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언제나 네가 걱정이지
에이프릴의 친아버지, 프리무스 모르토는 원작에 단 몇 줄 서술될 뿐인 단역이었다.
그의 출연 비중은 현저히 적은데, 에이프릴의 회상에서 한 번, ‘프리무스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네…….’ 하는 엑스트라의 대사에서 한 번, 그리고 에이프릴의 독백에서 두어 번 언급될 뿐이었다.
왜냐면, 엑스트라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그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원작에서는 에이프릴이 스물한 살쯤에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를 찾아내지…….’
그리고 에이프릴에게 은거지를 알려준 토끼 수인은 메이브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었다.
스물한 살의 에이프릴이 노예 경매에서 구출해낸 토끼 수인 엑스트라.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그 토끼 수인 덕분에 에이프릴은 동족들의 은거지를 찾아갈 수 있게 되지만, 그곳에서 지내던 에이프릴의 친아버지는 이미 죽은 후였다는 것.
그게 원작의 내용인데…… 이번에도 어김없이, 내가 개입하는 바람에 흐름이 달라졌다.
‘에이프릴의 친부가…… 아직 살아 있구나. 그럼 에이프릴과도 만날 수 있겠지. 원작과는 다르게 말이야.’
흐음…….
프리무스 모르토가 어떤 사람이었더라……. 이렇게 빨리 에이프릴과 만나게 해도 괜찮을까?
‘나비들을 불러서 본문 검색 기능을 쓰고 싶은데…… 에이프릴이 지켜보고 있으니―.’
나는 에이프릴을 힐끔 살펴보았다. 그레이안과 내가 상의하는 동안, 에이프릴은 메이브와 함께 토끼 모습으로 놀고 있었다.
에이프릴이 메이브에게 토끼 뒷발차기나 앞발 휘두르기 따위를 가르쳐 주고 있었는데…… 회색 롭이어 토끼 메이브도 곧잘 따라 했다.
앞발 뒷발을 획획 휘두르는 사나운 토끼들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역시 토끼는…… 사나운 동물이야…….
‘……혹시 메이브도 야채를 거부하는 육식 토끼인가……?’
에이프릴에게 돌려차기를 배우는 메이브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나는, 그레이안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밖으로 나왔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자.’
에이프릴이 엿듣지 못하는 자리에서 본문 검색 기능을 쓰기 위해서였다.
마침 여기 복도에 창고로 쓰이는 듯한 빈방이 있어, 그곳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런 뒤 곧바로 나비들을 불러내 부탁했다.
‘얘들아, 검색 좀 하자.’
{네~ 고객님~ 뭘로 할까요? 네×버?}
‘뭔 소리야. 본문 검색하자고. 원작 말이야.’
{아하…….}
{사실 네×버 어쩌고는 농담이었어.}
{농담조차 싸늘하게 받아치는 글로리아…….}
{유머가 부족하다~}
{우우~}
나비들이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야유했다. 나는 날파리 쫓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나비들을 타박했다.
‘쓸데없이 장난치니까 그렇지. 빨리 검색 기능이나 내놔!’
{너무해~!}
{우리에게 좀 더 상냥하게 대해달라구~!}
{글로리아는 에이프릴만 좋아하고―!}
늬들이 네 살배기 어린애냐……. 나이도 몇 천 년 넘게 먹었을 거면서.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흘겨보기만 하자, 나비들은 그제야 유치하게 구는 것을 포기했는지 순순히 시스템 창을 내 눈앞에 띄웠다.
{뭘 검색할까요? 주인님?}
{뭐든 말만 하세요……. 주인님…….}
{주인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하다 하다 이젠 주종 플레이까지……. 이 나비들의 뇌 구조를 해부해 보고 싶다. 이놈들은 생명체가 아니라서 뇌가 없지만…….
‘이상한 컨셉질 하지 말고, 프리무스 모르토에 대해서 검색해 줘.’
{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왜 이렇게 아련해…….
잠시 후, 나비들이 검색 결과를 시스템 창에 띄웠다.
그리고 나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역시나…….’
진짜 몇 개 안 나오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을까 싶어 검색해 본 건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
내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뿐이었다.
친아버지가 자신을 원망했으리라 굳게 믿는 에이프릴의 상처 많은 독백.
한 엑스트라가 {“프리무스는…… 언제나 동족을 위하는…… 정의롭고 좋은 사람이었지…….”} 하고 회상에 잠긴 듯 중얼거리는 대사 한 줄.
그리고……
{“프리무스가 제 딸에 대해 얘기하는 건 들어본 적이 없네. 아내에 대한 이야기라면 몇 번 들어봤지만…… 으음…….”}
……그런, 의미심장한 대사.
저 대사를 읽고 나니 어쩐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역시…… 프리무스 모르토는 자신의 딸을 원망했던 것일까?
아내가 딸을 구하려다 죽었으니까?
‘하지만 그때 당시에 에이프릴은 고작 네 살이었는데…… 네 살짜리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때도 그렇고 열세 살인 지금도, 에이프릴은 어른들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였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어린아이를 원망한다는 건, 인격적으로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뭐…… 그런 창작물 속 클리셰를 많이 봐 왔지만…….’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는 바람에 그 아이를 원망하는 아버지라든지~ 그렇지만 그런 건 다 픽션이라 이해하는 거고. 현실에서 그러면 부모 자격 박탈이지.
‘이건 좀 더 고민해 봐야겠는데…….’
에이프릴을 프리무스 모르토와 만나게 해도 될지, 어떨지…….
그레이안과 긴히 상의해 봐야겠다. 지금 말고. 이따 밤에 단둘이서만 있게 되면.
.
그렇게 본문 검색을 마치고서 휴게실로 돌아와 보니…….
“끼얏웅!”
“애우웅…….”
“꺄웅~!”
……로드리가 고통받고 있었다.
토끼 둘이 고양이(새끼 호랑이) 하나를…… 둘러싸고…… 뭘 하는 거지? 싸움 연습?
“얘들아, 이제 그만…….”
그리고 그레이안은 깡패 토끼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보아하니 토끼들은 새끼 호랑이와 대련을 하고 싶은데, 새끼 호랑이는 토끼들이 다칠까 봐 아무것도 못 하고 벌벌 떨기만 하는 모양이었다.
‘허허허…….’
나는 속으로 허탈하게 웃으며 그리로 다가갔다. 마침 나를 발견한 에이프릴이 “꺄앙!” 하고 소리치며 폴짝 뛰어올랐다.
그래, 토끼야. 친구랑 놀아서 기분 좋으니? 나는 토끼의 작은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쫑긋한 귀가 접혔다가 솟았다가 했다.
“에이프릴, 로드리 그만 괴롭혀. 로드리가 곤란해하잖아.”
“꺄웅?”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이 에이프릴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 녀석이 어디서 귀여움으로 무마하려고……! 하지만 정말 귀엽군. 나는 토끼 머리를 또 쓱쓱 쓰다듬었다.
“그레이안도 바쁘니 이제 슬슬 공작성으로 돌아가야지. 메이브도 함께 가자.”
“웅꺗!”
에이프릴이 좋다며 깡충 뛰었고, 메이브는 당황한 듯 작게 움찔했다.
나는 한 팔로는 하얀 토끼 에이프릴을 안아 들고, 다른 쪽 팔로는 회색 롭이어 토끼 메이브를 안아 들었다.
“내 생각엔 메이브, 너도 공작성에서 지내는 편이 좋을 거 같아.”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묻는 것처럼 메이브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나는 회색 롭이어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어…… 줄 수는 없어서, 대신 상냥하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에이프릴의 동족 친구이니까 가까운 곳에서 함께 지내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싫으면 거절해도 되고.”
“꺄앙……!”
전혀 싫지 않다는 듯이 메이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귀여워……! 메이브를 마구 쓰다듬고 싶었지만, 두 손이 자유롭지 않아서 그럴 수 없는 게 너무 아쉬웠다. 나중에 꼭 쓰다듬어 줘야지.
여하튼 그렇게 되어 메이브가 합류한 우리 일행은 마차를 타고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공작성에 도착하자마자 에이프릴과 메이브는 놀러 정원으로 뛰어갔고, 로드리가 헐레벌떡 뒤를 쫓아갔다.
극한 직업 에이프릴의 호위 기사……. 로드리의 봉급이 얼마더라? 좀 올려 줘야겠다…….
“그럼…… 애들은 놀게 놔두고, 어른들끼리 잠깐 얘기 좀 할까요?”
그레이안을 돌아보며 묻자니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나는 2층의 거실로 와서 햇빛이 가득 쏟아져 들어오는 창가에 티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았다.
창밖으로 토끼 두 마리와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정원에서 저러고 놀면 셋 다 흙투성이에 풀물이 들 게 뻔하니 이따가 목욕을 해야 할 것이다…….
‘뭐…… 어릴 때 아니면 언제 저러고 놀겠어.’
귀여운 녀석들. 설핏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기울였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그레이안을 돌아보며 본론을 꺼내 놓았다.
“프리무스 모르토 말인데요.”
“아…… 네.”
“당신의 친우이지요? 어떤 사람이었나요? 에이프릴과 만나게 해도 괜찮을까요?”
찻잔을 내려놓은 그레이안의 침묵이 길어졌다. 그도 나만큼이나 고민이 깊은 표정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제 생각에는…… 조금 이르지 않나 싶습니다.”
“어째서요?”
“……에이프릴이 아직 어리니까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에 하나 프리무스가…….”
잠시 말을 멈춘 그레이안의 얼굴에 착잡한 기색이 드리웠다. 뒷말은 굳이 잇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나 역시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으니까.
“……에이프릴을 원망할까 봐, 걱정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내 물음에 짧게 대답한 그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기억하는 옛 친우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프리무스 모르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단호한 성격에, 고집이 센 편이었지요. 좋게 말해 의지가 강했고……. 무엇보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반항적인 기질이 있어서…… 토끼 수인들의 반란 때도 앞장서서 사람들을 이끌곤 했습니다.”
원작에서 서술되어 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레이안의 말이 이어졌다.
“프리무스가 좋은 친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좋은 아버지일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
대화의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에이프릴이 친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데 뜻을 모았지만, 문제는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순순히 받아들일 에이프릴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에이프릴이라면 우리 몰래 메이브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도 남았다.
그렇게 놔둘 바에는 차라리 결정권을 에이프릴에게 넘기고, 여행길에 동반하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에이프릴을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해서, 네 생각은 어때? 친아버지를 꼭 만나고 싶니?”
정원에서 뛰노느라 흙투성이가 된 에이프릴을 씻겨 주며 넌지시 물었다.
토끼 전용 욕조에 나른하게 앉아 있던 에이프릴은 나와 눈을 마주쳐 오며 고개를 끄덕였다.
“웅꺗.”
어느 모로 보나 그렇다는 뜻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하얀 토끼의 조그만 몸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그 순간 토끼가 부르르 몸을 떨었고,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내 얼굴과 옷도 축축해졌다.
팔을 들어 얼굴을 슥 닦은 나는 토끼의 털을 꼼꼼히 헹궈 주면서 재차 이야기했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돼, 에이프릴.”
“끼애웅.”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아직 열세 살이라구…….”
“끄웅……. 캬우웅.”
“애 취급하는 게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걱정하는 거야. 네가 어린 건 사실이잖아…….”
{……글로리아, 지금 통역 없이 토끼랑 대화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알아듣는 거야?? 진짜 신기하다.}
나비들이 불쑥 끼어들어 참견했지만 무시했다. 너희 말조심해. 이 토끼도 너희 말 다 엿들을 수 있다고.
“그래도 네가 가고 싶다면…… 그레이안과 나도 꼭 동행할 거야. 알았지? 꼭 엄마 아빠랑 같이 가는 거야. 자, 약속.”
새끼손가락을 거는 대신, 토끼 앞발을 잡고 두어 번 악수했다. 토끼의 검정콩알 같은 눈이 정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
그리하여 다음 날.
우리는 토끼 수인들의 은거지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은거지라는 곳이…….
“……여기서 마차 타고 한 시간 거리잖아?”
엄청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