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한 차례의 이별 후에
“어쩐지…….”
긴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여기저기 떠돌며 길거리에서 마구 익힌 검술은 아니었지. 네 검술은.”
“……그랬나요?”
“그래, 정석으로 교육받은 티가 나더구나.”
그레이안의 말에 제이드가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모두가 경악해 있는 와중, 로드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눈빛을 하더니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제이드의 검술을 떠올려보며 스스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한편 에이프릴은 여태 아무런 반응도 없이 멍한 얼굴이었다. 제이드의 정체가 몹시 뜻밖이었나 보다.
그런 에이프릴을 연신 힐끗거리며, 제이드는 착잡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나쁜 의도로 숨기려 한 건 아니었어요. 그저…… 더 편안한 존재로 다가가고 싶어서…….”
제이드를 응시하던 에이프릴의 눈동자가 그제야 또렷해졌다.
늘 자신만만하던 태도는 어디로 가고, 시선을 내리깔며 고개를 푹 숙인 제이드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런 제이드의 곁으로 에이프릴은 슬그머니 다가가더니, 천천히 손을 뻗었다.
“……!”
에이프릴이 자신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토닥여 주자,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린 제이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년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놀라긴 했지만…… 제이드가 싫어진 건 아니에요…….”
“에이프릴…….”
“그렇지만, 좀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미안해요, 좀 더 일찍 말하지 못해서.”
침울하게 눈을 내리 까는 제이드를 향해 에이프릴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밝게 자아낸 목소리로 말하길,
“앞으로 세상 어디에 있든,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다시 만나든, 제이드는 언제까지고 제 친구일 거예요.”
“……친구…….”
“네! 우리, 친구 맞죠?”
참으로 에이프릴다운 착각이었다. 뭐, 둘이 친구 사이가 맞긴 하지. 제이드가 에이프릴에게 연애 감정이 있다는 게 문제이지만…….
‘에이프릴의 감정은 우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고.’
내 예상대로 조금 씁쓸한 기색이 제이드의 얼굴 위로 스쳤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로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닐 테고, 그런 척하는 것뿐일 테지만.
“네, 우린 친구죠.”
조금 늦게 돌아온 제이드의 대답에 에이프릴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제이드와 친구여서,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이.
.
그렇게 정체를 폭로한 제이드는 솔즈베리 성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이곳을 떠나게 됐다.
제이드가 칼윈 공작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가장 발칵 뒤집힌 곳은 역시나 기사단이었다.
그동안 제이드와 허물없이 지내온 기사들은 여러모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제이드에게 속은 것을 불쾌하게 여기는 이들도 있는 모양이고.
하지만 제이드는 남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 듯했다. 제이드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한 사람, 에이프릴뿐이었다.
“그럼 잘 있어요, 에이프릴.”
“제이드…….”
에이프릴과 악수를 나눈 제이드는 손을 바로 놓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잠시라도 더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에이프릴, 사실은…….”
“……?”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은 제이드가 에이프릴에게 고백하려던 것이 분명했다. 결국 불발로 그쳐 버렸지만.
제이드는 에이프릴을 향해 태연하게 웃어 보이더니, 이내 손을 놓고 천천히 멀어졌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칼윈 공작가에서 보낸 마차에 올랐다.
“이랴!”
마부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제이드가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 뒤를 돌아보는 일 따윈 없었다.
곧 마차가 솔즈베리 성 정문을 통과했고, 에이프릴은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렇게 제이드는 솔즈베리를 떠났다.
.
“많이 섭섭하니?”
“……글쎄요…….”
제이드를 떠나보낸 후, 에이프릴과 함께 거실에서 다과를 즐기며 대화를 나누었다.
에이프릴은 따뜻한 초콜릿을 조용히 홀짝이더니 말을 이었다.
“영영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이드와는 언제까지고 좋은 친구 사이일 테니까요.”
“으응, 그래…….”
제이드 녀석이 저 얘기를 들었더라면 속으로 또 눈물을 흘렸겠구만.
나는 제이드의 짝사랑에 묵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짝사랑의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 * *
제이드가 떠난 후 에이프릴은 다소 침울해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잘 지내는 듯이 보였다.
제이드는 칼윈 공작가로 돌아가자마자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에이프릴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제이드의 편지를 받고 에이프릴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리고 나도…… 지금 편지를 읽는 중인데, 당연히 제이드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4월 13일, 아인스턴에서 열리는 대규모 노예 경매에 단체원들이 잠입할 예정입니다.]
다름 아닌 반-노예 제도 단체에서 그레이안 앞으로 보내온 서신이었다.
그들은 이번 노예 경매에 참여해 최대한 많은 수인 노예를 구출해 올 작정인 듯했다. 그러기 위해 여태 자금을 모아왔다나.
‘하지만 그 자금을 쓸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싱긋 웃으며 옆에 꺼내두었던 궤짝을 열었다. 그러자 눈부시게 반짝이는 커다란 금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금화들은 에이프릴의 손바닥만큼이나 큰 데다 중량도 상당했다. 그리고 세계수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히페리온 금화.’
또는 대륙 공용 금화, 평화의 날 기념 금화……. 이 금화들은 그렇게 불리었다.
나는 금화 한 개를 꺼내 빛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매끄러운 표면이 반짝반짝 윤을 냈다.
오래전, 그러니까 아인스턴 왕가가 아직 멀쩡하던 시기에, 엘로윈과의 평화를 기념하며 이 금화는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인스턴 왕가가 폐단을 행하기 시작하면서 이 금화의 의미도 퇴색되었다. 물론 특별한 금화이기에 그 가치는 여전히 높지만.
‘게다가 세상에 얼마 없기도 하고.’
이 금화를 찾아서 모으느라 그동안 고생 좀 했다. 한꺼번에 다 쓰기엔 아까우니까, 이중 일부만 사용할 거다. 모자란 자금은, 대신에…….
나는 내 오른편에 놔둔 다른 궤짝도 열었다. 그 안에는 아인스턴 왕가에서 발행하는 금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이걸 쓰면 되지.’
히페리온 금화만큼은 아니지만 아인스턴 왕가의 금화도 가치가 높다.
금화를 세는 단위는 ‘골드’.
일반 금화 1000개를 1000골드라고 한다.
히페리온 금화 1개와 교환하기 위해선 일반 금화 1000개가 필요하고, 아인스턴 왕가의 금화 1개를 교환하기 위해선 일반 금화 500개가 필요하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히페리온 금화 1개 = 일반 금화 1000개 = 1000골드
아인스턴 왕가의 금화 1개 = 일반 금화 500개 = 500골드
참고로 일반 금화의 크기는 굉장히 작다. 대한민국의 10원 동전 크기라고 보면 된다.
그밖에 은화와 동화도 있지만, 에이프릴과 몰래 시장에 가서 군것질할 때가 아니면 쓸 일이 별로 없다.
물론 부자도 아니고, 작위 귀족도 아닌 보통의 사람들은 금화보다는 은화와 동화를 주로 사용한다.
뭐랄까, 빈부격차……? 부익부 빈익빈? 마치 서울과 지방 집값의 차이. 어느 세상이나 다 똑같다니까.
‘그래도 엘로윈의 민중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지.’
엘로윈에서는 귀족이 아닌 평민도 ‘왕’이 될 수 있다. 적법한 절차를 밟아 후보 자격에 오르고, 왕으로 선출되기만 한다면.
사실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현실적인 문제로…….) 어찌 되었든 엘로윈은 아인스턴과는 다르게 평민들의 의사가 정치에 적극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회 복지 체계도 잘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덕분에 엘로윈의 민중들은 매끼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하고 자신의 집을 장만할 만큼의 금화는 벌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싶지만…… 아인스턴에서는 그조차 어려운 형편인 사람들이 많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엘로윈이 아인스턴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 아니야……?’
그런데 대다수의 아인스턴인들이 엘로윈과 비교해 자신들의 삶이 훨씬 낫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지.
왜냐면, 엘로윈인들은 언제든 노예로 전락할 수 있는 미천한 ‘수인’이고, 자신들은 그보다 고결한 ‘인간’이니까.
‘그렇지만 사실…… 아인스턴의 일반 국민들은…….’
오히려 수인 혐오를 반대하거나…… 실은 혐오하지 않는데 귀족들에게 선동당한 것은 아닐까?
아인스턴의 일부 귀족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수인 혐오 정서를 퍼뜨렸다는 것,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 아인스턴 국민들의 삶은 척박하지만, 그보다 못한 존재인 수인 노예들을 보면서 ‘그래도 우린 저 사람들보다는 낫지.’ 하며 위안을 얻도록…….
그렇게 해서 빈곤한 삶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지 못하도록. 아인스턴 왕가와 귀족들은 민중들을 통제한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해 보면 노예 족쇄를 차고 있는 건 수인 노예들뿐만이 아닌 거지.’
나는 반-노예 제도 단체에 대해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눈을 가려온 거짓을 걷어내고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던 건지도 모른다.
.
시간이 흘러, 어느덧 4월 13일. 아인스턴에서 대규모 노예 경매가 열리는 날이 되었다.
장소는 당연히 아인스턴의 수도 웨일스이다.
웨일스에는 아인스턴의 부유층이 몰려 있고, 노예상은 바로 그들의 돈을 노리는 것이니까.
웨일스로 향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마차가 세워진 정원으로 나왔다.
오늘의 동행인은 다름 아닌 아르윈이다. 당일 바로 웨일스로 가야 하기에 그의 이동 마법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꼭 흑마법사처럼 입으셨군요.”
“…….”
아르윈이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내 몰골을 훑어보고는 말했다.
오늘 나는 최대한 사악해 보이도록 차려입었는데, 드레스는 붉은색 벨벳에 피처럼 새빨간 루비가 박힌 것이었고, 그 위에 입은 망토는 새까만 벨벳에 은으로 만든 해골 모양 브로치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그 차림새에 이런 지팡이 하나 들어주면 아주 딱일 것 같습니다.”
허공에 웬 지팡이를 소환해낸 아르윈이 그것을 내 손에 들려주었다.
지팡이는 스태프 종류의 기다란 것이었는데, 맨 위 끝에 내 망토의 브로치처럼 은빛 해골이 장식되어 있었다.
‘내가 무슨 네크로맨서도 아니고.’
어이 없어진 나는 지팡이를 아르윈 보란 듯이 팽개쳐 버릴까 하다가, 어떻게 보면 또 괜찮은 생각인 듯해 멈칫했다.
흑마법사처럼 사악해 보이는 거…… 나름 좋은 거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나는 흠, 비음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리고 마차에 올랐다.
그런 나를 향해 아르윈의 황당함 어린 시선이 꽂혀 왔다. 나는 그를 무시하며 어떻게 하면 더 사악해 보일 수 있을지를 고심했다.
흐음, 이렇게 앉아서 지팡이의 해골 부분을 쓰다듬고 있으면…….
“진짜 흑마법사 같습니다.”
“아, 네.”
건성으로 대꾸한 나는 얼른 출발이나 하라며 아르윈을 재촉했다.
그러자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아르윈이 곧이어 이동 마법을 사용했고, 마차는 솔즈베리 공작성을 벗어나 예의 국경 요새에 도착했다.
이제 여기서부터 마차를 타고 국경을 넘은 뒤, 다시 웨일스 근교로 이동 마법을 쓰고…… 웨일스의 성문을 통과하는 절차를 밟고…… 그러면 도착이다. 하이고, 복잡해라.
* * *
“……누가 온다고?”
칼윈 공작은 테나 위즈벨 박사가 막 전한 이야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잠시 뒤 열릴 대규모 노예 경매에―
“글로리아 아인스턴,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참석하신다고 합니다…….”
테나가 재차 부연하자 칼윈 공작이 허어, 하고 허탈한 탄식을 흘렸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이번 대규모 노예 경매에 참여한다니…….
‘친 수인 성향으로 돌아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전히 수인 혐오자였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