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17화 (117/144)

##  117화. 엇갈렸다…….

에이프릴은 그럴싸하게 검을 한번 휘둘러 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좀 멋진 동작이었다.

‘훗……!’

그러나 어른들의 반응은 시시했다.

“얘, 그런 거 갖고 놀면 다쳐!”

“이리 주렴. 내가 보관해 줄게.”

“그런데 방금 뭐라고? 우리랑 같이 간다고……?”

어른들은 에이프릴의 검을 뺏으려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황당하다는 뉘앙스의 웃음이었다.

“얘가 무슨 소리람.”

“가서 친구들이랑 간식 먹고 놀아라. 자, 검은 이리 주고.”

울컥한 에이프릴은 몸을 뒤로 빼며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일련의 동작들은 아주 능숙했지만, 이 토끼 수인들은 마법사이거나 정령사이기에 검술에는 문외한이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에이프릴은 토끼 수인 어른들을 노려보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이제 열세 살이고, 제 몸 하난 지킬 줄 안다고요. 검술도 베테랑 실력 정도는 되고…….”

“아이고, 얘가 무슨 소리야. 부모님이 네게 검술을 가르친 거니? 이렇게 작은 애한테 무슨 검술을…….”

“검술은 제가 원해서 익힌 거예요!”

에이프릴이 토끼 수인 어른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프리무스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이 보였다.

에이프릴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전과는 다르게 묘한 기색을 띠었지만, 에이프릴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지 말고, 검 이리 주고 가서 놀렴.”

“맞아, 애는 잘 놀면서 커야지.”

“검은 위험해서 안 돼. 차라리 마법을 배워 보는 편이 어때? 내가 가르쳐 줄게.”

“정령술도 괜찮고.”

무슨 말을 해도 들어먹지를 않는 어른들 때문에 심통이 난 에이프릴이 씩씩거렸다.

‘말이 통하질 않으니 이길 자신이 없다!’

잽싸게 토끼로 변신한 에이프릴은,

“끼우웅!!”

한 번 호통쳐 준 뒤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어른들이 어김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조그만 토끼 에이프릴을 마냥 귀여워할 따름이었다.

“쟤 진짜 귀엽다. 근데 부모가 찾고 있는 거라면 집을 찾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글쎄……. 자세한 건 나중에 물어보고. 일단 작전부터 마저 짜자.”

“아아, 그래.”

그렇게 토끼 수인 어른들은 다시 작전 상의에 돌입했지만…….

“…….”

에이프릴이 떠난 자리를 응시하는 프리무스는 복잡한 심경이었다.

‘저 애……. 혹시…….’

.

그 자리에서 줄행랑치긴 했지만, 에이프릴은 몰래 숨어서 어른들을 엿보고 있었다.

“꾸우웅…….”

오늘 바로 출발하려는 것 같으니, 지켜보다가 냉큼 쫓아갈 생각이었다.

‘내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겠어!’

토끼의 검정콩알 같은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특히, 프리무스의 뒤통수를 노려보면서 더욱 활활 타올랐다.

오랜만에 만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친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하고 싶다는, 다소 유치한 호승심이 들었던 것이다.

‘어떻게 나를 못 알아볼 수가 있어! 나를 원망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건 너무하잖아!’

극대노한 토끼가 혼자 깡충깡충 뛰며 캬악거렸다. 드래곤이었더라면 주둥이에서 불을 뿜었을 것이다.

.

분노의 토끼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모르는 채, 어른들은 노예상을 습격하기 위해 은신처를 떠났다.

에이프릴은 그들 중 한 사람의 가방 속에 들어가 몰래 따라갔다.

가방의 주인이 “아…… 가방이 왜 이렇게 무겁지?” 하고 중얼거렸을 땐 조금 움찔했지만, 다행히 들키진 않았다.

그렇게 (몰래 따라온) 에이프릴과 어른들은 노예상의 본거지에 도착했다.

그곳엔 수많은 수인이 족쇄와 구속구를 찬 모습으로, 철로 된 우리 안에 짐승처럼 갇혀 있었다.

* * *

“도착했어요! 여기가 바로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예요!”

메이브가 고향에 온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에이프릴을 찾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얼른 가서 부탁해 봐요!”

그리하여 은거지를 대충 둘러본 우리는 이곳의 토끼 수인들과 바로 대화를 나누었다.

토끼 수인들은 외부인인 우리를 보고 놀란 듯했지만, 솔즈베리 공작이라는 말을 듣자 쉽게 안심했다.

“솔즈베리 공작 각하, 오랜만에 뵙는군요.”

특히 실론이라는 사람은 그레이안과 구면인지, 나로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둘이서 주고받았다.

그렇게 실론과 몇 마디 나눈 후, 그레이안은 바로 본론을 꺼내 들었다.

“혹시 제 딸이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하얀 머리카락에 분홍 눈, 토끼 수인입니다. 그리고…… 프리무스의 친딸이기도 하지요.”

“예? 각하의 딸이라면…… 솔즈베리 공녀님? 그런 분은…….”

멈칫한 실론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 떠올린 기색으로.

“아니, 그럼 설마…….”

실론은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우리에게 서둘러 상황을 알려주었다.

“에이린이 솔즈베리 공녀님이자 프리무스의 친딸이었군요. 어쩐지 프리무스와 너무 닮았다 싶더라니.”

“에이린? 에이프릴이 가명을 댔군요.”

“예, 저희는 그저 프리무스의 먼 친척이라 닮은 줄로만…… 간혹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요. 같은 수인끼리는.”

“그렇지요. 모르셨을 만도 합니다. 프리무스는 에이프릴을 알아보던가요?”

“그게…….”

실론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얕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이상한데, 내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라고만……. 딱히 알아본 눈치는 아니었습니다…….”

“아…….”

그레이안은 알 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잘은 몰라도 프리무스 모르토는 상당한 허당인 모양이었다. 왠지 상상해 온 이미지와는 좀 다른데.

“그럼 프리무스는 에이프릴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겠군요. 두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아, 그게…….”

이번에도 어김없이 머뭇거리던 실론이 좀 더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이어서 실론이 전해 준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에이프릴이 노예상을 치는 데 따라갔다고요?!”

그때까지 얌전히 굴던 내가 못 참고 소리치자, 실론이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는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며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몰래 따라간 모양입니다. 함께 가고 싶다는 걸 저희 모두 말렸거든요……. 설마 숨어서 쫓아갈 줄은…….”

“허어…….”

기가 막혀 탄식이 나왔다.

이 토끼 녀석, 안전한 은신처에 왔으면 아무 데도 가지 말고 가만히 우릴 기다려야지! 또 위험한 곳에 뛰어들다니!

‘토끼 수인이 아니라 불나방 수인이냐고!’

“안 되겠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우리도 서둘러 쫓아가죠!”

그레이안을 홱 돌아보며 말하자, 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표정을 한 그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레이안이 실론을 향해 물었다.

“그 노예상의 본거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이동 마법으로 빠르게 다다를 수 있는 위치면 좋겠는데…….”

“아, 잠시만요, 지금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실론이 얼마 후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돌돌 말린 양피지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는 그 양피지를 테이블에 쫙 펼쳐 두더니 줄줄 설명했다.

“이건 저희가 찾아낸 노예상들의 위치를 기록해 둔 지도입니다. 보시면, 여기 이 빨간 점들이 전부 노예상들의 본거지입니다. 이 26곳 중 16곳은 저희가 전부 격파했지요. 그리고 여기, 아인스턴과 엘로윈의 국경 사이 서남쪽 바다를 보시면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세간에선 무인도로 통하지만, 실제로는 노예상이 본거지를 차린 곳이지요.”

이번에 털러 간 곳은 바로 그 섬이라는 모양이었다.

그럼 배를 타야 하는 건가? 에이프릴은 지금쯤 배에 타고 있으려나?

“일단, 서남쪽 해안가까지는 프리무스의 이동 마법으로 가고, 배를 타고 섬으로 접근한 후 다시 이동 마법을 써서 섬에 상륙한다는 계획이었죠. 그렇게 하면 노예상들이 섬에 다가오는 배에 정신이 팔린 사이 노예들을 쉽게 구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아하…….”

내가 추임새를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실론은 또 움찔하고는 나를 힐끔거렸다.

아니, 왜요. 이 사람도 나를 무서워하나 봐. 글로리아가 뭔 짓을 했던 건 아니겠지……?

“……아무튼, 저희 계획은 그렇다는 것이고, 공작 각하의 일행은 섬으로 곧장 이동하셔도 될 겁니다. 좌표는 저희가 미리 찍어 두었거든요. 다만…… 그러려면 상당한 마력이 드는데, 저로선 도와드릴 수가…….”

그러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아르윈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허리에 안 좋은 불량한 자세로 앉은 그는 비딱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뭐, 문제 될 게 있겠습니까? 안 그래요? 공작 각하.”

그래, 잘나셨다 이거지. 나는 그를 한 번 흘겨 주었다.

.

그렇게 되어 우리는 지도의 위치를 기억한 후 떠날 채비를 했다.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 입구에서 아르윈이 순간 이동 마법을 시전해 우리를 옮겨 줄 계획이었는데…….

“로드리, 너는 여기 남으라니까? 너도 에이프릴에게 고집이 옮은 거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이곳에 머물게 하려던 로드리가 자신도 함께 가겠다며 자꾸만 고집을 부렸다.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좌우로 가로젓는 로드리를 나는 착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얘도 열다섯밖에 안 된 어린 청소년이니 이왕이면 안전하게 있어 줬음 하는데…….

‘너무 강요하는 것도 문제일 테지……. 아이고, 머리야.’

어쩐지 머리가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짚는데, 로드리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공작 부인, 아시다시피…… 저도 한때 노예였습니다.”

“어……. 그랬지…….”

진지한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에, 나는 손을 내리고 로드리를 마주 보며 경청했다.

“……과거의 저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구해 주고 싶습니다.”

“아…….”

길게 탄식한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그랬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그럼…… 하는 수 없지. 너도 함께 가자.”

로드리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하자, 소년이 붉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고는 물었다.

“정말 가도 될까요?”

“응, 그래…….”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나 타인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영역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문제이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그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는 법. 하지만,

“단, 먼저 나서는 건 안 돼. 무조건 어른들 뒤에서 따라와야 해. 알았지? 혹시 전투가 벌어지면 그레이안 지시 잘 듣고. 도망치라고 하면 도망쳐야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또, 돌발 행동도 안 돼!”

“네.”

그러고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로드리는…… 말을 잘 듣는 편이니까. 조금은 덜 걱정해도 되겠지.

그렇게 로드리 문제가 해결된 후, 진짜 진짜로 여길 떠나려는데…….

“……음? 저기서 누가 오는데요?”

우리 중에 시력이 가장 좋은(아무래도 용이다 보니까) 아르윈이 가파른 산길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오긴 누가 와?’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아르윈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그러나 잠시 후, 내 시야에도 작은 점이 하나 나타나더니…….

‘……어라?’

곧이어 어딘지 익숙해 보이는 사람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저 머리색은……!’

놀란 나는 아르윈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저으며 요구했다.

“아르윈, 망원경 같은 거 있어요? 얼른 줘 봐요!”

“아, 제이드로군요.”

“……?”

……뭐냐, 이…… 영화 스포 당한 듯한 기분은…….

‘아니, 그보다― 제이드라고?!’

네가 여기서 왜 나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