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화. 뜻밖의 동행
첫 사냥 이후 에이프릴이 깨달은 점은, 정말로 강해지려면 두려움을 억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자에 대한 두려움, 다른 생명체를 해치는 일에 대한 두려움.
그 두려운 감정은 완전히 씻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지만, 억누를 수는 있었다.
두려움을 억눌러야만 망설임이 생기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다.
‘실수하면 난 죽은 목숨이야.’
전투에 돌입하면 그곳은 약육강식의 세계가 된다. 이 큰새에게 패배하면 자신은 죽을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프릴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깨애액―!”
날개를 자르고,
“깨액―!”
발목의 힘줄을 잘라 내고,
“끼애애액―!”
바로 높이 올라 뛰어서 두 눈을 찔렀다. 그러고 나서는, 다른 쪽 날개도 마저 잘라 냈다.
‘마지막으로는…….’
에이프릴은 고통 속에 울부짖는 거대한 마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이 마수의 생명을 앗아가야 할 차례였다.
‘어쩔 수 없어.’
망설이면 내가 죽을 테니까.
에이프릴은 그레이안과 글로리아를, 로드리와 제이드, 메이브, 아르윈을……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서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들 걱정하고 있을 거야.’
다친 데 없이, 무사히 돌아가야 해. 엄마를 속상하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검을 꽉 고쳐잡은 에이프릴이 다시 높이 도약했다.
쇄애액―
공기를 가르고 휘둘러진 칼날이 거대한 새의 목을 단번에 내리치고,
“깩……!”
단말마의 비명이 뚝 끊기며, 마수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데구루루 구르다 뚝 멎은 마수의 목을, 에이프릴은 가만히 서서 내려다보았다.
“…….”
강한 마수와의 전투도,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도, 생각보다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만일…… 나와 똑같이 말하고 생각하는 상대의 목숨을 거두게 된다면…….
그때도 이렇게 차분할 수 있을까?
에이프릴은 검을 바로 집어넣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에 이 마수 외의 적은 없는 듯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에이프릴은 조심스럽게 동굴을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 보니, 도대체 어디인지 모를…… 황량한 절벽이 펼쳐져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자신을 이딴 곳에 던져놓은 큰새를 속으로 매도하며, 에이프릴은 절벽에 난 샛길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갔다.
샛길은 폭이 매우 좁아서 조금이라도 발을 헛디뎠다간 횡천길 행이었다.
‘닉스의 힘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목에 걸린 정령석 목걸이에 시선이 가닿았다.
정령은 아직 이 안에 잠들어 있었다.
조만간 닉스의 힘을 쓸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었는데…… 아직은 때가 아닌 모양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샛길을 따라 내려와 보니, 다행히 저 아래 숲이 나타났다.
‘아, 다행이다!’
물살이 빠른 계곡이나 어디로 통하는지 모를 협곡이 나타나면 어쩌나 싶었는데.
숲이라면 그래도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폴짝.
샛길이 끊기는 지점에서 뛰어내린 에이프릴이 숲 바닥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높이였기에 뛰어내리는 덴 문제가 없었다.
‘자, 그럼…… 보자…….’
에이프릴은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카로스 산 근처의 숲이라면…….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평야가 나올 테지.’
일단 그 평야까지 가서 인근의 마을을 찾아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이 낫겠지…….
빠르게 판단을 마친 에이프릴이 남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검은 아직 뽑아 든 채였다.
사박사박―.
찌르르―.
짹짹―.
조용한 숲속에서는 자신의 발소리와 풀벌레 소리, 새의 노랫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바스락―.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근처의 수풀이 얼핏 움직였다.
멈칫한 에이프릴은 경계 태세를 갖추고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다.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등 뒤가 나무 기둥에 맞닿게 했다.
이렇게 해야 뒤에서 갑자기 습격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뭐지……?’
분명 근처에 무언가 있었다.
마수일까? 아니면, 야생 동물?
자신처럼 조난당한 사람일 확률은…….
‘희박하지. 아무래도…….’
마수나 야생 동물일 가능성이 컸다. 이런 숲에는, 더군다나 이카로스 산 근처에는 위험한 마수가 서식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에이프릴은 검을 두 손으로 고쳐잡았다.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린 채, 양옆으로 빠르게 눈을 굴려 단 하나의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바스락.
“……!”
정확히 두 시 방향의 수풀이 다시 움직였다.
에이프릴이 그쪽을 향해 검 끝을 겨눈 순간이었다.
불쑥!
수풀 위로 웬 머리통 하나가 솟아올랐다.
사람의…… 머리였다. 그러니까…….
‘……나처럼 조난당한 사람이 더 있다는……?’
그 머리통의 주인과 시선이 마주친 에이프릴이 망연히 눈을 깜박거렸다.
그 사람은 검은 머리에 보라색 눈을 지닌, 제법 예쁘장한 외모였는데, 나이는 열넷 정도로 보였다.
여전히 검을 거두지 않은 에이프릴을 향해 그는 머쓱하게 웃더니, 항복하듯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수풀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 안녕……?”
“…….”
한가하게 인사나 할 상황인가 싶었지만…… 에이프릴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대에게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중에선 못 본 거 같은데…… 너, 혹시 토끼 수인이니? 아님 말고…….”
“……토끼 수인?”
자신이 토끼 수인인지는 왜 묻는 것일까?
고심하던 에이프릴의 머릿속에 어떤 가정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에이프릴은 지체하지 않고 얼른 물어보았다.
“혹시 너도 토끼 수인이야?”
“너도? 아! 역시 너도 토끼 수인이었구나! 어쩐지!”
기쁘면 폴짝 뛰는 걸 보니 영락없는 토끼 수인이었다.
에이프릴은 계속해서 물었다.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에서 왔어?”
“응. 너도 그런 거 아니었어? 오늘부터 앵두 따러 다니기로 했잖아. 그런데 야생 동물들이 벌써 다 먹었나 봐. 앵두나무에 앵두가 얼마 안 보이네…….”
붉은 열매가 가득 담긴 바구니가 그제야 시야로 들어왔다. ……이미 충분히 많이 딴 것 같은데. 속으로만 생각한 에이프릴이 재차 입을 열었다.
“이 숲엔 위험한 마수 없어? 왜 혼자 다니는 거야? 그래도 괜찮아?”
“응? 너 몰라……?”
“뭘?”
“이거…… 프리무스 님이 만들어 주신 보호구 말이야.”
프리무스라는 이름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한 에이프릴은, 곧이어 상대가 꺼내든 은빛 동전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이게…… 아버지가 만든 보호구라고?’
“이게 있으면 어떤 공격이든 세 번은 막을 수 있거든. 하지만 세 번 이후로는 파괴되니 조심해야 해. 이걸 다 쓰고 나면, 얼른 이동 마도구를 써야 하고…….”
이름 모를 토끼 수인은 또 다른 동전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이번에는 구릿빛 동화였다.
“이 이동 마도구도 프리무스 님이 만드신 거야. 프리무스 님 말로는, 각 마법과 상성이 맞는 보석에 담으면 더 오래 쓸 수 있대. 그런데 우린 그런 보석을 구하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동전에 담는 거야.”
“……그렇구나.”
에이프릴은 자신의 아버지가 뛰어난 마법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그러자 잊고 있던 기억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그 기억의 파도가 버거워, 에이프릴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고개를 마구 가로저었다.
아직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좋은 추억을 떠올리고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만일 아버지가 여전히 자신을 원망한다면.
그 추억이 너무나 슬퍼질 테니까.
“저, 저기…… 괜찮아?”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검은 머리의 토끼 수인이 곁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물었다.
에이프릴은 두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며 “응…….” 하고 간단히 대꾸했다.
그러자 검은 머리의 토끼 수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넌지시 바닥을 가리켰다.
“이거…… 떨어트렸는데.”
“아…….”
자신도 모르게 검을 놓친 모양이었다. 에이프릴은 민망해하며 검을 주워들었다.
몇 번 털어내긴 했지만, 검날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었다.
검은 머리의 토끼 수인은 그 피를 보고 조금 흠칫거리는 것 같았다.
“그…… 너는 무예를 익힌 거야? 대단하다. 토끼 수인은 완력이 강하지 않아서 무술은 어렵잖아.”
“무술은 완력보단 요령이니까.”
“그, 그래?”
“응. 은거지로 돌아갈 거지? 같이 가자.”
“어…… 그래……! 근데 넌 이름이 뭐야……?”
“난…….”
에이프릴은 자신의 본명을 말해도 괜찮을지 잠깐 고민했다.
밝히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어쩐지…….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실까?’
자신이 아닌 척 위장하고 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는― 불가해한 충동이 들었다.
결국 에이프릴은 가명을 댔다.
“난 에이린이야.”
“그렇구나! 에이린, 이름 예쁘다. 난 팬지라고 해.”
팬지가 보랏빛 눈을 접으며 수줍게 웃었다. 다시 봐도 참 예쁘장한 얼굴이었다.
“내 이름 좀 이상하지……? 남자애인데 팬지라니…… 꽃 이름이잖아.”
“뭐 어때? 잘 어울리는데.”
“그, 그런가?”
“응.”
팬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에이프릴을 힐끔거렸다. 수줍음 많지만 호기심도 많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나도 검술을 익혀 볼까……? 사실 난 마법에도, 정령술에도 재능이 없거든. 토끼 수인인데…… 이상하지?”
“다 각자 잘하는 게 있는 거지. 굳이 강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네가 잘하는 걸 찾아서 하면 되지.”
“그렇구나……!”
팬지는 감격한 듯 눈을 반짝였지만, 에이프릴은 다소 자기모순에 빠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강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니.
강해지려고 아득바득 노력했던 자신이 할 말은 아니지 싶었다.
.
팬지와 에이프릴은 30분쯤 더 걸어 어느 마을의 입구에 도착했다.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가 바로 이 마을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깊은 숲속에 감추어져 있으니, 과연, 찾기 어려울 듯싶었다.
‘난 바다 건너 섬이나 뭐 그런 데 있는 줄 알았는데.’
에이프릴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마을을 둘러보는 사이, 팬지는 어디론가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얘들아! 나 왔어! 그리고 여기……!”
팬지가 에이프릴을 소개하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에이프릴은 팬지와 함께 있는 이들을 향해 의례적인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얘도 같이 왔어! 에이린이라고 하는데, 숲속에서 만났거든.”
“에이린……?”
“처음 듣는 이름인데? 처음 보는 얼굴이고.”
“그러게. 누구지?”
다른 이들의 반응에 팬지가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그, 그래? 그렇지만 얘도 토끼 수인이야! 잘 봐봐!”
“흐음…….”
“팬지, 모르는 애를 막 데리고 오면 어떡해? 토끼 수인인 거 같긴 하지만…….”
같은 동물인 수인끼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느 정도는.
말인즉, 에이프릴이 토끼로 변신하기 전까진 에이프릴을 향한 의심이 완전히 불식되지 않는다는 이야기.
고로 에이프릴은 보란 듯이 토끼로 변신했다.
자그맣고 깜찍한 하얀 토끼가 나타나자, 먼발치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어느새 에이프릴의 주변은 복작복작해졌다.
“꺅! 너무 귀여워! 진짜 조그맣다! 아직 어린가 봐. 한 여덟 살쯤 됐나?”
‘무슨 소리야! 난 이제 열세 살이라고!’
분노한 에이프릴이 앞발을 휘둘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토끼 수인들은 새로 온 토끼를 귀여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상에, 털이 진짜 보드라워. 보송보송해.”
“너무 귀여워~. 당근 먹을래? 과일이랑 건초도 있어.”
‘만지지 마! 그리고 난 당근이나 건초 따위는 안 먹어!’
그렇게 에이프릴이 고초를 겪던 중,
“무슨 소란이지?”
어디선가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에이프릴은 심장이 마구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