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화. 꽃으로 가득한 하루
“공작 부인은 돈을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아르윈이 툭 던진 말에 나는 왠지 뜨끔해서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내 안의……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을 들킨 것만 같군! 하지만 내가 번 돈은 다 유익한 곳에 쓸 거다. 하늘에 맹세코 진짜임.
“아르윈, 혹시 사회적 환원이란 말 알아요?”
“공작 부인께서 사업으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 이 말입니까?”
“네, 그래요!”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들어 올려 보였다.
그런 나를 아르윈은 조금 흘기듯 보더니 성의 없이 턱을 까닥거렸다. 아니, 이봐요? 내가 빈말하는 것 같나요?
“보면 볼수록 공작 부인은 참 특이하신 분 같습니다.”
“그…… 그런가요?”
“예, 보통 사람이라면 생각하지 않을 개념을 툭 뱉으신다고나 할까…….”
아하하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방심한 사이에 아르윈에게 간파당하고 있었군…….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다. 빙의자라는 사실은 계속 숨겨야 하니까.
“뭐, 아무튼…… 나쁜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다음 사업 종목은 뭘 생각하고 계십니까?”
“음, 그게 말이죠…….”
나는 내 계획을 아르윈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는 “나쁘지 않네요.” 하고 짧게 평가하더니, 몇 가지 조언을 더해 주었다.
그렇게 아르윈과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 나는 정원으로 나가 가볍게 산책하기로 했다.
요즘은 날씨가 제법 따뜻해져서 산책할 맛이 났다.
추울 때와는 다르게 가벼운 옷을 입고 걸으니 기분도 들뜨는 것 같고……. 무엇보다 꽃이 피기 시작해서 눈이 즐거웠다.
나는 내 옆을 걷는 안나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디아만트 시에서 봄맞이 축제가 열린다고 했던가?”
“네, 내일부터 사흘간요. 도시 곳곳을 꽃으로 장식하고, 생화나 조화로 만든 공예품을 노점에서 판매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꽃차나 꽃 샐러드 같은 음식을 맛볼 수도 있어요.”
“호오…….”
꽤 즐거운 축제일 것 같아서 흥미가 생겼다.
애들 데리고 한번 가볼까? 그레이안도 함께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요새 워낙 바빠 보여서 말이지.
‘한번 물어보기는 해야지.’
나는 정원에 핀 꽃을 몇 송이 꺾어 안나와 함께 화병에 꽂았다.
내 꽃꽂이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안나의 실력은 훌륭한 덕분에 다행히 그럴듯한 모양새로 완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꾸민 화병을 들고서 나는 들뜬 걸음으로 그레이안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레이안이 기뻐해 줬으면 좋겠다. 감동한 그의 얼굴을 상상하자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샜다.
그레이안은 꽃을 한아름 들고 온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얼른 건네받으려 했다.
나는 괜찮다며 웃고서 화병을 창가 옆 콘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알록달록하고 풍성한 꽃들 덕분에 집무실 분위기가 확 살아났고, 나는 뿌듯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때요? 집무실이 평소보다 산뜻해졌죠?”
“부인…….”
내 예상대로 그레이안은 감동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그를 마주 안아 줄 따름이었다. 이럴 때면, 커다란 대형견이 냅다 안겨 오는 것 같다니까.
“내일부터 디아만트 시에서 봄맞이 축제가 열린다던데, 함께 구경하러 가는 게 어때요? 바쁘면 거절해도 괜찮고요.”
“거절이라니요,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꼭 함께 가겠습니다.”
내 제안에 그레이안은 흔쾌히 승낙했고, 나는 마침 휴식 시간인 그와 함께 차를 마시며 내일 무엇을 하고 놀 것인지를 즐겁게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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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다음 날.
나는 그레이안, 에이프릴, 그리고 로드리, 제이드와 함께 디아만트 시로 향했다.
디아만트 시에 도착해 보니, 거리는 평소보다 많은 인파로 붐볐고 생화 또는 조화 장식이 건물과 가로등, 가로수를 가득 꾸미고 있었다.
‘그야말로 꽃의 도시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특별 메뉴인 꽃차를 판매하는 작은 티룸을 발견했다. 나는 일행을 이끌고 후다닥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와 보니 이미 우리 말고도 많은 손님이 있었다.
앉을 자리를 물색하는데, 직원인지 주인인지 모를 여인이 바 테이블 너머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우리를 보고는 “어서 오세…….”까지만 말하더니, 곧이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달싹거렸다.
“소, 솔즈베리 공작 각하……?!”
역시 그레이안은 이 근방에서 특히 유명인이라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열 번도 넘게 인사를 받았더랬다. 다음부턴 변장을 하고 나와야 할까 봐.
가게 주인을 비롯한 손님들이 호들갑을 떨며 우리에게 인사해 오는 해프닝이 잠시 있긴 했지만, 어찌 됐든 우리는 평화롭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내 옆자리에서는 웬일로 사람 모습을 한 에이프릴이 진지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살피는 중이었다.
나는 먼저 고르지 않고 에이프릴이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
다른 사람의 선택에 영향받지 말고 에이프릴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골랐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에이프릴이 뭘 고를지 궁금하기도 했고.
그런데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그레이안은 물론이고 로드리와 제이드도 메뉴를 고르지 않은 채 에이프릴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라 하마터면 흘러나올 뻔한 웃음을 애써 삼키는데, 드디어 에이프릴이 결정을 내렸다.
“전 이거요. 제비꽃차…….”
어쩐지 에이프릴다운 선택이었다. 에이프릴은 제비꽃과도, 제비꽃 향기와도 잘 어울리니까.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며 차근히 물었다.
“그럼,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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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드는 에이프릴과 같은 제비꽃차. 결정에서부터 사심이 보인다.
음흉한 놈. 그렇지만 계속 보니 좀 귀여운 것 같기도……. 내가 그새 제이드에게 미운 정이 들었나……?
그리고 로드리는 꽃차가 아닌 레몬그라스 허브티를 선택했다.
누가 고양이 아니랄까 봐 풀을 좋아하는군. 적호 모습으로 변한 로드리 앞에 캣그라스를 놓아두고 반응이 오는지 실험해 보고 싶다. 나중에 꼭 해 봐야지.
마지막으로 나는 장미꽃차, 그레이안도 장미꽃차였다. 제이드처럼 그레이안도 나를 따라했다.
이 따라쟁이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그레이안이 그러니까 아주 귀여워 보인다. 이런 게 바로 콩깍지……?
여하튼, 주문하고서 30분쯤 기다리자 차가 서빙되어 왔다.
제비꽃차와 장미꽃차는 2인용의 투명한 티포트에 각각 담겨 있었고, 레몬그라스 차를 담은 것은 1인용의 작은 티포트였다.
티포트가 투명해서인지 꽃의 모양이 고스란히 보여서 무척 예뻤다. 마치 하바리움을 보는 것 같다.
제비꽃차는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을 닮은 색이었고, 장미꽃차는 옅은 노랑에 연홍빛을 띤 색이었다.
같이 서빙되어 온 유리 찻잔에 차를 따라보니 향이 아주 좋았다. 한 모금 가만히 음미하자 행복한 만족감이 가득 차올랐다. 음, 역시 오길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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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족스러운 티타임을 가진 후, 다시 밖으로 나와 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꽃잎이 흩날리는 거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마치 천국에 와 있는 것처럼.
“엄마!”
로드리, 제이드와 함께 노점을 구경하던 에이프릴이 나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왔다. 귀여운 녀석. 사람일 때 달리는 모습도 토끼 같다.
요즈음 에이프릴은 나를 어머니, 또는 엄마라고 불렀는데, 정 없이 ‘공작 부인’이라고 부르던 때보다 훨씬 듣기 좋았다.
나는 깜찍하고 사랑스러운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에이프릴은 눈을 살짝 내리깔며 쑥스러운 듯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이거…….”
“응?”
“서, 선물이에요.”
에이프릴이 선물이랍시고 내민 것은 다름 아닌 화환이었다.
싱그러운 생화를 엮어 만든 거였는데, 여린 꽃잎의 감촉이 보드라웠으며 좋은 향기가 났다.
“나 주려고 산 거야?”
웃으며 묻자 에이프릴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악……! 너무 귀여워!
나는 손에 들린 꽃목걸이가 망가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에이프릴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사랑을 듬뿍 담아 말했다.
“고마워, 우리 딸.”
“그, 그거, 얼른 걸어 보세요…….”
부끄러움을 타는 걸까? 에이프릴은 버벅거리며 말을 돌렸다. 실실 웃음을 흘린 나는 에이프릴이 하라는 대로 화환을 목에 걸어 보았다.
그리고 씩 웃으며 ‘어때?’ 하고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
등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무언가를 툭 올렸다.
당황한 나는 뒤를 돌아보며 손으로 머리를 더듬었다. 보드라운 꽃잎이 만져졌다. 화관인 것 같았다.
내 머리에 화관을 투척한 범인은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그는 이어서 에이프릴의 머리에도 화관을 투척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부인, 에이프릴……. 뭐가 꽃이고 사람인지 구분이 안 되는군.”
저런 팔불출 발언을 서슴없이 하다니!
한편 에이프릴에게 주려고 산 것인 듯, 화관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던 제이드가 멈칫 걸음을 굳혔다. ‘졌다…….’라는 표정이었다.
갈 곳 잃은 화관은 로드리의 머리에 안착하게 되었고, 제이드는 화환을 사서 에이프릴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는 화환과 화관을 3개씩 사서 그레이안의 목과 머리에 중첩시켜 버렸다.
꽃에 폭 파묻힌 꼴이 된 그레이안은 너무나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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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 화관과 화환을 마구 선물하다가, 너도나도 꽃에 파묻힌 꼴이 되고야 말았다.
그 꼴로 저녁까지 도시에 남아서 불꽃놀이도 야무지게 보고 왔다.
솔즈베리 성의 사람들은 우리의 몰골을 보곤 식물형 마수인 줄 알았다며 기겁했다.
어쨌든 즐거운 하루였다. 나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 같다.
그날 밤은 그레이안, 에이프릴, 그리고 나, 우리 셋이서 같이 잠들었다. 아주 만족스럽고 평온했기 때문에 이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뜻밖의 사건은 언제나 불현듯 일어나곤 한다.
* * *
“아버지에게 제 위치를 들켰어요.”
라고 제이드가 별안간 고백해 온 것은, 봄맞이 축제에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꽃이 만개한 정원 풍경을 사진기에 담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우뚝 굳은 채 제이드를 쳐다보았다.
제이드는 내 시선을 피하며 머쓱하게 뒷덜미를 쓸어내리더니,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을 거 같아요.”
“어…… 으음……. 그렇구나…….”
이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다.
제이드가 계속 솔즈베리 가문의 기사로 있길 원한다면 ‘칼윈’이라는 이름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그레이안은 제이드에게 그럴 각오가 있다면 칼윈 공작과 갈등을 겪게 되더라도 제이드를 지지해 줄 위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이드는 솔즈베리 가문에 누를 끼치는 것이고, 제이드의 성격상 그걸 용납할 리 없었다.
그렇기에 제이드는 솔즈베리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것이리라…….
“사실 어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봄맞이 축제는 마음 편히 즐겼으면 해서요. 저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
이 녀석……. 은근히 생각이 깊다니까? 하긴, 질투심이 많고 집착이 강하고 성격이 비뚤어져서 그렇지, 근본이 나쁜 녀석은 아니니까.
나는 사진기를 내려놓고 제이드의 곁으로 조금 더 다가갔다.
그리고 푸른빛이 감도는 녀석의 은색 머리칼을 쓰다듬으려다 머뭇거리며 물었다.
“에이프릴에게는 말했니?”
“아니요, 아직요. 로드리 경에게만 말했어요.”
“그레이안에게도 아직 말 안 한 거구나.”
“네……. 곧 말해야죠. 제가 누구인지도…… 결국 밝혀야 하고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리는 제이드가, 나는 처음으로 안쓰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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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날 오후.
제이드는 그레이안과 에이프릴 앞에서(그리고 기사들과 가신들 몇 명이 듣는 자리에서) 충격 고백을 했다.
“제이드 칼윈이 제 본명입니다. ……아인스턴의 칼윈 공작이, 바로 제 아버지고요.”
소리 없는 경악이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