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잠시 납치하겠습니다
‘오늘 경매에 참여한 것부터 영 수상하긴 했는데…….’
옛 버릇 못 고치고 또 수인 노예를 사들여 괴롭히려는 게 아닐까, 그리 추측했었다. 한 80% 정도는 말이다.
그런데 웬걸……?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저지른 일은……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200명이나 되는 수인을 전부 낙찰받다니.
‘도대체 수인 노예 200명으로 뭘 하려는 거지? 설마…….’
……그 200명이 서로 죽고 죽이는 대 난투전을 열 생각인 건가!
최근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며 돈에 미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다.
대 난투전의 티켓을 팔면 확실히…… 큰돈이 되긴 할 것이다.
수인 200명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칠 아인스턴인은 없을 테니까……. 물론 자신은 그런 비인도적인 경기 따위, 구역질 날 만큼 싫어하지만.
‘정말로 그럴 계획이라면 최악인데…….’
이 일을 솔즈베리 공작에게 어서 알려야 하지 않을까? 늑대들의 수장이자 엘로윈 왕국의 수호자인 그라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테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의심하면서도 한편으론 혼란스러웠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친 수인 성향으로 돌아선 게 아니었나? 엘로윈 왕국에서 평판이 좋다고 들었는데…….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수인을 위하는 사람이라면, 수인 노예 200명을 사들인 까닭은…….’
……아, 혹시?
추측일 뿐이지만, 어쩌면…….
‘……이러고 있지 말고,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만나러 가자. 만나서 직접 물어보는 거야.’
주먹을 불끈 쥔 테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그러나 재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라면, 본인을 직접 찾아가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
그러나 테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있는 무대 뒤 창고에 다다르자마자 뜻밖의 고난과 맞닥뜨렸다.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야……?!’
다름 아닌 칼윈 공작이 솔즈베리 공작 부인과 대화 중이었기 때문이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수인 노예 200명을 사들인 진상이 궁금하기는 했으나, 테나는 오늘 더는 칼윈 공작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테나는 그가 불편했다. 만사를 철저하게 계산하며 인생을 사는 것도 별로고 바람둥이인 것도 별로였다…….
원래 살다 보면 자신과는 영 안 맞는 사람을 만나기 마련이다. 테나에게 있어 칼윈 공작은 바로 그런 상대였다.
그렇기에 그와 마주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최대한 피해 왔으니, 오늘도…… 이만 물러가는 편이 좋으려나……?
그때였다. 고민하던 테나를 마침 칼윈 공작이 돌아보았다.
테나는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망설이던 짧은 순간에 기어코 그의 눈에 띄고야 만 것이다.
“어? 이게 누구야? 위즈벨 박사 아닌가!”
눈치 없는 칼윈 공작은 테나의 속도 모르고 반가워했다.
테나는 하는 수 없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그의 근처에 서 있는 두 인물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공작 부인의 하인이려니 싶었다.
“위즈벨 박사? 당신도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의 말에 테나는 멋쩍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정중히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테나의 인사를 받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대수롭지 않아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칼윈 공작과 테나를 번갈아 보며 약간 귀찮아하는 것처럼 제안했다.
“두 사람 다 같은 목적으로 나를 찾아온 것 같으니…… 자세한 이야기는 마차로 가서 나누도록 하죠.”
그렇게 해서 테나는 솔즈베리 공작가의 마차에서 잠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하필 칼윈 공작과 나란히 앉아야 하는 건 크나큰 굴욕이었다……. 앉을 자리가 그의 옆자리뿐이라 어쩔 수 없었지만…….
‘그나저나…….’
테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힐끔거리며 아까부터 계속 의아하던 점을 물어봐도 괜찮을지 갈등에 빠졌다.
그들이 떠나온 창고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분명 수인 노예 200명이 그곳에 갇혀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많던 수인 노예들은 다 어디로 간 거지……?’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아, 저기…….”
“―?”
결국 궁금한 마음이 소심함을 이겼다. 테나는 조금 머뭇거리면서도 솔즈베리 공작 부인에게 착실히 질문을 건넸다.
“그…… 아까 창고에 수인 노예들이 없던데, 다 어디로 간 건가요?”
“아, 그건.”
테나의 심장이 빠르게 쿵쿵 뛰었다. 방금 한 질문으로 솔즈베리 공작 부인의 심기를 거슬렀으면 어쩌지?
엘로윈 왕국의 사교 파티장에서 잠시 상면했던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권위적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였다. 그 모습이 다 연기였을지도…….
테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 감히 나서서 질문한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까?
그런 걱정과 두려움이 무색하게도,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일단 아르윈이 만든 아공간으로 전원 이동시켰어요.”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덤덤하게 대답하며, 심지어는 테나를 향해 방긋 웃어 주기까지 했다!
테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 테나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예사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아르윈이 안전한 공간이라고 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렇죠? 아르윈? 또 쓰레기장인 건 아니겠죠?”
“저를 대체 뭐로 보시는 겁니까? 제가 쓰레기장에 처넣는 건 그럴만한 놈들뿐입니다. 수인들을 옮겨놓은 아공간은 안전하다고요. 카펫도 깔려 있고 난롯불도 있다고요!”
“아, 그래요? 그럼 소파도 있겠죠? 침대는요? 다들 지쳤을 텐데 몸을 뉠 만한 가구쯤은 있겠죠?”
“소파는 적당히 두었지만, 침대는……. 그 정도로 넓진 않습니다. 제가 아무리 만능에 가까워도 마법에는 한계가…….”
“아니, 침대가 없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욧! 사람은 자고로 와식 생활이 가장 편하고 척추에도 좋고…….”
어쩌고…….
방언을 술술 쏟아내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을, 테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바라보았다.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지? 왜 둘이 갑자기 말다툼하는 거지? 아니, 그보다 하인 아니었어? 하인이 저렇게 건방져도 되나……? 게다가 아공간이라고?
‘설마 저 하인…… 마법사?’
테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그 하인을 쳐다보았다. 그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의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는 중이었다.
“애초에 말입니다, 이 계획 자체가 무리였다고요! 제 도움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사람 200명을 육로나 해로로 이동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십니까?”
“그럼 수인 200명이 노예로 팔려가게 생겼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어요? 아까 경매장에서 보니까 웬 변태 같은 놈도 있던데 그런 쓰레기들 손에 팔려가게 둘 거냐고요! 도와준 걸로 생색 좀 내지 마요! 어차피 뭐든 잘만 도와주면서 까칠하게 굴기는.”
“제가 언제 까칠하게 굴었다고 그러십니까? 저는 세계수에 맹세코 옳은 말만 했습니다만?”
“왜 세계수에 맹세해요? 그 세계수는 내 편인데? 그치 얘들아?”
유치하게 싸우는 두 사람은 고용주와 하인이라기보다는 친구 사이처럼 보였다.
곧이어 세계수의 나비들이 허공에 빛을 뿌리며 나타나 공작 부인의 주변을 맴돌았고, 아르윈이라는 이름의 하인은 비겁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테나는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았다.
흘긋 옆을 보니 칼윈 공작도 입을 헤 벌린 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이런 멍청한 얼굴은 실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튼! 수인들은 안전한 곳에 있으니 안심해요, 위즈벨 박사.”
“아, 네…….”
테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뭔가 다르다……. 이 사람, 글로리아 아인스턴 솔즈베리는 상상해 왔던 거랑 많이 달라…….
‘대체 정체가 뭘까……?’
자신도 모르게 그리 생각했다가, 테나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정체가 뭐긴. 아인스턴의 왕족이자 엘로윈의 귀부인이지.
물론, 상상했던 바와는 많이, 아주 많이 다르긴 하지만…….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테나와 칼윈 공작은 납치당했다.
다름 아닌 솔즈베리 공작 부인에게!
‘이 급전개는 대체 뭐야?!’
공작 부인은 가서 설명하겠다며 마차를 출발시켰다. 아니, 마차에서 대화하자며?!
더해서 테나는 하인인 줄로만 알았던 아르윈이라는 사람이, 사실은 솔즈베리 가문의 마법사이며 국경 요새의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친. 완전히 거물이었잖아!
게다가 뭐라더라, 블…… 블랙맘바?라고 하는 코브라과 독뱀 수인이라고 했다.
독뱀 수인이라니……! 어쩐지 독이 있는 느낌이었는데 진짜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테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계속 힐끔거렸다. 마법사에 독뱀 수인이라고 하니까 더욱 관심이 간다. 나중에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까……?
그렇게 테나의 설렘과 칼윈 공작의 체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마차는 목적지인 솔즈베리 공작성에 도착했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먼저 마차에서 내리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다 이동하느라 고생 많았어요! 자, 여기가 바로 솔즈베리 공작성―.”
“끼얏웅~!!”
그때였다. 갑자기 어디선가 발사된(?) 토끼가 그녀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었다.
바로 뒤이어 마차에서 내린 테나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웬 토끼가 공작 부인의 얼굴에 달라붙어 있어! 공작 부인의 얼굴이 안 보이잖아! 습격당했다고!
‘토, 토끼를 붙잡고 떨어트려야 하나?’
새하얗고 조막만 한 토끼였다. 그 크기 덕분에 공작 부인의 얼굴에 딱 알맞게 달라붙어 있는.
저러다 공작 부인이 호흡 곤란을 겪게 될 것만 같아, 테나는 두 손을 쥐락펴락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토끼가 공작 부인의 코와 입을 막고 있잖아……! 얼른 떼어내지 않으면!
“이 녀석, 에이프릴! 엄마가 그렇게 반가워?”
“꺄웅~!”
그러나 테나가 뭘 하기도 전에 능숙하게 토끼를 얼굴에서 떼어낸 공작 부인이 토끼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토끼를 품에 쏙 안은 채, 더없이 사랑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며……. 아니, 그 이상으로…… 완전히 팔불출이나 다름없어 뵈는 표정으로…….
“오늘 고작 몇 시간 못 본 거잖아. 근데도 엄마 많이 보고 싶었어?”
“꺄아웅―.”
“어휴, 우리 토끼는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라니까. 나중에 결혼 안 하고 엄마랑 평생 살 거라고 하면 어쩐담?”
“캬우웅!”
갑자기 폴짝 뛰어오른 토끼가 공작 부인의 어깨 부근에 찰싹 들러붙었다. 작고 하찮은 앞발로 그녀의 옷자락을 꼬오옥 쥐면서…….
‘……뭐지……? 대체 뭘까? 이건 무슨 상황일까?’
테나의 정신이 대기권을 뚫고 우주로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부인, 돌아오셨군요.”
어디선가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누군가의 묵직한 기척이 느껴졌다.
테나의 고개가 자연히 그리로 돌아갔다. 이내 시야로 들어온 사람은―
‘소, 솔즈베리 공작!’
테나는 그를 직접 보는 게 이번으로 세 번째였다.
아니, 네 번째인가? 여하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긴장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피식자가 포식자의 앞에 서면 느끼게 되는 긴장감……. 또는― 이성에게만 그런 것인지, 동성에게도 통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묘하게 매혹적인 끌림…….
그런, 말로는 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곤 했다.
“피곤하시지요? 안나에게 따뜻한 목욕물과 와인, 과일을 준비해 두라 이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안마를…….”
그러나, 공작 부인의 손을 꼬옥 잡고 다정히 말을 건네는 그의 모습은…… 단지 내조에 진심인 팔불출 남편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