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의적 아르윈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잘 키운 반려견처럼 맹목적으로 공작 부인을 따르는 저 모습!
“그레이안이야말로 바쁘지 않아요? 얼른 다시 일하러 가요.”
“한 시간 정도는…… 괜찮습니다……. 부인 곁에 좀 더 있고 싶은데…….”
그의 등 뒤로 축 처지는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마침 늑대는 갯과 동물이기도 하고.
“내가 없어서 외로웠어요?”
달래듯이 상냥하게 물으며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공작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공작은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는, 꿀처럼 진득한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예, 너무나…….”
……이쯤에서 테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하늘…… 하늘이나 보자. 오늘 하늘 참 파아랗다.
“아, 그러고 보니 손님들이 와 계신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자신과 칼윈 공작의 존재를 잊지 않았나 보다……. 테나는 머쓱한 미소를 입에 걸고 공작 부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이쪽을 보며 나란히 서 있었는데, 공작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예의 하얀 토끼가 폭 앉아 있었다.
마치 가족사진 같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테나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저 하얀 토끼의 정체를!
‘솔즈베리 공녀였잖아!’
솔즈베리 공녀는 그 희귀하다는 토끼 수인이었다! 공작 부인이 ‘엄마가…….’ 어쩌고 하기도 했었고……. 그렇구나. 저 토끼가 공녀였어…….
‘……되게 사나워 보였는데.’
테나가 멍하니 있는 사이, 칼윈 공작은 민첩하게 자리를 옮겨 공작 부부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눴다.
‘제 아들이 그동안 신세를…….’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러다 마침 “위즈벨 박사?” 하고 테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테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공작 부인이 그녀를 향해 이리 오라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응접실로 갈 거예요. 손님들을 세워둘 순 없죠. 자, 따라오세요.”
“아, 네…….”
그렇게 해서 테나와 칼윈 공작은 솔즈베리 공작성의 응접실로 안내받게 되었다.
.
응접실은 넓고 아늑했다. 비싸 보이는 스웨이드 소파에 앉자마자, 대기하던 시녀들이 카트를 끌고 들어와 다과를 차려주었다.
설마하니 공작가에서 이런 ‘귀한 손님 대접’을 받게 될 줄은 몰랐으므로, 테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금테가 둘러진 고급 찻잔은 자신의 한 달 생활비보다 비쌀 것 같았다.
‘이런 걸 실수로 깼다간…… 악몽을 꿀 게 분명해.’
손을 덜덜 떨면서 찻잔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말씀드리죠. 수인 200명을 데리고 앞으로 뭘 할 계획인지를…….”
맞은편의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음산하게 웃으며 작은 손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건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접힌 종이였다.
테나는 긴장한 채로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저게 뭐지? 설마 대 난투전 계획서? 그게 아니라면, 흑마법 실험 계획서?
“자, 보세요.”
그러나 공작 부인이 종이를 활짝 펴서 테이블에 내려놓은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 시야로 들어왔다.
“이, 이건…….”
평면도……?
“네, 평면도예요. 보시다시피.”
“……?”
평면도라니…… 이게 뭔데? 무슨 건물의 평면도인데? 테나가 망연히 눈을 깜박였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의 설명이 덤덤한 어조로 이어졌다.
“얼마 전 완공하고 내부 설비도 다 끝낸 보호 시설의 평면도예요. 여기 보시면 맨 아래쪽의 이게 1층이고, 부엌과 공용 식당, 목욕탕도 있죠. 그리고 또…….”
……보호 시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보호 시설이라고 했다. 말인즉…….
“……수인 노예들을, 이 보호 시설에 지내게 하실 계획인가요……?”
“네, 그래요.”
테나의 질문에 즉답한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방긋 웃었다.
테나는 그제야 그녀의 미소가 티 없이 깨끗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보호 시설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와 눈빛도, 투명하리만치 맑은 열의가 담겨 있었다.
“가장 중요한 건 치료실과 교육실이에요. 몸도 마음도 건강하게 해야 다시 사회로 나갔을 때…….”
테나는 열띤 설명을 이어나가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뭐가 이상하냐면, 아인스턴의 왕족으로 태어나 평생 지배 계층으로 살았을 그녀가, 약자의 입장에서, 그것도 이렇게나 구체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이상했다.
지금은 아니라고는 해도, 글로리아 아인스턴이라는 인간은 답 없는 개차반이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그 짧은 몇 개월 사이에, 사람이 이토록 바뀔 수가 있나?
‘믿을 수가 없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닌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좋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테나는 그녀의 극적인 변화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떤 추측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단 몇 개월 만에, 사람이 이렇게 근본부터 바뀐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 * *
테나 위즈벨과 칼윈 공작은 수인 200명이 보호 시설에 입주하는 것까지 다 보고는 솔즈베리 공작령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보호 시설에서 할 일을 모두 마친 뒤, 저녁 여덟 시가 되어서야 공작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으아아, 피곤해…….’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푹 담근 채, 과일을 먹으며 와인도 홀짝였다. 참고로 도수가 낮은 와인이었다. 글로리아의 몸은 술에 약해도 너무 약하니까…….
‘아……. 졸리다. 이대로 자고 싶어.’
이대로 잠들어도 누군가 나를 목욕물에서 건져주지 않을까? ……아니, 안 되지. 그러지 말고 제대로 잘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흐아아……. 너무 귀찮아……. 누가 나를 씻겨주고 입혀주고 재워줬으면…….’
그렇지만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하니까……. 나는 욕조에 누워 눈을 감은 채 ‘잠깐만 이러고 있자.’ 하고 생각했다. 정말로, 맹세코, 그대로 자려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눈을 떠 보니 시야로 들어온 건 어두컴컴한 천장이었고, 나는 내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이런 미친! 나 진짜 그대로 잠들었던 거야? 욕조에서?’
물에 빠져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매우 기막혀하며 몸을 뒤척이려던 나는, 내 갈비뼈 부근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하얀 털 뭉치를 보고는 멈칫했다.
‘……토끼잖아!’
이 토끼 녀석이 또 나를 인간 쿠션으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곤히 잠든 토끼를 깨울 순 없어서, 나는 얌전히 쿠션인 채로 고개만 돌려 옆을 살펴봤다.
내 옆에는 그레이안이 잠들어 있었다. 내 쪽을 향해 있는 새우잠 자세로 말이다.
‘왜 이렇게 불쌍한 모양새로 자는 거지…….’
나는 토끼가 깨지 않게 조심하며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까만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목욕물에서 건져내 준 이는 아마 그레이안일 거다. 그가 나를…… 마저 씻기고, 옷을 입히고, 머리도 말려 주고, 침대에 눕혀 줬겠지.
그 과정을 상상하자 왜인지 열이 올랐다. 지, 진정하자. 지금 내 위에는 토끼 어린이가 있어……!
“끼얏웅…….”
그때였다. 작은 몸을 뒤척이며 잠꼬대하던 토끼가 내 위에서 데굴, 굴러떨어졌다.
그 웃기는 모양새를 본 순간 웃음을 흘릴 뻔했다가, 애써 틀어막고는 토끼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 어깨 부근에 좀 더 안정적으로 내려놓았다.
고개를 살짝 비끼면, 토끼의 보송보송한 털이 뺨에 닿았다.
‘……힛.’
나는 토끼를 한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기분 좋게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데려온 수인들 중에 토끼 수인이 있었지. 내일 에이프릴과 함께 만나러 가야…….
.
번쩍―.
눈을 뜨자 밝은 햇빛이 시야로 들어왔다.
밝아도…… 너무 밝았다. 이건 아침 햇살이 아닌데.
‘며, 몇 시야.’
나 어제 그대로 기절잠 한 거냐고. 냉큼 이불을 걷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그레이안도, 토끼도 곁에 없었다. ……그래, 둘 다 아침 토끼와 아침 늑대였지. 나만 게으름뱅이 잠꾸러기고.
‘크아악.’
속으로 포효하며 침대에서 벗어나 시계를 찾자, 시침이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는 게 보였다.
12…… 12……? 12~?!
이런 미친! 얼마나 처잔 거야? 점심때가 되어서야 일어나다니!
‘내가 어제 진짜로 피곤했나 보다.’
천장에서 길게 내려와 있는 호출 줄을 잡아당기자, 잠시 후 쪽문이 열리더니 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푹 주무셨어요? 아침 식사를 내어오라 할까요?”
……아침은 무슨, 점심이겠지. 그러나 안나는 내가 민망할까 봐 일부러 아침 식사라고 하는 걸 테다.
나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간단히만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입맛도 없었다.
그리하여 간소한 식사를 마친 뒤, 양치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머리는…… 오늘따라 산발이라 안나가 깔끔하게 땋아 올려 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왔다. 일단 그레이안을 찾아가 어제는 고마웠다고 얘기하고, 토끼를 찾아서 함께 보호 시설에…….
‘……응?’
계단을 내려가는데 창문 너머로 아르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본채를 향해 유유히 걸어오는 중이었다.
이동 마법을 쓰지 않고 두 다리를 사용하다니, 별일이군. 나는 덤덤히 생각하며 그레이안이 있는 집무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도착해 보니…… 아르윈이 나보다 일찍 와 있었다.
뭐야, 걸음 완전 빨라! 역시 뱀 수인…… 아니, 용 수인이었지, 참.
“아, 공작 부인 오셨습니까? 여태 늦잠 주무셨다면서요?”
“부인, 어서 오십시오.”
아르윈과 그레이안이 나를 향해 거의 동시에 인사했다.
……내가 늦잠을 잤다는 정보는 어쩌다 아르윈의 귀에 들어간 거지? 그레이안이 시시콜콜 털어놨을 리는 없는데…… 범인은 공작성의 하인 중에 있나…….
“아르윈은 또 무슨 일로 왔어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아르윈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는 그의 반응을 모르는 체하며 그레이안의 옆에 풀썩 앉았다.
그런 내 손을 그레이안이 꼬옥 잡아왔다. 슬쩍 보니 또 꿀 떨어지는 눈빛을 하고 있다.
이 사람, 갈수록 나를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토끼도 그렇고……. 하아, 인기가 너무 많아서 탈이로군.
내심 건방 떨며 자화자찬하고 있자니, 그런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아르윈이 썩은 동태 눈깔을 했다.
뭐, 뭐요. 불만 있으면 말로 하든지!
“……제가 설마 여기까지 놀러 왔겠습니까? 저 바쁜 몸입니다.”
아르윈은 다소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고는, 허공에서 서른 개가 넘는 궤짝들을 소환해 냈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궤짝들은 분명…….
“공작 부인께서 어제 노예상에게 지불하신 금화들, 제가 도로 털어왔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아르윈을 쳐다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의적질을 할 줄은…….
“……어떻게 털어온 거예요? 마법으로?”
“뭐, 그렇죠.”
“이렇게 빨리 금화를 빼돌리면 그쪽에서 우릴 의심하지 않을까요?”
“증거도, 마력흔도 남기지 않았으니 우리라고 확신할 방도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뭐, 의심해 봤자…….”
아르윈이 비딱하게 웃었다. 어제 나에게 흑마법사 같습니다 어쩌고 했던 것치곤, 본인이 가장 흑마법사 같은 사악한 미소였다.
“뭘 어쩌겠습니까? 제까짓 것들이.”
와아……. 나는 손을 들어 짝짝 손뼉을 쳤다. 정말 대단하십니다요, 아르윈 님. 앞으로 당신을 홍길동의 후예 홍아르윈이라 부르겠어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돈 버는 노예상 위에 그 돈을 다 털어가는 아르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