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4화. 저주가 심어진 반지
블레셋은 온몸을 빛으로 휘감은 듯한 모습이었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 그 정도로 눈이 부시게 잘생겼다.
아니, 잘생겼다는 표현은 너무 빈약하다. 블레셋은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당연히, 무도회장 안의 사람들은 이미 홀린 듯 그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에이프릴.”
블레셋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으며 에이프릴에게 손을 내밀었다.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던 에이프릴은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그 손을 덥석 잡았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싸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에이프릴……. 설마 블레셋에게 홀린 건 아니지? 저 예쁜 얼굴에 잠시 정신을 빼앗겼을 뿐인 거지?!
‘저 흑막 최종 보스 자식이 곱게 키운 내 토끼를 홀랑……!’
나는 손수건을 꺼내 물어뜯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에이프릴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엄마로서 응원해야 할 테지만……! 그렇지만……! 역시 싫어! 우리 토끼는 내가 평생 끼고 살래!
‘엄마가 제일 좋아.’ 하던 에이프릴이, 어느 날 속 시커먼 사위 후보를 데려와서는 ‘이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요.’ 이러면 나는 그만 기절하고 말 것이다. 바닥에 엎어져 엉엉 울 거라고…….
‘흐윽……. 에이프릴…….’
블레셋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가는 에이프릴을 집요하게 바라보다가, 무심코 시선이 옆으로 샜다.
내 옆의 그레이안이 나와 똑같은 감정을 담은 듯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그레이안……. 티는 별로 안 나지만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더한 팔불출이구나…….’
자연히 동질감을 느낀 나는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그레이안이 나를 쓱 보고는 내 손을 살며시 그러잡았다.
그렇게 우리는 동병상련의 처지로, 솜사탕 잃은 너구리 눈빛을 하고 에이프릴을 지켜보았다.
.
맑고 깨끗한 선율이 무도회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댄스 플로어 중앙에서 물 흐르듯 유연하게 춤추는 에이프릴과 블레셋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시선을 빼앗긴 채 그 둘을 구경하기 바빴다.
물론 나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에이프릴과 블레셋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제이드 녀석이 걱정인데…….’
제이드와 로드리가 있는 쪽을 흘긋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질투심 MAX의 표정인 제이드와 그런 제이드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로드리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저 녀석, 블레셋에게 덤비는 건 아니겠지……? 지금의 실력으론 블레셋에게 이길 수 없을 텐데.’
지금은 로드리와 제이드가 힘을 합쳐도 블레셋을 이길 수 없다. 당연하다. 블레셋은 114세의 용족이니까.
사람으로 따지면 14세 정도고 아직 완전히 성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용족은 강했다. 저 녀석이 괜히 원작의 최종 보스인 게 아니라니까.
‘혹시 결투가 벌어지거든 내가 꼭 말려야겠어……. 지금뿐만 아니라 다른 때에도.’
제이드의 거친 질투와 로드리의 불안한 눈빛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다가 춤곡이 끝났다.
블레셋과 에이프릴은 마무리 인사를 나눈 후 댄스 플로어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여기로 오려나? 역시 그렇겠지? 우리와도 잠깐 인사를 나누고 가지 않으려나?
“솔즈베리 공녀의 파트너인 저 소년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러게요. 흔치 않은 외모라 자꾸만 눈길이 가네요…….”
한편 사람들은 블레셋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여러분, 때론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랍니다……. 혹시 저 소년에게 다가가 말을 걸 생각이거든 접으십시오……. 특히 수인 아닌 보통의 인간이신 분들은.
블레셋은 에이프릴과 몇 마디 말을 더 나누었고, 이내 에이프릴의 손등에 키스하더니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엥? 여기로 안 와??’
그렇게 우리에게는 아무런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 버리는 블레셋을, 나는 황당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저 4가지 부족하신 분 같으니라고……!
‘에이프릴 외에는 다 돌이다, 이건가? 뭐, 저러는 편이 확실히 블레셋답기는 하지만…….’
한때 유교 국가의 국민이었던 나는 매우 어이없어했다.
미래의 장인어른, 장모님일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가다니……! 사위 후보 실격이야!
하지만 블레셋에게 고마운 점도 있었다. 블레셋과 에이프릴이 춤을 춘 후로, 에이프릴에게 쏟아지던 춤 신청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뭐랄까…… 다들 깨달은 게 아닐까? 에이프릴을 쟁취하려면, 범접할 수 없어 보이는 상대와 경쟁해야 한다는 것을!
덕분에 남은 시간 동안은 편-안하게 보냈다. 고맙구나, 블레셋아.
* * *
올해의 데뷔탕트 무도회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비록 에반 뭐시기 씨가 나타나 훼방을 놓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수인 혐오자인 에반 어쩌고 씨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에반…… 씨는 사주에 망신살이 있다는 사실만 증명하고 갔다.
‘이젠 에반젤린 이름 네 글자 발음하기도 싫다.’
나는 타운 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종이와 펜을 꺼내들고 ‘이 편지는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 웨일스에서 시작되어…….’로 시작하는 저주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익명으로 에반젤린에게 보내 버릴 거다.
“공작 부인……. 뭐 하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르윈의 물음에 나는 쓰다 만 저주 편지를 슬쩍 뒤집어 감췄다. 지금 이곳은 타운 하우스의 2층 회의실이었다.
나를 비롯한 일행은 지금 이 자리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었다. 당연히, 에반젤린 때문이다.
“에반젤린 왕녀의 일행에게 손을 쓴 건 블레셋이래요. 뭐랬더라? 갑자기 미쳐서 옷을 벗으려 하고, 마구 소리치며 뛰어다니게 하는 마법을 걸었다던데…….”
“히익…….”
에이프릴이 알려준 진실에,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겁에 질린 소리를 냈다. 역시 블레셋은 너무나 잔인하고 무시무시해!
“아, 어쩐지. 마력흔이 느껴지더라니……. 블레셋 에든버러가 먼저 선수를 친 거였군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아르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다들 태연한 표정이지? 나만 블레셋의 잔인함을 겁내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아르윈……. 춤 신청 몇 번 받지 않았어?”
갑자기 얘기가 딴 길로 샜다. 질문한 사람은 그레이안이었다.
아르윈은 대번 질색한 표정을 짓더니 짜증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미쳤냐. 무도회에서 춤을 추게?”
“왜? 한 번쯤은…….”
“아, 됐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사실…… 나도 다 봤다. 아르윈이 춤 신청을 받는 모습을.
아르윈, 인기 많더라.
‘주로 여성에게 춤 신청을 받았지만 남성에게도 받았지…….’
나도 모르게 의뭉스러운 눈으로 아르윈을 힐끔거리자, 그가 경고하듯이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모르는 체하며 딴청을 피웠다.
“잡담은 그만하고, 오늘 에반젤린 왕녀가 뭘 하러 왔던 건지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아르윈이 허공에서 예의 망토……이긴 한데 공처럼 보이는 것을 소환해 냈다.
동그랗게 돌돌 말려 있던 망토를 그가 책상에 올려두고 쫙 펴자,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다시 봐도 이상하게 생긴 반지였다.
‘저 문양, 뭔지는 모르겠는데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그아악! 아주 사악한 주술력이 느껴져!}
{아깐 왜 못 느꼈지?!}
{기분 나빠악!!}
별안간 나비들이 나타나 나를 둘러싸며 난리 치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 자식들 왜 이래? 나비들은 심지어 내 몸과 얼굴 위에 다닥다닥 달라붙었다. 마치 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으악! 징그럽다고! 떨어져!!’
나는 손을 휘저어 나비들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러나 나비들은 나에게 더욱 격하게 달라붙을 따름이었다.
야, 이놈들아! 나를 따개비 붙은 바닷가의 바위 같은 몰골로 만들지 말라고!
‘아 얼른 떨어지라고! 이토 준× 만화 같잖아!’
{안 돼!! 글로리아를 지켜야 해!!}
{어떻게 저런 사악한 기운이!}
{너무 끔찍한 악의가 느껴져!}
{우리가 지켜줄게, 글로리아!}
아니 지금은 안 지켜줘도 된다고……. 나는 포기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눈 근처에도 나비들이 달라붙어 있어서 세상이 오팔 빛으로 보인다…….
“……공작 부인, 괜찮으신 겁니까?”
“네, 뭐……. 나비들이 좀 달라붙었을 뿐…….”
아르윈의 물음에 낡고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자, 나를 향한 걱정스러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 보였지만, 내 미소가 제대로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음, 일단, 다들 이 반지는 건드리지 마시고 눈으로만 보십시오. 특히 인장 부분이 위험합니다. 맨살에 닿으면 저주의 낙인이 새겨지는 용도 같거든요.”
“저주의 낙인이라고요……?”
아르윈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고, 놀라 되묻는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망할 나비들 때문에 에이프릴의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예, 강한 저주의 기운이 담겨 있지만 정령력으로 덮어 감춘 모양이더군요. 물론 제가 마력으로 걷어냈습니다만…….”
계속 달라붙어 있던 나비들이 슬슬 물러난 덕분에, 아르윈이 나를 힐끔 살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무도회장에서 세계수의 나비들이 이 반지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한 건 바로 그래서였을 겁니다.”
‘역시 그랬구만…….’
나비 녀석들이 그때 알아차렸더라면 아주 난리 법석을 떨었을 거다.
“……에반젤린 왕녀는 처음에 저에게 접근하려 했어요. 로드리 경 때문에 실패하자 결국엔 어머니를 덮치려 했지만요…….”
에이프릴의 말에 사위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니까, 에반젤린이 처음으로 노린 목표는 에이프릴이라는 뜻이다.
‘빌어먹을 에반젤린 아인스턴이…….’
감히 내 딸을 해치려고 해? 로드리가 재깍 알아차리고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무슨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다.
“이 일을 그냥 좌시해서는 안 되겠군.”
“그래, 증거도 있으니 아인스턴 왕가를 압박할 수 있을 거야. 에반젤린 왕녀는 발뺌하려 하겠지만.”
“발뺌하든, 말든…… 이번 일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줘야겠지. 다소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써서라도…….”
아르윈과 대화하는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깊고 차분했지만, 무겁고 서늘한 분노가 느껴졌다.
나는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 반지는 이대로 증거로 보존하기로 하고, 오늘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으니 저주를 받아치는 보호 애뮬릿을 만들어서 하나씩 몸에 지니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이왕이면 평소에 자주 끼는 장신구로 만드는 편이 좋을 테니, 모두 내일 아침까지 장신구 하나씩 저에게 가져오십시오. 그냥 단순한 은반지 같은 거여도 됩니다.”
늦은 밤 열렸던 회의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나는 곧장 방으로 향했고, 에이프릴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얘는 왜 자기 방으로 안 가고 나를 따라오나 싶었는데, 방에 도착하자마자 토끼로 변하더니 내 품에 쏙 안겨 왔다.
“꺄앙!”
“어이쿠.”
갑자기 발사된 토끼 미사일에 명치를 가격 당했다.
에이프릴은 넘치는 애정을 주체할 수 없는지 내 옷자락에 대고 계속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꺄우웅.”
“그래, 토끼야, 얼른 씻고 자자. 근데 너 사람 모습으로 드레스 벗어야지! 얼른 다시 모습 바꿔!”
그렇게 에이프릴의 드레스를 벗겨 준 뒤(물론 시녀들이 거들었다) 나도 옷을 벗고 우리 둘은 함께 목욕을 했다.
따뜻한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려니 피로가 사르르 풀려나갔다.
“오늘은 일찍 자자……. 진짜 너무 피곤해.”
“웅꺗.”
길었던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있었다.
* * *
그리고 오늘부터는 아발론의 사교 시즌이다!
내 옆에선 극대노한 토끼가 쿠션을 앞발로 마구 패고 있었다.
왜 저러냐고……? 토끼 앞으로 온 파티 초대장이 무려 스무 개가 넘기 때문이다.
“캬아아앙―!!”
MBTI 테스트를 하면 I로 시작할 게 분명한 토끼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가엾은 녀석. 나는 토끼의 보송보송한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달래듯 물었다.
“그렇게 가기 싫어?”
“캬우웅!”
“그럼 가지 마~.”
그러자 쿠션을 연타하던 토끼가 멈칫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