일개 용병이 아니야.’
신분을 파악할 만한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과 비등한 실력에, 저 정도 장비를 갖추었다면…….
‘……아인스턴 왕가에서 보낸 놈들인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족히 50명은 되어 보였다. 실전 전투에 투입할 만한 마법사가 50명이라니…… 노예상의 능력으로는 턱도 없는 일.
즉, 이자들은…… 아인스턴 왕가에서…… 혹은 그에 준하는 귀족 가문에서 보낸 것이 확실했다.
“잠시 중지.”
대치하고 선 양측의 긴장감이 팽팽하게 당겨지던 때, 노예상 측 마법사 한 명이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곧바로 공격 마법을 쏟아부을 기세이던 마법사들의 지팡이에서 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그들을 중지시킨,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법사는 프리무스를 유심히 관찰하더니 툭 질문을 던졌다.
“네가 프리무스 모르토인가?”
“……그렇다면?”
프리무스가 한껏 날선 목소리로 대꾸했음에도, 예의 우두머리 마법사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언뜻 인자하게까지 보이는 웃음이었다.
“프리무스 모르토, 토끼 수인들의 지도자.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
“선택권이라고……?”
“너 한 명이 우리와 함께 간다면, 네 뒤에 있는 동료들은 살려 주지. 그러나 거절할 경우에는…….”
붉은 로브를 입은 우두머리 마법사가 입꼬리를 좀 더 길게 끌어올려 웃었다. 이번에는 그 미소가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너희 모두를 학살할 것이다.”
.
에이프릴은 프리무스의 망토 주머니 속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았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한들은 노예상의 무리인 듯했다.
그러나 노예상의 무리라기엔……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혹시 모르니 나도 힘을 보태야겠어.’
프리무스의 주머니에서 폴짝 뛰어내린 에이프릴이 어른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다.
잇따라 프리무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보나 마나, 날 데려다 효시할 생각이겠지. 역모를 꾸미던 불온자를 잡아들였다면서.”
“하하, 눈치 하난 빠르네.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조건이잖아? 너 한 명의 희생으로 다른 토끼 수인들을 살릴 수 있다면.”
‘효시? 역모?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에이프릴은 혼란스러웠다. 저 마법사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설마 아인스턴 왕가에서?
‘예전에 들어본 적 있어. 아인스턴 왕가에서 은밀히 운용한다는 비밀 부대……. 그 부대의 표적은 토끼 수인들이라고 했지.’
저 마법사들이 그 비밀 부대인 것일까? 에이프릴은 닉스의 정령석을 손에 꼬옥 쥐었다.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이번에야말로 닉스가 깨어나 줬으면 하는데…….
“나 한 명의 희생은 무슨……. 나만 잡아가는 척하면서, 결국엔 다른 토끼 수인들도 모조리 몰살하려는 계획인 걸 내가 모를 것 같나?”
프리무스가 차갑게 쏘아붙이자 붉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의 입매가 비틀렸다.
언제 친절하게 굴었냐는 듯, 그 마법사는 혐오와 멸시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건방진……. 괴물 주제에…….”
“아, 그래, 너희는 수인을 동물과 섞인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우리 눈에는―.”
프리무스는 말끝을 늘이며 노예상의 본거지를 쓱 둘러보았다. 짐승을 가두는 철창과 족쇄, 구속구들이 널려 있었다.
“―이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보다 더한 짓도 저지르는 네놈들이 더 괴물로 보여.”
그러자 예의 붉은 옷을 필두로 한 인간 마법사들 사이에서 웃음이 번져 나갔다.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이.
“인간도 아닌 괴물인 너희를 짐승처럼 다루는 게 뭐가 문제란 거지?”
“……말이 안 통하는 놈들이었군. 시간 낭비야.”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그런 헛소리나 듣자고 네놈 같은 짐승과 말을 섞은 줄 아나?”
붉은 옷이 지팡이 끝으로 프리무스를 겨냥했고, 팽팽한 긴장감이 양측에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에이프릴도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닉스를 불렀다.
‘닉스,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깨어나 줘요! 위험한 상황이에요!’
그리고 공격은 불시에 시작되었다.
붉은 옷이 이쪽을 향해 가장 먼저 공격 마법을 날렸고, 잇따라 회색 옷을 입은 다른 마법사들이 붉은색 빛의 화살을 퍼부었다.
“다 쏟아부어! 저 보호막이 뚫릴 때까지!”
가차 없이 쏟아지는 공격에 푸르스름한 장막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프리무스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고,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에이프릴은 그를 걱정스럽게 응시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이들도 지팡이나 오브를 꺼내 들고 싸울 준비를 했다.
“더는 못 버텨. 곧 보호막이 뚫릴 거다. 다들 준비해!”
프리무스가 동료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에이프릴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애타게 닉스를 찾았다.
‘닉스, 제발……! 내 몸이 당신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망가지더라도 상관없어요! 제발 깨어나 줘요!’
강하게 진동하던 보호막이 파스스 흩어진 순간이었다.
“지금이다! 더 강한 공격을 쏟아부……!”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던 붉은 옷이 멈칫했다.
붉은 옷은 물론이고 그 뒤의 다른 인간 마법사들도 주춤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보호막을 잃은 토끼 수인들을 감싸듯이, 거대한 형체가 허공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닉스……!’
그 정체는 닉스였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처럼 빛나는 닉스가 상냥한 목소리로 에이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구나, 에이프릴. 곤란한 상황이니?}
에이프릴은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청했다.
“네! 제발 도와주세요!”
{물론 도와줘야지. 하지만…… 네 몸이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 그때는,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단다. 내가 현실에 현현할 수 있는 것은 계약자의 의식이 온전할 때뿐이야. 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면, 나도 다시 정령석 안에 깃들게 되지.}
“지금은 선택권이 없어요.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에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린 다 죽을 거예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한숨처럼 대답한 닉스가 인간 마법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곧 그들의 눈알이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흰자위까지 검게 덧칠해진 그 모습은 몹시도 기괴해 보였다.
“뭐, 뭐야? 아무것도 안 보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그건 대체 뭐야……?!”
그리고 에이프릴은 자신의 몸 안에 돌고 있던 활력이 쑥 빠져나가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꼈다.
몸이 버티지 못할지도 모른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아…….”
코에서 뭔가 미지근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더니, 손바닥 위로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살면서 한 번도 흘려본 적 없는 코피였다. 그것도 제법 많은 양의.
“에이프릴, 너……!”
때마침 곁으로 다가온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부축하며 입을 달싹거렸다.
머리가 어지럽고 윙윙 울리는 탓에, 에이프릴은 그가 자신을 본명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도망쳐요. 어서 이동 마법을…… 이 틈에…….”
에이프릴이 힘없이 띄엄띄엄 말했다. 속상한 듯한 닉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저들에게서 빛을 빼앗았을 뿐인데…… 역시 아직 못 버티는구나. 내가 너무 일찍 깨어났어.}
“괜찮아요, 전…… 어쨌든 시간은 벌었으니까…….”
휘청거리며 무너지려던 에이프릴을 프리무스가 가까스로 받아 안은 순간이었다.
“젠장……. 멈추지 마라! 눈이 보이지 않더라도 감으로 공격해! 당장 공격을 퍼부어!”
붉은 옷의 마법사가 독기 어린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언제 두려움에 젖어 있었냐는 듯, 회색 로브를 걸친 그녀의 부하들이 고함 같은 기합을 지르며 사방에 공격 마법을 날려대기 시작했다.
“저 미친놈들이……!”
“프리무스! 일단 여길 벗어나자!”
“지금 장거리 이동 마법을 시전할 순 없어! 공격을 피하면서 달려!”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번쩍 안아 올리며 소리쳤다.
그 상태로 그는 인간 마법사들과 반대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인간 마법사들은 그의 등 뒤에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여기저기 공격을 쏟아붓고 있었다.
“놈들이 도망친다! 쫓아! 안 보여도 쫓아가!”
붉은 옷의 마법사가 호령했다. 그녀의 부하들은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서로 밀치고 부딪치며 계속해서 토끼 수인들을 쫓아왔다.
그렇게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해안가에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닉스……. 좀 더 힘을 쓸 순 없나요? 저들에게서 빛을 빼앗는 거 외에…….’
이대로는 바다에 가로막혀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
저 미친 마법사들이 시력을 잃은 상황에서도 아무 데나 마법을 쏘아대니, 그야말로 난투극이 벌어질 터.
저들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 닉스의 힘이 한 번 더 필요했다.
그러나 닉스의 의견은 부정적이었다.
{네가 좀 더 버틸 수 있는 몸이라면, 망자를 다스리는 내 힘을 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 힘을 썼다간 네가 죽게 될 테니까.}
‘하지만…… 여전히 저들의 수가 너무 많―.’
“……시력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저기야! 저 밤하늘 같은 게 감싸고 있는 여자애를 공격해!”
하필 그 타이밍에, 더는 버티지 못하고 에이프릴의 의식이 일순간 끊기고 말았다.
동시에 적들의 시력을 앗아갔던 닉스의 힘이 흩어졌다.
계약자가 의식을 잃은 탓에 닉스는 어찌할 도리 없이 정령석 안에 다시 깃들어야 했고, 붉은 옷과 그 부하들의 공격이 프리무스와 에이프릴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프리무스!!”
“젠장……!”
프리무스가 서둘러 보호막을 쳤지만 금세 뚫리고 말았다.
새붉은 빛살이 에이프릴에게 직격하려던 순간,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꽉 안고 감싸며 몸을 틀었다.
날카로운 빛의 화살은 정확히 그의 등에, 심장이 있는 왼쪽 자리에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