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토끼 1+1
“그럼 이 금화들, 간수 잘 하십시오. 볼일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아르윈은 우리에게 금화를 던져주고 쿨하게 떠났다.
집무실 바닥에 발 디딜 곳도 없이 잔뜩 놓여 있는 궤짝들을, 그레이안과 나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정리할까요? 이 궤짝들…….”
“……예, 지하 금고에 가져다 두죠.”
그렇게 우리는 힘센 하인들을 동원해 수십의 궤짝들을 지하 금고에 가져다 두었다.
* * *
“뭐야? 웬 토끼가 있지?”
지나가던 사람이 에이프릴을 발견하고는 다가와 손을 뻗었다. 에이프릴은 앞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캬악거렸다.
토끼의 매서운 반응에 그 사람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넌지시 질문을 건네왔다.
“어…… 혹시 수인이신가요?”
“캬웅.”
알았으면 꺼지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알아듣지 못한 그 사람은 에이프릴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여긴 솔즈베리 공작 부인께서 운영하시는 보호 시설인데…… 아, 혹시 어제 입주하신 분인가요?”
에이프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이 시설에 입주한 것도 아니었다.
에이프릴은 그 사람을 무시하며 깡충깡충 뛰어갔다.
“잠깐만요! 그렇게 작은 몸으로 돌아다니다간……!”
그 사람은 오지랖 넓게도 자꾸만 참견하며 쫓아왔다.
신경질이 난 에이프릴은 잠시 멈춰 서서 그 사람을 향해 앞발을 휘둘러댔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당황한 듯 멈칫거렸다.
“……저는 이 시설에서 일하는 치료사입니다. 수인이 아니라 인간이지만요……. 제 이름은 프란시스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돕겠습니다. 뭐가 필요하신가요?”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 시설에서 일하는 치료사였나 보다.
휘두르던 앞발을 거둔 에이프릴이 눈을 가늘게 뜨고 프란시스라는 이름의 치료사를 노려보았다.
“끼우웅― 꺗.”
혼자 다닐 수 있으니 더 쫓아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치료사, 프란시스는 등을 돌려 달려가는 에이프릴을 또 쫓아왔다.
“캬아앙―!”
‘왜 자꾸 쫓아오는 거야!’
화난 에이프릴이 높이 도약해 프란시스를 향해 뒷발차기를 날렸다.
졸지에 토끼 앞발에 뺨을 얻어맞은 프란시스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달싹거렸다. 나, 나는…… 그냥 도와주려는 것뿐인데…….
“키아앙 캬웅!”
이쯤 되니 저 울음소리가 참견하지 말라는 뜻임을 프란시스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작은 토끼인데! 저러다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치에 치이거나 길을 잃을까 봐, 프란시스는 너무나도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다!
“꾸우웅…….”
토끼가 뭐라고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다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프란시스의 뇌리에 번쩍― 하고 어떤 생각이 스쳤다.
“자, 잠시만요! 혹시 토끼 수인을 찾고 계시나요?!”
어제 이 시설에 입주한 이들 중에 토끼 수인이 한 명 있다는 것은 프란시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토끼 수인이 눈앞의 이 토끼는 아니었다.
시설 입주자인 토끼 수인은 회색 롭이어 토끼였는데, 여기 이 사나운 토끼는 눈처럼 하얀 토끼였으니까.
“…….”
말없이 프란시스를 돌아본 하얀 토끼가 검정콩알 같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조그만 토끼인데도 내뿜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프란시스는 이 토끼에게 절대 무례하게 굴지 말자고 다짐했다. 잘은 몰라도 보통 토끼가 아니었다…….
“꺄웅, 끼우웅.”
깡충깡충, 프란시스에게 다가온 토끼가 앞발로 팔짱을 끼고는 그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를 가늠해 보기라도 하듯이.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별안간 토끼가 폴짝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토끼는 프란시스의 어깨 위에 착,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앞발로 프란시스의 뺨을 툭툭 치며 뭐라고 (아마도) 명령했다.
“꺄우웅, 꺗!”
“어…… 안내하라는 말씀이시죠……?”
“웅꺗.”
“그,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이 토끼, 사람을 한두 번 부려본 솜씨가 아니었다. 도대체 뭐 하는 토끼일까. 프란시스는 다소 혼란스러워하며 걸음을 옮겼다. 착실한 탈것이 된 채로…….
.
잠시 후, 토끼를 어깨에 태운 프란시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내비게이션처럼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하고 말했다.
토끼는 기특하다는 듯이 그의 머리를 앞발로 두드려 주고는, 앞발 하나를 앞으로 척 뻗으며 명령했다.
“꺄웅!”
틀림없이 ‘문을 열어라!’라는 뜻일 것이다. 어느새 토끼에게 익숙해진 프란시스가 얌전히 문을 열었다.
문 너머의 휴게실, 그곳의 창가에 앉아 책을 읽던 잿빛 머리의 소녀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소녀의 두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토끼……?”
“웅꺄앙!”
소녀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하얀 토끼가 큰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프란시스가 설명할 새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 소녀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 아니, 토끼님……!”
당황한 프란시스가 허둥지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천방지축 토끼 에이프릴은 드디어 동족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소녀의 머리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무릎으로 풀썩 내려와서는, 폴짝폴짝 뛰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잿빛 머리 소녀도 그제야 에이프릴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눈동자에 감격의 빛이 어렸다.
“토끼 수인…….”
“꺄아앙!”
“맙소사…….”
소녀가 에이프릴을 두 팔로 꼬오옥 끌어안았다. 에이프릴도 짧은 앞발로 소녀를 꼬옥 껴안았다.
두 토끼 수인은 그렇게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다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여기서 저 말고 다른 토끼 수인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정말 너무 반가워요……! 제 이름은 메이브예요. 당신은요?”
그러자 메이브의 무릎에서 폴짝 뛰어내린 토끼가 순식간에 사람 모습으로 변했다. 하얀 머리카락에, 분홍 눈을 지닌 아주 예쁜 소녀였다.
프란시스는 내심 감탄하는 한편,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처음부터 사람 모습을 했으면 좋았잖아!
“난 에이프릴이야. 말 편히 해!”
“그, 그래도 될까?”
“당연하지. 우리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에이프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프란시스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시골에서 약초를 뜯으며 살아왔던 그는 세상 물정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안하무인처럼 굴었던 하얀 토끼의 정체가 다름 아닌 솔즈베리 공녀라는 사실을 그가 알게 된 것은, 보다 한참 후의 일이었다.
.
“그게 사실이야……?”
확인을 구하는 에이프릴의 물음에 메이브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메이브를 보는 에이프릴의 눈빛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연약하게 떨렸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거였는데, 정말, 정말로…….
‘아버지가…… 나를 낳아주신 친부가 살아 계시다니…….’
그리고 다른 토끼 수인들도. 깊은 숲속에 자리한 은신처에 숨어 있으며, 그 수가 제법 많다고 한다.
기대감에 물든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에이프릴은 자신의 옷깃을 그러잡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다른 토끼 수인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 메이브, 나에게 길을 알려줄 수 있을까? 부탁할게……!”
“당연히 알려줄 수 있지. 그렇지만…… 그전에, 지금 네 보호자이신 분들에게 미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아…….”
깜박 잊고 있었다. 탄식처럼 외마디를 흘린 에이프릴이 메이브에게서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이 메이브와 여행을 떠나는 것을 과연 허락해 줄까? 자신을 지나치게 보호하려 드는 두 사람이라면……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
‘그렇지만…… 다른 토끼 수인들을 더 만나보고 싶어. 그리고 내 친부와도…….’
만나서…… 묻고 싶은 것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친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어.
에이프릴이 고개를 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의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는대도 상관없다. 그럼…… 몰래 떠나는 수밖에.
결심한 에이프릴이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난―.”
벌컥! 쾅!
누군가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세게 열었다. 이어서, 화난 듯하면서도 약간은 장난기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이프릴! 이 토끼 녀석! 또 멋대로 가출했지! 로드리에게 다 들었어―!” (#글로리아)
에이프릴은 입을 딱 벌린 채 뒤를 돌아보았다. 시선이 닿은 곳에―
잔뜩 심통이 난 표정의 글로리아가 위풍당당한 자세로 서 있었다.
* * *
에이프릴이 재빨리 토끼로 변신했다!
“꺄웅!”
폴짝 뛰어오르더니 회색 머리 소녀의 등 뒤로 숨으려 하는 토끼를, 나는 잽싸게 낚아채 품으로 당겨왔다.
토끼가 버둥거리며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눈빛을 발사했다. 뭐, 이 녀석아. 그러게 누가 호위 기사까지 따돌리고 몰래 가출하래?
“캬아앙!”
“어디서 성질을 부려, 요 녀석이!”
토끼가 앞발을 마구 휘둘렀지만 위력은 0이었다.
나는 토끼의 앞발을 잡고 악수하거나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볼을 만지작거리며 농락하다가, 토끼를 편한 자세로 고쳐 안은 뒤 보송보송한 배를 격하게 쓰다듬으며 타일렀다.
“어디 갈 때는 말하고 가야지! 이 반항 토끼야! 무슨 일 있으면 어떡하려고!”
“캬우웅……!”
“아우 귀여워, 성질부리는 것 좀 봐.”
둥기둥기, 나는 토끼를 아기처럼 안고 요람을 태워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토끼에게 마구 뽀뽀를 했다.
토끼는 입을 쩌억 벌린 채 앞니를 드러내고서 계속 화를 냈다.
“캬아앙!”
“에이프릴,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레이안도 엄청 걱정했어. 봐봐, 지금도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잖아.”
나는 휴게실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레이안에게 에이프릴을 넘겨주었다.
안정적으로 에이프릴을 받아안은 그레이안은 토끼의 머리와 몸통을 쓱쓱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에게 농락당해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게 분명한 토끼는 구겨진 삼각형 눈을 하고 나를 째려보았다.
“에이프릴…….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많이 걱정했단다. 별 탈 없이 무사해서 다행이로구나.”
그레이안의 다정한 말에, 토끼의 구겨진 눈이 사르르 풀렸다.
이내 그레이안을 올려다보는 토끼는 살짝 미안한 기색이었다. 나는 냉큼 끼어들어 말했다.
“로드리에게도 미안하다고 해. 네가 로드리를 따돌리고 사라지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았어! 엄청 자책하더라니까?”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소곤소곤 속삭였다.
토끼는 그제야 로드리 쪽으로 시선을 주더니, 작은 소리로 “끼웅…….” 하고 웅얼거렸다. 미안하다는 뜻인 것 같았다.
침울한 표정의 로드리가 푹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고, 토끼는 로드리에게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며 앞발을 붕붕 휘둘렀다. 다 네 업보란다, 토끼야.
“저, 저기…….”
그때였다. 근처에서 소심함 어린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로 시선을 옮기자, 회색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소녀가 시야로 들어왔다.
딱히 놀랄 것도 없었다. 나는 그 소녀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노예 경매에서 구출한 토끼 수인 소녀, 메이브. 어쩐지 그럴 것 같았지만, 벌써 에이프릴과 만났구나.
“두, 두 분은…… 소, 솔즈베리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이시죠……?”
“응, 그런데……?”
나는 대답하며 토끼를 흘끗 일별했다. 저 녀석, 자기 정체에 대해선 안 밝혔구만.
“그, 그럼, 에이프릴이……?”
“얘가 솔즈베리 공녀야.”
“허억…….”
눈을 휘둥그레 뜬 메이브가 탄식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그 순간 폴짝 도약한 에이프릴이 재빨리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고, 메이브에게 쪼르르 달려가 다급히 해명했다.
“메이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그냥 나를 친구라고 편히 생각해 줘! 응?”
“그, 그렇지만…… 공녀님이신데…….”
메이브는 연신 곤혹스러워하며 나와 그레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그레이안과 나는 잠시 시선을 교환했고, 그것으로 빠르게 뜻이 통했다.
내가 그레이안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가 앞으로 한걸음 나서며 온화하게 말했다.
“그래,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단다. 에이프릴은 그렇지 않아도 또래의 동성 친구가 필요했으니, 편하게 여겨 주렴.”
잇따라 그레이안 옆에 냉큼 붙은 내가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마침 너도 토끼 수인이고……. 둘이 잘 지내면 좋지.”
우리 둘을 보며 눈을 마구 깜박거리는 메이브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자신의 손을 꼬옥 잡은 에이프릴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동족 친구가 필요했던 것은 비단 에이프릴만이 아닐 테지. 메이브도 에이프릴만큼이나 외로웠을 것이다.
“……그럼…….”
메이브가 에이프릴의 손을 고쳐잡으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잘은 몰라도 에이프릴이 메이브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메이브의 얼굴에 감격이 어리더니―
“끼앙……!”
회색 롭이어 토끼로 변한 메이브가 에이프릴에게 꼬옥 안겨들었다. 그리고 잇따라, 에이프릴도 다시 토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회색 롭이어 토끼와 하얀 토끼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데굴데굴 구르거나 폴짝폴짝 뛰면서 기쁜 마음을 표출했다. 정말…….
‘토끼판이 따로 없군…….’
토끼가 1+1이면 이런 느낌이구나. 응, 좀 더 정신 사나워졌어. 귀엽긴 하지만.
.
극적인 토끼 상봉(?) 후에, 다시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에이프릴과 메이브는 어쩐지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휴게실 소파에 마주 보고 앉게 되었다.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에이프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응, 뭔데?”
내가 재촉하자 에이프릴은 마른침을 꼴칵 삼키고는, 자못 긴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다른 토끼 수인들을 만나러 가고 싶어요. 저를 낳아주신 친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계신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