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아버지라는 사람
아버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상상했었다.
그러나 막상 고대하던 상황이 닥치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은 새하얘지고, 준비했던 말들은 전부 잊어버리고 말았다.
“에이린이라고?”
“네…….”
어디선가 들려왔던 중저음의 목소리, 그 주인은 다름 아닌 에이프릴의 아버지였다.
프리무스 모르토.
그가 인파를 헤치고 등장한 순간 에이프릴은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마침내 아버지를 만났다는 감격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겁쟁이같이.
“흐음…….”
낮게 비음을 흘린 프리무스가 에이프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에이프릴은 아버지의 모습이 오랜 기억 속 그대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나이가 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때도 아버지는 젊었으므로 크게 변한 점은 없었다.
딱 한군데, 달라진 점이 있다면…….
‘……머리를 자르셨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에이프릴과 똑 닮은 은발을 어깨 아래까지 길러 하나로 단정히 묶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딱 어깨까지 오는 단발이었다.
그렇지만 홍옥처럼 붉은 눈은 여전했다.
여전히 아름다운 아버지였다.
“이상한데.”
“예? 뭐가 말입니까?”
“내 어릴 때랑 똑같이 생겼어.”
……에이프릴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야 당신의 딸이니까 그렇지! 정말로 날 못 알아보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그런 척하는 거야?
“혹시 내 친척인가? 사촌이거나…….”
“…….”
이쯤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밝혀야 하는 것일까. 에이프릴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고개를 살짝 기울인 프리무스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에이프릴을 응시하며 넌지시 중얼거렸다.
“내 딸이 지금쯤 네 나이대일 텐데…… 신기하네. 꼭 내 딸이 자란 것처럼 생겼어.”
……드디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일까? 에이프릴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어김없이 차게 식고 말았다.
“하지만 내 딸이 이런 데 올 리 없지. 그 애는 공주님처럼 대접받으며 잘 지내고 있을 거야.”
“…….”
여기 왔습니다만? 그리고 딱히 공주님처럼 대접받고 싶지 않거든요?
공주님은 무슨, 솔즈베리 공녀로 산다는 것은 의외로 배워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막중한 의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피력하고 싶었다.
에이프릴은 실로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친아버지를 도끼눈 뜨고 노려보며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친아버지고 뭐고…… 자기 딸도 못 알아보다니! 한 대 치고 싶었다!
.
프리무스는 바쁜 일이 있다며 가 버렸고, 결국 에이프릴은 자신의 정체를 밝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낮은 의자에 불량하게 앉은 에이프릴이 13세가 아니라 31세인 것처럼 한숨을 푹푹 쉬었다.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 때문에 팬지도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내가 원한 재회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아버지를 만난다. 대충, 오랜만이고 어쩌고 하는 대화를 나눈다……. 분위기가 잡힐 때쯤, 아직 나를 원망하시냐고 묻는다.
예상대로라면 그렇게 흘러갔어야 했는데, 아버지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생각보다 훨씬 더 또라이였다!
‘아! 화딱지 나!’
에이프릴은 탁자에 놓인 컵을 집어 들고, 안에 든 게 뭔지도 모르고 벌컥벌컥 마셨다.
다 마시고 나서야 맛이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뭔가 곡물을 볶아 끓인 듯한……? 맛이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에이프릴이 컵을 노려보는데, 팬지가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드디어 용기가 생긴 모양인지 팬지가 에이프릴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거…… 볶은 콩 차야.”
“볶은 콩 차……?”
“응, 여기선 자주 마셔. 저기……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저기로 가서 같이 놀자. 내가 다른 사람들 소개해 줄게.”
팬지가 에이프릴의 손을 살며시 잡아끌었다.
에이프릴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팬지를 따라갔다.
생각해 보니 이곳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정보나 얻을 생각이었다.
* * *
“에이프릴…….”
벌써 한 시간도 넘게 수색했지만, 에이프릴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우울해하는 내 주위를 나비들이 빙글빙글 맴돌며 위로해 주었지만,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얘들아…… 에이프릴의 흔적, 정말 안 보여? 아무것도 없어?’
{응…….}
{그 커다란 조류형 마수가 하늘로 이동해서…… 땅에는 남은 게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속 찾아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글로리아. 에이프릴은 이 세계의 주역이잖아. 쉽게 안 죽어!}
{맞아! 무사할 거야!}
나비들이 날개를 마구 팔랑거렸고, 때마침 누군가 곁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토닥였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그레이안이었다. 그는 나와 마찬가지로 시름이 깊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인……. 메이브가 잠시 할 이야기가 있다는군요.”
“메이브가……?”
흘끗 시선을 비껴 살펴보자, 아르윈 옆에 서서 머뭇거리는 메이브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레이안이 내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전해져 오는 따뜻한 온기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레이안……. 우리 에이프릴, 무사하겠죠? 강하고 씩씩한 아이니까…….”
“예, 무사할 겁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힘이 실려 있었다.
찔끔 삐져나온 눈물을 쓱 닦은 나는, 아르윈과 메이브 앞에 다다라 자세를 반듯이 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고 강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어른이니까. 메이브와 로드리도 많이 놀랐을 텐데,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이들이 더욱 불안해할 것이다.
그리고 에이프릴도……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강하게 잘 헤쳐 나가고 있을 테니까.
‘조금만 버텨 줘, 에이프릴. 엄마가 꼭 찾으러 갈게.’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으며,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메이브에게 질문을 건넸다.
“메이브, 할 말이 있다면서?”
“네, 그게…… 제 생각에는…….”
메이브는 소심한 기색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잘 정리하여 분명히 전달했다.
메이브의 생각이란, 정리하자면 이랬다.
1. 일단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음. 이러다 어두워지면 수색이 더 어렵고, 우리도 위험해지기 때문.
2.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에서 토끼 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에이프릴을 찾는 데 도움을 줄 것임.
3. 토끼 수인들은 이 근처를 자주 살피러 다니기 때문에, 에이프릴과 마주쳤을 가능성이 큼. 즉, 이미 누군가 에이프릴을 구해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로 갔을 수도 있음.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여태 여러 방법을 동원해 수색했지만 에이프릴의 흔적조차 못 찾았으니……. 심지어 아르윈이 용으로 변신해 날아다니며 살펴보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난 메이브의 제안대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해요?”
“저도 찬성입니다.”
“예, 뭐……. 저는 앞서 듣자마자 찬성이었습니다.”
“저도…….”
그레이안, 아르윈, 로드리가 차례로 대답했다.
재차 고개를 주억인 나는 메이브를 돌아보며 부탁했다.
“그럼 메이브, 안내해 주렴.”
그리하여 우리는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로 향하게 되었다.
* * *
‘왠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팬지가 가져다준 앵두를 야금야금 먹으며, 에이프릴은 저만치서 어른들과 이야기하는 프리무스를 훔쳐보았다.
에이프릴은 이곳 사람들과 대화해 이런저런 정보를 얻었는데, 일단 이 은거지에는 총 149명의 토끼 수인이 있고, 그중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37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중 절반이 마법사인데다가 이 은거지의 주민들 대다수가 간단한 마법 정도는 쓸 줄 알았기에, 외부로부터 마을을 감추고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문제는, 전투 인원들이 외부로 나가야 하는 임무를 수행할 때인데…….
‘그때는 은거지의 방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외부 활동을 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더한다는 모양이었다.
‘흐음…….’
지금도 분위기로 봐선…… 그 비슷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 같은데.
에이프릴은 궁금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토끼로 변한 다음, 기척을 죽이고 프리무스와 어른들 근처로 다가갔다.
무슨 이야기들을 심각하게 하는지 훔쳐 들을 요량이었다.
“어휴……. 걱정이네. 우리 중에 전투 가능한 인원이 한 다섯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한시름 놓을 텐데.”
“어쩌겠어, 전투 체질이 아닌 사람들까지 험한 일에 끌어들일 순 없지.”
어른들은 조그만 토끼가 곁에서 훔쳐 듣고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럼 17명이 거기로 가고, 나머지 20명은 여기 남는 거지? 프리무스는?”
“나도 당연히 가야지.”
“흐음……. 프리무스가 가면…… 실론은 여기 남아 줬으면 좋겠는데.”
실론이란 사람은 프리무스 다음으로 강력한 마법사라고 한다.
백금발에 초록 눈을 지닌 미남이었는데, 프리무스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그럼 난 여기 남을게. 임무 지휘는 프리무스가 하면 되니까. 보조는 캐럿이 맡으면 되고.”
“엥? 나?”
캐럿이라는 이름의 여자가 주홍색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가리켰다.
실론은 뭘 되묻느냐는 듯이 황당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럼 캐럿이 너 말고 더 있어?”
“아니, 나는…… 자신 없는데.”
“이런 것도 다 경험이야.”
“하아…….”
여기까지 훔쳐 들은 에이프릴은, 잘은 몰라도 전투 인원들이 나가서 수행해야 할 외부 임무가 있다는 사실은 파악할 수 있었다.
프리무스가…… 자신의 친아버지가 지휘한다는 임무.
대체 뭘까?
그 의문의 답은 잠시 후에 찾을 수 있었다.
“그 노예상에게 붙잡힌 수인들이 모두 몇 명이랬지?”
“열아홉이었나……. 아마 그럴걸.”
“그중에 토끼 수인은?”
“둘. 앨리스의 지인도 있대.”
“이번에는 어떡할 거야? 토끼 수인들만 데리고 올 거야? 아니면 다른 수인들도 여기 머물게 할 거야?”
“일단은 데리고 오겠지만, 다른 수인들도 저마다 고향이 있을 테니, 찾아 주는 편이…….”
그 대화를 숨죽여 훔쳐 듣던 자그만 토끼가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그렇구나. 그 ‘임무’란 노예상에게 붙잡힌 수인들을 구하는 거였어.
‘아버지, 여전히 정의롭게 살고 있구나.’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어렴풋한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도, 아버지는 부조리를 참지 않고 늘 앞장서 저항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두 조로 나누고, 어떻게 할지를 자세히…….”
대화는 거의 마무리 단계인 듯했다.
은거지에 남아 지키는 조와 은거지를 떠나 외부 임무를 수행하는 조, 이렇게 둘로 나뉘어 각자 상세한 작전을 짜려는 성싶었다.
에이프릴은 프리무스가 있는 ‘외부 임무 수행 조’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프리무스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안착했다.
심지어 프리무스 본인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보 아냐?’
조원들과 작전을 짜는 프리무스의 뺨을 하얀 토끼가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그제야 움찔한 프리무스가 홱 옆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어깨에 앉아 있는 조그만 흰 토끼와 눈이 마주쳤다.
“으악, 뭐야?!”
‘뭐긴 뭐야…… 토끼 수인이지. 그리고 당신의 딸이라고! 이 바보 같은!’
깜짝 놀라 소리치는 프리무스를 새초롬히 노려본 에이프릴은, 이 기회를 틈타 프리무스에게 앞발 펀치를 마구 날려댔다.
그렇게 좀 때리고 나니 기분이 한결 시원해졌다!
“아니, 왜 갑자기 때리는 거야? 너…… 에이린이니?”
“웅꺗.”
그렇다고 대답하는 토끼를 프리무스가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에이프릴은 “캬훙.” 하고 새침하게 코웃음을 치고는, 프리무스의 어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 재빨리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프리무스와 다른 이들을 쓱 훑어보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야기했다.
“노예상에게 붙잡힌 수인들을 구출하려는 거죠? 저도 갈게요.”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들 보란 듯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보시다시피, 전 검을 다룰 줄 알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