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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105화 (105/144)

##  105. 웃으며 칼 꽂기

포악함을 한껏 드러내며 쿠션을 북처럼 두드릴 땐 언제고, 토끼는 테이블 위로 깡충 올라가더니 의젓하게 말했다.

“꺄웅잇…….”

뭐라고 하는 걸까?

토끼가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30분 후에 알 수 있었다.

사람 모습으로 예장을 마치고 나온 에이프릴이 제법 비장하게 말한 것이다.

“다녀올게요.”

“어……. 내가 같이 안 가줘도 돼?”

사교 파티에는 보통 샤프롱이라고 해서 데뷔탕트를 도와주는 귀부인이 동행한다.

그렇지만 혼자 다니는 소녀들도 있다. 샤프롱을 구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독립심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에이프릴의 샤프롱은 당연히 나다. 그렇기에 사교 파티도 함께 가는 줄로 알았는데…….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저렇게 꿋꿋이 말하니 별 수 있나……. 내키지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호위 기사를 로드리 포함 3명 더 붙이고 내 나비들도 몇 마리 붙여 놔야지. 아발론은 치안이 좋아 안전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동 마도구랑 통신 마도구 꼭 가져가. 아르윈이 만들어준 애뮬릿도 챙겼지?”

“그럼요. 걱정 마세요.”

“……진짜 내가 같이 안 가도 돼?”

“저 혼자서도 충분해요!”

나는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에이프릴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바람처럼 빠르게 타운 하우스를 떠나 버렸다.

……몰래 미행할까? 아니, 그런 짓을 하면 에이프릴이 화내려나.

.

결국 미행은 실천하지 못하고 생각만으로 그쳤다. 에이프릴은 오후 4시쯤 되어서야 타운 하우스로 돌아왔는데, 퇴근한 직장인처럼 낡은 모습이었다.

오늘의 사회성을 전부 소진했다는 느낌……? 아무튼 그런 피곤한 몰골로 비척비척 걸어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어김없이 토끼로 변신했다.

“꺄아앙……!”

‘나 너무 힘들었어!’라고 하는 것만 같다. 고생한 토끼를 위해 미리 준비해 둔 산딸기 에이드를 거실에서 마시게 해 주었다.

그러자 토끼는 무척 감격한 것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후훗……. 이 엄마가 최고지?

“웅꺄앙 꺄앙!”

방금 저 말은 ‘엄마가 제일 좋아!’였을 것이다. 정신 승리 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한 99%쯤 확신한다…….

‘역시 우리 토끼는 내가 평생 끼고 살래……!’

산딸기 에이드를 마시느라 입 주변이 발갛게 물든 토끼를, 나는 넘치는 사랑을 담아 꼬오옥 끌어안았다.

* * *

어느덧 사교 시즌도 끝났고, 아발론을 떠나야 하는 날이 되었다.

물론,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발론에서 가족사진 찍기……! 나 이거 꼭 해보고 싶었어!’

우리는 아발론의 광장에서 나란히 서서 가족사진을 찍었다(아르윈이 찍어 줬다).

감사의 의미로 아르윈의 사진도 찍어 주려 했는데, 그는 싫다며 극구 거절했다. 알고 보니 아르윈은 사진에 찍히기 싫어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다음은 다 함께 외식하기!’

이날을 위해 점심 특선이 나오는 아발론 최고의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 뒀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토끼는 무척 잘 먹었다. 너무 잘 먹어서 큰일이었다.

저 작은 몸에 2인분은 훌쩍 넘는 음식이 어떻게 다 들어가는지……. 토끼 배 속은 블랙홀인 게 아닐까……?

여하튼, 아발론 최고라는 명성이 아깝지 않게 레스토랑의 요리는 정말 맛있었다.

나도 평소보다 많이 먹었고 그레이안도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역시 맛있는 음식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니까.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첫날 왔었던 유명 파티세리와 대형 서점에 다시 들렀다. 토끼의 소원이었기 때문이다.

토끼는 파티세리에 들어서자 깡충깡충 뛰며 아주 좋아하더니, 무려 40가지나 되는 타르트와 파이, 케이크를 잔뜩 골랐다.

다 먹을 수는 있으려나……. 혹시 모르니 아르윈에게 보존 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서점에서는 60권이 넘는 책을 구입했다. 그중 3권은 내 거고, 2권은 그레이안 거였다.

로드리와 제이드에게도 뭐 사고 싶은 책이 있거든 골라 보라고 했는데, 딱히 관심이 없는지 안 고르더라.

참고로 내가 고른 책은 연애 소설과 모험 소설이다. 연애 소설은 1권짜리고 모험 소설은 2권짜리로 상, 하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모험 소설이 예전에 저쪽 세상에서 내가 봤던 SF 영화랑 비슷한 내용이라 혹해서 집어 들었다.

그 영화, 웅장한 사운드와 영상미가 진짜 죽여 줬는데……. 그리고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잘생겼다.

내 취향의 미남이었지! 다시 보고 싶지만 방도가 없겠지? 슬프다…….

“그럼 출발합니다.”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빗장 너머로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이 가능한 아발론의 근교까지는 마차를 타고 가야 했기에, 솔즈베리 공작령에 도착하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런데…… 그레이안은 아까 서점에서 무슨 책을 샀더라? 표지를 안 보여 주던데.’

나는 맞은편에 앉은 그레이안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힐끔거렸다.

토끼는 내 옆자리에서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고, 제이드와 로드리는 간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카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레이안은…….

‘저거……. 서점에서 산 그 책 맞지?’

아주 조용히 앉아 독서하는 중이었다.

흐으음, 길게 비음을 흘린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그레이안의 곁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책에 푹 빠졌는지, 그레이안은 내가 곁에 왔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람, 늑대 수인이라 감각이 예민한 주제에 은근히 허당인 구석이 있다는 말이지. 지금도 답지 않게 무방비하고.

피식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삼킨 나는, 그레이안이 읽고 있는 책의 표지를 슬쩍 확인해 보았다. 제목이…….

《가정적인 남편이 되는 101가지 방법 ― 아내에게 사랑받는 남자들의 비밀》

‘……?’

뭐…… 뭐임?

‘아니, 뭐 이런 걸 읽고 있지?!’

그것도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으로?!

나는 어이없어 헛웃음을 흘리다가, 그레이안이 옆에 둔 다른 책의 제목도 살펴보았다.

《나는 내 딸을 이렇게 키웠다 ― 효과적인 육아와 가정 교육 방침》

그 제목을 본 순간 웃음을 참을 수 없어서 푸흡, 실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 소리에 움찔한 그레이안이 퍼뜩 책을 내렸고, 단번에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내 귀여운 남편을 놀리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덜컹!

길가에 짱돌이라도 있었는지 마차가 크게 흔들렸고, 중심을 잡는 데 실패한 나는 양팔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레이안이 있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어어……!”

황급히 책을 옆으로 치운 그레이안이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고, 나는 그의 품으로 풀썩 떨어졌다.

“악…….”

그의 가슴팍에 코를 박았는데 뼈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프고 얼얼했다.

무슨 가슴이 이렇게 단단해……! 바위냐! 나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그의 가슴을 팍! 쳐 버렸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고통에 손을 부여잡으며…….

“부, 부인…….”

그레이안은 나를 꼭 껴안은 채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음소거 상태에서 몸부림치다가, 아픔이 잦아질 때쯤 진정했다. 코랑 손…… 붓는 건 아니겠지. 빨개진 것 같긴 한데.

‘내가 딸기코라니…… 젠장, 쪽팔려.’

이래서야 그레이안을 마음껏 놀릴 수도 없다. 나는 괜찮냐고 계속 물어오는 그레이안에게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한편에선 아르윈이 이쪽을 보지 않으려 애쓰며 웃음을 참고 있었고, 어느새 졸음에서 깬 토끼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드와 로드리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카드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너희, 일부러 모른 척해 주는 거지? 내가 민망할까 봐…….

‘고오맙다…….’

내 인생의 장르는 코미디가 확실하다. 그렇지만 왜 하필 코미디인가. 이왕이면 좀 웅장한 장르인 편이 더 좋은데.

* * *

아발론에서 돌아온 후로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났다.

4월이 되자 솔즈베리 공작령에도 봄의 기운이 만연해져서, 파릇파릇한 새싹이 곳곳에 돋아나고 꽃나무가 봉오리를 틔웠다.

곧 있으면 활짝 만개한 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좋은 때야……. 그렇죠? 안나?”

“네, 마님.”

“정말…… 좋은 때인데…….”

그런데…….

나는 왜 열불 나는 소식을 듣고 있어야 하는가!

손에 쥐어져 있던 편지를 와락 구겼다.

내가 선임한 아인스턴의 특허법 전문가에게서 온 편지로, 오늘 오전…… 사진기의 특허 취득이 실패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빌어먹을 라니에로 아인스턴이!’

보나 마나 그 개자식의 방해로 실패한 게 틀림없었다. 비열한 놈 같으니라고.

나는 분노한 채 숨을 씩씩 몰아쉬며 다른 편지도 펼쳐 들었다. 에반젤린에게 붙여 놓은 세작에게서 온 보고서였다.

[라니에로 왕이 에반젤린 왕녀에게 비공식적으로 근신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임. 열흘 전부터 현재까지 외출 횟수 0회. 에반젤린 왕녀가 넘보던 사진기(복제품) 사업은 칼윈 공작의 손에 떨어짐. 또한 모종의 이유로 에반젤린 왕녀와 그 세력이 자금난을 겪는 것으로 추측됨.]

에반젤린의 사업과 자금에 관해선 2주일 전 그레이안의 방해가 있었다.

나는 새삼 그 일로 그레이안에게 무서운 구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그는 에반젤린이 원하는 것, 에반젤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전부 꿰뚫어 보곤 근간부터 착실히 망가뜨리는 중이었다.

‘정말 대단한데…… 뭐랄까, 절대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언제나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요.’ 하고 말했던 그레이안의 얼굴을 떠올리자, 몸이 저절로 부르르 떨렸다.

웃으며 칼 꽂는 스타일……. 응, 바로 그거야.

‘큰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아인스턴 왕가의 일원들은 저마다 자금줄이 있다. 그건 에반젤린도 마찬가지.’

―라는 것이 그레이안의 정론이었는데, 확실히 옳은 판단이었다.

조사해 본 바로는(그리고 글로리아의 기억으로는) 에반젤린은 다른 왕자나 왕녀들에 비해 자금줄이 매우 탄탄한 편이었다.

왜냐하면 체서피크 자작이 연결해 준 기페스 후작가가 에반젤린을 거의 전폭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페스 후작은 칼윈 공작과 불화가 있기로 유명한데, 만일 에반젤린이 다음 대 왕이 된다면 칼윈 공작을 숙청하고 자신이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으리란 계산이 깔려 있는 듯했다.

‘정치판이란…….’

나는 오랜만에 정치 울렁증을 느끼며 이마를 짚었다.

새삼스레 깨달은 건데, 에반젤린을 비롯한 아인스턴 왕가의 인간들이 다 그 모양인 이유가 썩은 물에서 놀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역시 수질은 중요해.

그래서 블레셋도 청정 1급수 구역에서만 살잖아. 가끔은 그 녀석의 지독한 인간 혐오도 이해가 간다니까?

‘뭐 아무튼…… 에반젤린 쪽은 내가 손쓸 게 없고. 일단 지켜보기나 하자. 사진기 특허는…….’

어이없고 화나지만 이미 물 건너 간 일, 미련 두지 말자. 화낼 시간에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내는 게 더 생산적이다.

이를테면, 다음 사업 구상안이라든가?

‘이번에는 엘로윈의 유명 관광지와 엮어서…… 아인스턴인들이 따라할 수도, 라니에로 왕이 방해할 수도 없게 해 주지.’

아인스턴인들이 엘로윈을 여행하거나 상단이 오가는 것까지 라니에로 왕이 금지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적대 관계의 국가라 한들, 서로 밀접하게 붙어 있는 한 교류를 완전히 끊을 순 없으므로.

‘망할 라니에로 왕, 두고 보자고. 댁네 국민들의 지갑을 탈탈 털어 줄 테니까.’

혹시…… 자낳괴라고 들어는 보았나? 나는 음흉하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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