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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18화 (118/144)

##  118화. 토끼 말을 들어라

어쩐지 머리색이 연푸른빛 도는 은발로 익숙하더라니!

어느덧 우리 앞에 다다른 제이드는, 우리를 쓱 둘러보며 의아하다는 투로 물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그건 이쪽이 할 말이다, 짜샤.

나는 제이드의 근처로 후다닥 다가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따졌다.

“너야말로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에 도대체 무슨 볼일로?”

“혹시 에이프릴도 함께 왔나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이 녀석아!

“에이프릴은 다른 데 갔어! 그래서 지금 쫓아가려는데 네가 뜬금없이 나타…….”

“예? 에이프릴이 어딜 갔는데요?”

제이드에게 꿀밤을 먹여 주고 싶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자식……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어.

“에이프릴이 어딜 갔는지 말해 줄 테니까 너도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설명해.”

“아……. 네, 그러죠.”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제이드가 뒷덜미를 긁적였다. 여전히 건방진 녀석이다. 나는 제이드를 한 번 흘겨 준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우리랑 같이 여행 중이었는데 도중에 마수를 만나는 바람에…….”

그렇게 설명하는 동안 제이드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특히, 에이프릴이 노예상을 치는 데 따라갔다는 대목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래서 지금 에이프릴을 쫓아가려던 중이었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얼른 서둘러야 하는데…….”

“……저도 갈게요.”

설명하는 도중에 제이드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드를 쳐다보았다.

“아니, 뭐?”

“저도 갈게요, 에이프릴을 찾으러.”

“아니…… 하…….”

또 머리가 아파 와 이마를 짚었다. 아니, 심지어 제이드 녀석까지…….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네 위치를 잘 파악하고 있긴 하니? 넌 칼윈 공자잖아. 네가 우리랑 위험한 곳에 동행했다가 불상사라도 당하면, 우리 입장이 난처해져. 네가 솔즈베리의 기사로 신분을 숨기던 시절엔 우리도 몰랐다고 변명할 수라도 있었지만…….”

“…….”

내 말에 제이드는 멈칫하더니 눈알을 굴려 허공을 보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빛을 보니, 내 말에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까처럼 막무가내일 때가 많아서 문제이지만, 이해력이 부족한 녀석은 아니지. 확실히.’

그러나 잠시 후 제이드가 꺼낸 말은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갈게요.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뭐어? 내 말 이해한 거 맞아?”

“어차피 아버지도 허락하실 겁니다. 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그러더니 제이드는 간략히 요점만 담긴 이야기를 깔끔하게 풀어놓았다.

제이드의 사연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근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이 은거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렇지 않아도 에이프릴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음. 아버지는 수인들을 돕는 데 관심이 많으니 자신이 노예상을 습격하러 갔다가 부상을 당하더라도 그러려니 할 것임.’

마지막 줄이 신경 쓰였다……. 아들이 부상을 당해도 그러려니 하는 아버지라니. 칼윈 공작은 도대체…….

“저희 아버지는 저를 유력한 후계자로 여기며 아끼시지만, 딱히 저에게 큰 애정을 지니신 건 아닙니다. 제게 하자가 생기더라도 다른 뛰어난 자녀가 많으니까요.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거죠.”

“…….”

“그러니까 괜찮아요. 너무 염려 마세요.”

……아니, 괜찮기는 무슨…….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레이안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나만큼이나 곤란해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그레이안은 매우 뜻밖의 결정을 내렸다.

“그래, 함께 가도록 하지.”

“……?!”

놀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그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초조한 기색을 읽어낸 나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에이프릴이 우선이라는 거구나.’

우리가 안 된다고 하면 제이드와 또 실랑이가 벌어질 테고, 그럼 시간을 끌게 된다.

그레이안은 그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럴 시간에 어서 에이프릴을 쫓아가야 하니까.

“동감입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당장 이동 마법을 준비하겠습니다. 모두 제 곁으로 모이십시오.”

마침 아르윈이 대화에 끼어들어 상황을 빠르게 종료시켰다.

곧이어 그가 이동 마법을 시전했고, 우리는 예의 섬으로 곧바로 날아오게 되었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될 거…….’

나는 한숨을 푹 쉬고서 제이드에게도 로드리에게 했던 것과 같은 충고를 했다.

제이드는…… 알았다고는 했는데, 정말로 알아들은 기색인지는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사고뭉치들이 많은 거야……. 진짜.’

물론 그중 최강은 에이프릴이다.

지금쯤 노예상이 있는 곳에 다다라 있을 거 같은데…….

‘무모한 짓 하지 말고 제발 무사히 있어 줘, 에이프릴!’

나와 일행은 노예상의 본거지를 향해 신속히 달려갔다.

그러던 중, 제이드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아, 에이프릴 일로 너무 놀라서 그만 깜빡했는데…… 오늘 제가 토끼 수인들의 은신처를 방문한 이유요. 경고하기 위해서였어요.”

“……? 경고? 무슨 경고?”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제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아인스턴 왕가의 비밀 부대가 움직였거든요. 옛날에, 토끼 수인들의 반란 이후 라니에로 왕이 그때와 같은 불상사를 사전에 막겠다며 꾸린 부대요. 주로 각지에 숨은 토끼 수인들의 추적과 몰살…… 그리고 그 밖에도 불온자를 솎아 내 처형하는 임무를 맡고 있죠.”

“……그런데, 그 부대가 움직였다고?”

“네, 오늘 아침에요. 그것도 대규모로.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요…….”

그래, 정말로 보통 일이 아닌 듯하다.

라니에로 왕이 또 뭘…….

표정이 저절로 심각하게 굳은 순간이었다.

“……!”

“이 소리는…….”

멀리서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정체 모를 폭음, 그밖에 온갖 잡음이 뒤섞인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 *

글로리아 일행이 섬에 도착하기 약 30분 전.

에이프릴과 프리무스 일행은 노예상의 본거지에 은밀히 잠입했다.

노예상 무리는 섬으로 다가오는 배에 정신이 팔려있었으므로, 경비를 뚫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뭐지? 방금 뭐가 지나간 거…….”

홱!

“억!”

이런 식으로, 프리무스가 기절 마법을 날려 보초들을 하나둘씩 처리했고, 일행은 수인 노예들이 붙잡혀 있는 중심지까지 어렵지 않게 도달할 수 있었다.

“히, 히익……!”

“쉿, 괜찮아요! 구하러 온 거예요!”

수인 노예들은 갑자기 나타난 에이프릴 일행을 보고 겁을 먹었지만, 자신들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 경계심을 풀었다.

“구속구 풀어 줄게요. 많이 답답했죠?”

일행은 수인 노예들에게 채워진 구속구와 족쇄를 풀어 준 후, 그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일단 프리무스의 이동 마법으로 이들부터 대피시킬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다들 모이셨죠? 이제부터 여러분을 안전한 은신처로 보낼 거예요. 그곳에 있는 저희 동료들이 여러분을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마세요.”

친절하게 설명한 프리무스가 이동 마법을 준비했다. 그의 주변에 강대한 마력이 공기를 울리는 게 느껴졌다.

에이프릴은 가방 속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자신의 친아버지가 마법을 쓰는 모습을 몰래 구경했다.

아까도 봤지만, 역시 아버지의 마력은 대단한 것 같다. 나도 검술보단 마법을 좀 더 익혔어야 했나?

‘그렇지만 내겐 닉스가 있으니까…….’

비록 잠들어 있지만. 어쨌든 자신은 대정령의 계약자였다.

에이프릴은 그 사실을 얼른 친아버지에게 자랑하고픈 충동적인 기분이 들었다.

‘미리 짜둔 계획에 방해가 될까 봐 여태 가방 속에 숨어 있었는데…….’

수인 노예들을 안전한 장소로 보내고 나면, 모습을 드러내도 되지 않으려나? 에이프릴은 앞발로 턱을 짚으며 고민에 잠겼다.

이윽고 대규모 이동 마법이 시전되었고, 수인 노예들의 모습은 본거지에서 사라졌다.

이로써 오늘 이곳에 온 목적 중 반은 이룬 셈이었지만…….

“그럼…… 찾아보자.”

“좋아, 수색 시작!”

아직 할 일이 남은 것인지, 일행은 두 조로 나뉘어 본거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에이프릴은 덜컹거리는 가방 속에 불편하게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더 무슨 일이 남은 것일까?

‘흠……. 물어봐야지.’

에이프릴은 후진을 모르는 토끼였다. 그렇기에 가방 속에서 냉큼 빠져나와 프리무스에게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냅다 프리무스의 어깨로 뛰어올라 안착하고는, 친아버지의 뺨을 앞발로 툭툭 쳤다.

“으헉, 깜짝이야!”

이번에도 프리무스는 알아차리는 게 늦었다. 진짜 바보 아니야? 에이프릴은 눈을 새초롬히 뜨고 프리무스를 노려보았다.

아니면, 내가 자연스럽게 기척을 죽이는 경지에 도달한 건가……?

‘훗…….’

에이프릴은 내심 자화자찬하며 더욱 기고만장한 태도로 프리무스에게 말했다.

“꺄웅잇.”

“너…… 에이린…….”

“웅꺗.”

“아니, 왜 여기까지 쫓아와!”

기가 막혀 펄쩍 뛰는 프리무스를 향해, 에이프릴이 매서운 앞발 펀치를 날렸다.

졸지에 얻어맞은 프리무스가 어안이 벙벙한 채로 작고 하얀 토끼를 쳐다보았다.

“끼얏꺄웅! 꺄앙!”

“……어, 그래…….”

뭐라고 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어느 정도 뜻은 통했다. 같은 토끼 수인이니까.

대충 ‘날 무시하지 마라!’라고 호통친 것이었다…….

“끼웅 꺄이잉?”

“음, 그게…… 아니, 그보다 너― ……하, 됐다.”

“꺄잇잉!”

“아, 알았어. 여길 왜 수색하냐면, 이 노예상이 아이스턴 왕가의 범죄와 연루되어 있어서야.”

“끼앙……?”

“그래……. 아인스턴 왕가에서는 ‘인세구원회’라고 하는 이상한 종교 집단을 만들고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뒤로는 수인들을 대상으로 비인도적인 실험을 자행해 왔지. 그렇게 희생된 수인 중 몇몇은 이 노예상에서 바친 거야. 우리는 그 정보를 얻자마자 여기에 올 계획을 세웠어. 아인스턴 왕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증거를 찾기 위해서.”

“끼얏꺄웅…….”

그랬구나, 하고 에이프릴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어깨에 앉은 흰 토끼를 힐끔거리는 프리무스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인스턴 왕가와 연루된 곳이니 무척 위험할 수밖에 없어. 그런데 네가 따라왔으니……. 하…….”

프리무스가 폭삭 늙은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프릴은 뒷발을 들어 토끼 귀를 후비작거리며 모른 체했다.

“웅꺄잉 끼앙.”

“네가 강해 봤자 얼마나 강하겠― 아, 알았어!”

화난 토끼가 또 앞발로 뺨을 후려치자 프리무스가 얼른 백기를 들었다.

에이프릴을 보는 그의 동공이 지진 난 듯 떨리고 있었다. 아니, 얘는 왜 이렇게 난폭해……? 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꺄웅―!”

토끼가 어서 저쪽을 수색해 보라며 앞발로 척 방향을 짚었다.

프리무스는 탈것 또는 시종이 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한편 그의 동료들은 프리무스의 어깨 위에 웬 토끼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흠칫흠칫 놀랐다.

‘저거…… 그, 에이린인가 걔 아냐……?’

‘맙소사,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환장하시겠다…….’

제멋대로 안하무인 토끼로 인해 어른들의 시름이 깊어져 가던 중,

“어……? 이거…….”

에이프릴의 명령에 착실히 따르며 수색하던 프리무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중요한 물증이 될 만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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