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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08화 (108/144)

##  108화. 탕진해 보자고

글로리아 아인스턴은 도대체 무슨 목적인 것일까?

단순히 수인 노예를 구매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솔즈베리 성에서 노예를 부릴 순 없을 텐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칼윈 공작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무슨 계획인지 알아낸 게 있나?”

그에 테나 위즈벨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오, 그저 경매 참가자 목록에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있는 것만 확인했습니다.”

“흐음…….”

다시 생각에 잠긴 칼윈 공작이 비음을 흘리며 책상 위를 톡톡 두드렸다.

테나 위즈벨은 이 공간이 못내 불편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루벨라이트 칼윈 공작. 눈앞의 남자는, 테나가 활동하는 반-노예 제도 단체의 후원자였으므로.

그가 내는 후원금은 테나 개인에게 연구비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매달 일정한 금액이 들어오고 있었다.

테나는 그 돈이 연구비로 쓰인 것처럼 위조하면서 사실은 단체를 위한 기금으로 사용했다.

이 사실을 들켜도 칼윈 공작에게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었다. 테나가 독단으로 연구비를 빼돌린 것이라고 진술하면 되니까.

단체를 도와주는 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거기까지 계산하고 후원을 결정했을 칼윈 공작이 테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실 그 후원금이라는 게 많은 금액도 아니고…….

‘……뭐, 왕가에 들키지 않으려면 적은 돈을 주는 수밖엔 없을 테지만.’

칼윈 공작이 주는 돈 덕분에 테나는 단체에서 가장 많은 회비를 내고 있었다.

그가 단체를 후원한다는 것은 테나를 비롯한 극히 일부만 아는 사실이었기에, 대다수의 구성원들은 그 돈이 전부 테나의 사비인 줄로만 알았고 말이다.

“제이드에게 한번 물어봐야 하나…….”

오래 생각에 잠겨 있던 칼윈 공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제이드라는 소년은 칼윈 공작의 친자로, 무려 17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정작 본처인 공작 부인은 따로 있으니, 엄밀히 말해 그 소년은 사생아인 셈이다.

그럼에도 머리가 좋고 능력이 뛰어나 칼윈 공작이 꽤나 아낀다고 들었다.

뜻밖인 점은 그 소년이 얼마 전까지 솔즈베리 공작성에서 지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무려 신분을 감춘 채, 기사로서 말이다.

그 일은 칼윈 공작이 주변 사람들을 입단속 시킨 게 무색하게도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그렇기에 테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에 관해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칼윈 공작과 그런 사담을 나눌 사이는 전혀 아니었으므로.

“뭐……. 오늘 경매장에 직접 가보면 알게 되겠지. 글로리아 왕녀…… 아니,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무슨 목적인지는.”

드디어 그리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테나는 마침내 이 불편한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에 내심 기뻐하며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허공에 머물러 있던 칼윈 공작의 시선이 테나에게로 스윽 옮겨 왔다.

테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소식을 전해 주어 고맙네. 살펴 가게나.”

“예, 각하.”

꾸벅 묵례한 테나가 공작의 집무실을 후다닥 빠져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그나마 숨통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크게 한숨을 내쉰 테나는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잠시 뒤 열릴 경매에, 그녀 역시 몰래 참석할 생각이었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과연 경매에서 무슨 일을 벌일지…… 자신도 몹시 궁금했으니까.

* * *

‘미친……. 사람 진짜 많네.’

지금…… 내 안의 인류애가 훅훅 깎여 나가는 중이다.

노예 경매에 참가하는 사람이 꽤 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하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 사람들이 전부 수인 노예를 사러 온 거란 말이지…….’

혹은 재미있어 보여서 구경 왔거나. 아니면 반-노예 제도 단체원들처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잠입한 사람들도 몇 명 있기야 하겠지. 나도 그중에 하나고.

그러나 대부분은…… 이 많은 인원의 9할은 정말로 수인 노예를 원해서 참가한 사람들일 거였다.

‘역겹다, 진짜…….’

나는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들을 흘겨보며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후드를 푹 눌러쓰고 있으니 티는 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들키더라도 ‘하긴, 글로리아 공주는 성격이 나쁘니까…….’라고들 생각하겠지.

‘마음 같아서는 깽판 치고 다 엎어버리고 싶은데…….’

애석하게도, 아인스턴 왕국에서 노예 제도는 불법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깽판 치면 국제 문제가 된다……. 그러니 무력으로 말고, 돈으로 혼내주는 수밖에.

‘사실 내가 앞으로 할 일은 아인스턴 왕국에 상당히 모욕적인 일이 될 거야.’

아인스턴 왕국의 과반수가 찬성하는 노예 제도를 이용해 수인들을 구출하고, 그들을 자유민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수인 노예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겨온 이들에게 일종의 도발처럼 느껴질 터였다.

하지만, 상관없다. 얼마든지 도발당하라지. 이건 다 그러라고 벌이는 짓이니까.

“……하…….”

별안간 옆에서 들려온 분노 어린 한숨 소리에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한숨 소리의 주인은 내 호위 겸 마법사 겸 하인(위장)으로 참석한 아르윈이었다.

그 역시 이 많은 사람을 보고 인류애를 상실한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화를 못 참고 깽판 치면 곤란한데.

‘이따 경매를 직접 보게 되면 더 화날 텐데…….’

아무래도 아르윈에게 신신당부를 해두는 편이 좋을 듯하다. 사실 아까 마차에서 이미 했지만. 다시 한번 더.

나는 아르윈에게 바짝 붙어 그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르윈, 진정하고 참아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고 칠 일은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그럽니다.”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윈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런 나를 아르윈은 어쩐지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또 한숨을 푹 쉬었다.

.

아르윈과 나는 배정된 자리에 착석했다. 경매장은 마치 극장과 같은 형태로 몹시 어두웠으며 정면의 무대 중앙만 밝은 조명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주변을 살폈던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에반젤린은 오늘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아마 근신 중이라서 그런 거겠지.’

사고 치고 근신 중인데 노예 경매에 참가했다간 완전히 부왕의 눈 밖에 날 것이었다.

에반젤린은 부왕에게 내심 적대적이지만, 그 사실을 겉으로 내비치진 않았다.

부왕 앞에선 성질을 죽이고 늘 고분고분한 에반젤린이니 오늘도 그의 명령대로 얌전히 궁에 갇혀 있는 걸 테지.

‘에반젤린이라면 필시 이번 경매를 손꼽아 기다렸을 텐데.’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 경매에서 내가 수인 노예들을 싹 쓸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또 얼마나 분기탱천하려나?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시작하려나 봅니다.”

옆에 앉은 아르윈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단 하나의 조명만이 비추고 있는 단상 위에 사회자가 올라서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큰 목소리로 유쾌하게 외친 사회자가 객석을 향해 한 팔을 들어 올리며 연극적으로 인사했다.

경매 참가자들은 그를 향해 짝짝 갈채를 보냈다.

다수 성의 없게 느껴지는 박수 소리에도 사회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오늘은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대규모 경매로, 무려 수인 노예 200명이 경매에 나오게 됩니다!”

몇몇 사람들이 짧게 환호하자, 사회자는 “하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대강 응대하고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상품’의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최하급부터 시작해서 최상급까지 빠르게 진행하고자 합니다. 상품 번호 1번부터 150번까지는 3초 안에 상위 입찰하지 않으실 경우, 최고가 입찰하신 분께 상품이 낙찰됩니다!”

객석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보통 10초를 부르는데, 5초도 아니고 3초라니……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참가자들은 그야말로 물 쓰듯이 돈을 쓰게 되겠군.

반면 최상급 ‘상품’이 나올 때까지 신중하게 기다리는 참가자들도 있으리라. 그래봤자 내가 다 낚아채갈 거지만.

“자…… 그럼, 사상 최초! 대규모 수인 노예 경매!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파앗―!

사회자가 우렁차게 소리침과 동시에 무대의 조명이 하나 더 켜졌다.

원래 있던 하나의 조명은 옆으로 이동한 사회자를 비추었고, 그보다 더 밝은 새로운 조명이 무대 중앙을 내리비췄다.

곧이어 무대 뒤편의 자주색 커튼이 걷히며, 구속구를 찬 수인 노예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꾀죄죄한 모습의 수인 노예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얼룩덜룩한 옷을 입고,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었다.

대충 자른 듯한 머리칼은 산발이었다.

머리와 눈 색은 평범하게 갈색이었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으로는 어떤 수인인지, 아니, 수인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보였다.

이 객석에 앉아 있는 많은 이들처럼.

“하하, 다들 조용하시군요? 압니다, 알아요. 실망하셨지요? 이렇게 평범한 상품이라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놈은 최하급이니까요. 그래서 맨 처음 순서죠!”

왠지 내 옆의 아르윈이 이를 악물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그러자 대번 움찔한 아르윈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담황색 두 눈에 황당한 기색이 점점 떠오른다.

“……뭐 하시는 겁니까……?”

아르윈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그의 기분을 헤아려 인자하게 고개를 주억이며 달래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화나겠지만 꾹 참아요. 어차피 우리가 다 구할 거잖아요.”

“…….”

아르윈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 내 손을 거칠게 뿌리치더니, 기가 차다는 듯이 탄식을 뱉고는,

“……!”

갑자기 내게로 거리를 확 좁혀 오며 속삭였다.

“외간 남자 손 그렇게 막 잡지 마십시오. 공작 각하께 이를 겁니다.”

미, 미친……!

놀란 내가 파드득거리자 아르윈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내게서 멀어졌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그의 성격 나쁜 얼굴을 매섭게 노려봐 주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을 입에 올렸다.

“그런데 아르윈, 여자 아니었어요……?”

“……제 정체성은 남성에 가깝습니다. 제가 그렇다면 그런 겁니다. 참고로 지금은 남성체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용족은 성별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죠?”

“경매에나 집중하십시오.”

까칠하기는. 나는 아르윈을 한번 째려봐 준 후 다시 무대로 시선을 옮겼다. 마침 사회자가 경매를 막 시작하려는 순서였다.

“자, 그럼, 1번 상품에 입찰하실 분! 계십니까?!”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이게 TV로 송출되는 예능 프로그램이었으면 ‘썰렁~’이나 ‘조용―’ 같은 자막이 지나갔을 거다.

사람에게 값어치나 매기는 한심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쯧, 혀를 찬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턱을 치켜세우고서, 거만한 표정으로.

물론 아직 후드를 뒤집어쓴 채다. 즉, 나를 알아본 사람은 없다는 얘기.

마침 나를 발견한 사회자가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오오! 입찰자가 나타났군요! 과연, 얼마를 부르실―.”

“100만 골드.”

“……예?”

“100만 골드라고. 귀 막혔어?”

사회자의 눈꺼풀이 지진을 일으켰다. 아, 그래. 놀라셨겠지. 끽해야 5~10만 골드쯤 예상했을 테니…….

그러나 난 앞으로도 전부 100만 골드부터 부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상위 입찰가가 얼마가 되든, 200명의 노예를 전원 구출하고 말 것이다.

내가 부를 수 있는 최고가로 시작하는 것, 그것만이…… 이따위 경매장에서 인권을 잃고 값이 매겨지고 있는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이었다.

‘당신들의 존재는 절대 값싸지 않아. 사실 100만도 한참 부족하지. 감히 누가, 어떻게, 생명에 값을 매길 수 있겠어?’

이날을 위해 힘들게 벌어 모은 돈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생명과 인권에 비하면 하등 가치가 없지. 그러니까…….

‘자, 탕진해 보자고.’

“3, 2, 1……. 더 입찰하실 분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배, 백만 골드로 낙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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