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조난당했지만 침착합니다
또 아르윈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나 싶었는데, 한 시간 거리면…… 그냥 마차 타고 다녀와도 될 듯싶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토끼 수인들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숨어 지내고 있을 줄이야.’
아무튼 그렇게 되어 마차를 타고 막 출발하려는데, 아르윈이 공작성에 불쑥 나타났다.
“당연히 저도 동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떻게 자신을 쏙 빼먹고 갈 수 있느냐는 투였다. 마차가 출발하고 나서도 아르윈의 잔소리는 그칠 줄 몰랐다.
“그 은거지가 솔즈베리 공작령에 자리해 있다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여행길에는 무조건 마법사와 동행하십시오. 특히 어린 일행이 있는 경우에는…….”
그리 말하고는 아르윈이 메이브와 에이프릴을 힐끔거렸다. 하얀 토끼와 회색 롭이어 토끼는 사이좋게 앉아 간식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귀여워.’
라고 생각한 순간, 정확히 같은 감상이 아르윈의 얼굴에 떠오른 것을 포착해 냈다.
역시…… 까칠하게 굴면서도 내심 아이들을 아낀다니까.
.
마차는 예상대로 한 시간쯤 달려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 했다.
메이브 말로는 15분 정도면 은거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모양인데…….
‘……산길……이네…….’
나는 내 앞에 펼쳐진 구불구불 가파른 오르막길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저번에 이어 또 산길이었다. 그것도 매우 험준해 보이는 산길.
아니, 다들 왜 이렇게 산을 좋아해? 이왕이면 평야나 강가가 낫지 않느냐고!
“이 주변은 마수 출몰 지역이라…… 조심해야겠군요.”
심지어 마수 출몰 지역이란다. 그레이안이 근처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을 보며 나는 혀를 끌끌 찼다.
따라오길 잘했지. 아이들끼리 보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하다.
“토끼들아, 돌발행동하거나 혼자 멀리 가면 안 돼. 알았지? 어른들에게 꼭 붙어 있도록 해.”
“끼얏꺄웅.”
“웅꺄앙…….”
로드리야 워낙 믿음직스러우니 따로 주의를 줄 건 없고, 문제는 토끼들이었다.
마냥 얌전해 보였던 메이브도 알고 보니 에이프릴만큼이나 천방지축이었다. 토끼들이란…….
“얼른 출발합시다. 지금이 9시인데, 배고픈 마수들이 굴에서 기어 나오는 시각이 하필 지금쯤이거든요. 여기서 가만히 멈춰 있기보단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편이 나을 겁니다.”
대현자 아르윈 님께서 말씀하셨다. 오오, 아르윈 님……! 하고 경탄하며 손뼉을 쳐야 할 것 같다.
가끔은 아르윈도 에이프릴처럼 놀려 주고 싶다니까.
“방금 공작 부인이 저를 보며 기분 나쁜 상상을 하신 것 같은데.”
“네? 무슨 소리세요?”
귀신인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눈치가 백단이네. 나는 모르는 체 시치미를 떼며 그레이안 곁에 바짝 붙었다.
아르윈이 나를 의심하거나 말거나 일행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고, 에이프릴은 내 품에, 메이브는 아르윈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히, 힘들어…….’
산길을 오른 지 고작 5분 지났는데 벌써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 진짜 너무 저질 체력인 거 아니야……? 심각하다고…….
“끼우웅…….”
내 품 안의 에이프릴이 나를 한심하다는 듯이 흘겨보았다.
뭐, 이 녀석아. 네가 저질 체력인들의 마음을 알아? 나도 튼튼해지고 싶다고! 그런데 근육이 안 붙는 체질인 걸 어떡해!
“끼애웅~.”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에이프릴이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엇……!”
깜짝 놀라기도 잠시, 에이프릴이 순식간에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제가 안겨 가느니 걸어가는 게 낫겠어요. 아버지, 어머니 좀 업어 주세요.”
이 녀석, 사람일 때와 토끼일 때 성격이 점점 비슷해지는 거 같지 않아?! 내 앞에서 소심하게 쭈뼛거리던 에이프릴 어디 갔어?! 역시 그건 다 내숭이고 토끼일 때가 원래 성격인 거지!
“어머니……. 앞으로 저랑 날마다 스쿼트 100번씩 해요.”
야! 스쿼트를 어떻게 100번씩 해! 무릎 나간다고!
어이없어하는 나를 그레이안이 번쩍 안아 올렸다. ……? 저기요? 이게 업은 건가요? 공주님 안기 아니냐고?
“그레이안? 이게 뭐 하는 짓이죠?”
내가 항의했지만, 그레이안은 못 들은 체하며 산길을 올랐다. 공주님 안기로 나를 안아 든 채로……. 참 대단하다. 팔 힘도 좋아.
“아……. 너도 직접 걷고 싶어?”
한편, 아르윈의 품에 안겨 가던 메이브도 에이프릴을 따라 스스로 걷고 싶어 하는 모양이었다.
아르윈은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메이브가 아르윈의 품에서 폴짝 뛰어내렸고, 재빠르게 사람 모습으로 변신해 에이프릴 곁으로 달려갔다.
“아, 로드리 경…….”
에이프릴의 손을 꼭 잡은 메이브가 로드리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조금 머뭇거리던 로드리가 그 손을 잡았고, 그렇게 셋은 나란히 손잡고 산길을 올랐다.
‘귀여워.’
나는 사이좋은 아이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렇게 산길을 오른 지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잠깐.”
선두에서 걷던 아르윈이 돌연 멈춰 섰다. 정면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레이안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다.
‘뭐지? 설마, 마수?’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사방에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크르릉…….”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진짜 마수였다!
나무와 수풀 사이에 숨어 있던 마수들이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마수들의 입가에는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히, 히익! 저게 뭐야! 사람 피는 아니겠지?’
나는 냉큼 그레이안의 품에서 내려와 그의 등에 바짝 붙어 섰다. 그의 오른손은 이미 검 손잡이에 가 있었다.
“그, 그레이안, 조심해요. 얘들아, 얼른 이리로 와!”
나는 후다닥 손짓해 아이들을 불렀다. 메이브는 갈팡질팡하다가 내 곁으로 왔지만, 다른 녀석들이 문제였다.
로드리와 에이프릴도 검을 뽑아 들고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다.
‘야! 이 녀석들아!’
만용도 작작 부리라고! 너희 아직 성년식도 안 치렀거든?!
“에이프릴! 로드리! 어서 이리로 오지 못해?!”
내 호통에 로드리는 조금 움찔했지만, 에이프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이 정말……!
난 일단 서둘러 나비들을 불러냈다.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나비들이지만, 마수들에게 혼란을 주는 등의 쓸모는 있을 테니까.
‘너희 중 반은 나랑 메이브 곁에 있어 주고, 반은 로드리와 에이프릴을 지켜줘!’
{알았어!}
{노력해 볼게!}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이 나비들이 과연 도움이 될까?
―라고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나비들은 꽤 도움이 됐다!
전투가 시작되자 그레이안과 아르윈이 선두에서 아이들을 지키며 싸웠고, 나비들은 주변의 나무를 쓰러뜨리거나 마수들의 발아래 깊은 물웅덩이를 만들어 빠뜨리는 등 제법 역할을 했다.
‘그렇구나……! 나비들의 능력은 자연과 관련된 거니까!’
이런 식으로 자연물을 조작해서 전투에 응용할 수 있는 거였어! 나름 대단한데?
‘얘들아! 화이팅!’
{훗…….}
{지켜보시라구요 주인님, 우리의 멋진 활약을…….}
저놈의 주종 플레이에 재미 들였나 보다.
여하튼, 그레이안과 아르윈의 능숙한 협동 전투, 그리고 나비들의 서포트 덕분에 상황은 점차 우리에게 유리해졌다.
우리를 습격한 마수들은 곰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이빨이 훨씬 더 날카롭고…… 뭐랄까, 괴물곰? 그렇게 이름 붙여야 할 생김새였다.
“크르릉……!”
마수들은 위협적이었지만 우리 일행도 만만치 않게 강했다. 심지어 에이프릴과 로드리도…… 제법 잘 싸웠다.
작고 민첩한 몸으로 마수들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마수들에게 치명상을 입히곤 했던 것이다.
열 마리쯤 되던 마수들의 숫자는 이제 세 마리로 확 줄었다.
가장 강해 보이는 세 마리가 버티고 있었지만, 우리의 전력이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마수들은 궁지에 몰린 상태였다.
‘이제 조금만 더……!’
두 마리를 차례로 제압한 그레이안과 아르윈이 남은 한 마리를 공격하려던 순간이었다.
“우오오―!”
갑자기 마수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죽음을 앞둔 동물의 마지막 포효 같기도 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불길한데.’
싸한 기분이 등골을 타고 정수리까지 올라온 순간―
쿠구궁!
콰광―
두두두두!
별안간 지면이 크게 흔들리더니, 산 위쪽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낙석입니다! 피하십시오!”
“부인! 에이프릴!”
“난 괜찮으니까 애들부터 챙겨요!”
“엄마……!!”
흔들리는 땅과 우르르 떨어지는 돌덩이들. 정신없는 와중,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에게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아……!”
아주 미미한 차이로 두 사람의 손이 맞닿지 못했고, 마침 둘 사이로 굴러떨어진 낙석이 둘을 갈라놓았다.
“에이프릴!!”
에이프릴을 놓친 그레이안이 크게 소리쳤다. 뒤이어 “공녀님!” 하고 외치는 로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어 굳어 있다가,
“에이프릴……!”
나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에이프릴을 향해 달려갔다.
하필 그 순간 날 향해 커다란 돌덩이가 날아들었고, 누군가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덕분에 돌덩이는 피했지만, 나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에이프릴이―
“에, 에이프릴은 어디에 있죠? 안 보여요! 시야에서 사라졌다고요!”
“진정하십시오, 공작 부인!”
그제야 나는 날 구해준 사람이 아르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멀리서 새의 울음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이내 커다란 날개를 펄럭이며 나타난 독수리― 아니, 그보다 훨씬 큰 몸집의 마수가, 먼발치의 무언가를 잽싸게 낚아채 갔다.
그건 다름 아닌 에이프릴이었다.
“에이프릴! 안 돼!!”
아르윈이 그 날개 달린 마수를 향해 마법을 쏘았지만, 마수는 그 자리에서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그리고 에이프릴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 * *
에이프릴은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조류형 마수의 갈고리 같은 발톱에 콱 잡힌 채 납치당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의 손을 놓친 건 실수였지만, 괜찮았다. 에이프릴은 낙석을 알아서 잘 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고로 요리조리 낙석을 잘 피하고 있었는데, 웬 조류형 마수가 나타나 자신을 잡아챘고…….
지금 이 상황이었다.
“……허어…….”
에이프릴은 황당함에 탄식을 흘리며 조류형 마수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크기가 심상치 않은 마수였다. 아까 그 괴물곰 같은 마수가 이 산에 서식하는 마수들의 왕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왕은 바로 이 조류형 마수인 모양이었다. 궁지에 몰린 백성의 울부짖음에 왕께서 행차해 주신 것이었다.
지진을 일으키고 낙석을 유도한 것도 이 조류형 마수일 테고.
‘마수 도감에서 본 적 없는 마수야. 아마 돌연변이일 테지. 대충 큰새라고 불러야겠다.’
매우 직관적인 작명이었다.
‘이 큰새가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좀 도착했으면 좋겠네.’
발 디딜 곳이 생기자마자 일단 날갯죽지부터 베어내고, 그다음은 발목의 힘줄을, 바로 올라 뛰어서 눈을……. 그러고 나서 다른 쪽 날개도 마저 잘라내고, 마지막으로 목을 쳐야지.
에이프릴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구상하며 검을 슬쩍 고쳐잡았다.
잠시 후, 큰새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동굴에 자리한 커다란 둥지였다.
알이나 새끼는 보이지 않았고, 지푸라기와 동물 사체, 뼛조각 따위가 사방에 늘어져 있었다.
큰새가 에이프릴을 둥지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데굴데굴 구른 에이프릴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자세를 정비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