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 타이밍 좋게 등장
대대로 아인스턴 왕가에서 세계수의 선택을 받은 자가 나온다는 사실은, 일종의 전설처럼 취급되지만 어쨌든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단순히 성령들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외에, 그 진정한 의의가 무엇인지는 이미 오래 전에 잊히고 말았지만…….
‘세계수의 대행자’ 또는 ‘세계의 조율자’. 그 칭호가 지니는 울림은 여전히 묵직했다.
“어머, 저건……!”
“세계수의 성령들!”
“그럼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정말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나는 의기양양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나를 에반젤린은 살벌하게 눈을 희번덕이며 노려보고 있었다.
당장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눈빛이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싫은 모양이지.
“……어떻게 너 따위가…….”
그리 중얼거리는 에반젤린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와 박탈감이었다.
에반젤린은 명백히 나를, 내가 세계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질투하고 있었다.
나― ‘글로리아’는 원래 에반젤린에게 전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조무래기 왕녀, 그게 바로 글로리아였다.
그런 내가 ‘우연히’, ‘운 좋게’ 세계수의 선택을 받아 특별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는 사실을, 에반젤린은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겠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글로리아 아인스턴이, 자신이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사과하세요, 언니. 아니, 당신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네요. 에반젤린 왕녀. 내 딸에게 당장 사과해.”
“뭐……? 사과?”
“내 딸에게 근본도 없는 계집애라고 한 것, 사과하라고.”
내 말에 에반젤린은 기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며 사과는커녕 비꼬는 말을 던졌다.
“근본도 없는 것을 근본도 없다고 하는 게 뭐가 문제이지? 게다가 뭐, 딸이라고? 네가 정녕 미쳤구나? 수인 무리에 섞이더니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거야!”
수인들로 가득한 무도회에 참석해 있는 주제에 수인 혐오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에반젤린은…… 정말이지 멍청함 그 자체였다.
말이 통해야 무슨 말을 하지.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잠시 눈을 감으며 손으로 미간을 짚었다.
어떻게 해야 에반젤린을 이 무도회장에서 빠르게 쫓아낼 수 있을까…….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부왕께서 네 배신을 용서하실 것 같아? 넌 이제 끝났어, 글로리아! 부왕께서 크게 노하셨으니 곧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배신?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나는 슬며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시야로 들어오는 에반젤린은 험악하게 구겨진 얼굴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참 볼썽사납게 망가진 꼴이라고, 나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며 한쪽 입꼬리를 비딱하게 끌어올렸다.
그런 나를 보며 왜인지 흠칫한 에반젤린이 삿대질하던 손을 살짝 떨었다. 나는 그 손에 끼워진 뭉툭한 반지에 시선을 주었다.
드레스 차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상한 반지였다. 어쩐지 불길한 느낌을 주는 그 반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나는 재차 입을 열었다.
“난 솔즈베리 공작과 결혼해 엘로윈 왕국의 일원이 됐어. 그런 내가 솔즈베리와 엘로윈을 위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나를 애물단지 취급하며 하대한 건 오히려…….”
거기까지만 말하고 뒷말은 삼켰지만, 뜻은 전해졌을 것이다.
나를 물건처럼 이리저리 휘두른 건 아인스턴 왕국이고, 라니에로 왕이라는 것 말이다.
그런데, 배신? 웃기는 소리다. 나는 아인스턴 왕국에 저버릴 신의도 없는 처지 아니었던가.
내 말을 듣고도 에반젤린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저 나를 싸늘히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다 침묵이 지루해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감히 오만방자하게 군 것,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게만 대꾸하더니 에반젤린은 갑자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내 몸에 닿으려던 순간―
펄럭!
난데없이 나타난 망토 자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어이쿠, 실례.”
‘이 목소리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아르윈이었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아르윈은 에반젤린의 손에 닿은 망토를 잽싸게 벗더니, 왜인지 공처럼 돌돌 말았다.
나는 그의 기행을 ‘뭐지?’ 싶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곧이어 아르윈이 돌돌 말린 망토를 허공에서 뿅 사라지게 했다.
대체 뭘 한 거지? 황당함에 그를 빤히 쳐다보다가, 무심코 에반젤린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예의 이상한 반지가 사라진 자신의 손을 망연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뭐지? 저 반응은? 무언가 수상하다는 촉이 왔다.
‘그 반지는…… 역시 아르윈이 훔친 건가?’
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누가 블랙맘바(자칭) 아니랄까 봐, 그는 훌륭한 새비지이기까지 했다!
“에반젤린 왕녀 전하, 말씀 나누시는 중에 죄송합니다만, 함께 오신 일행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던데 이만 가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 꽤 심각한 상황인 듯해서 말입니다―.”
“뭐……?”
에반젤린은 아르윈의 구렁이 담 넘어가는 화술에 말려든 듯이 멍하니 반문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더니, 부릅뜬 눈으로 아르윈을 노려보며 입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미처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에반젤린을 아르윈은 어깨를 으쓱하며 의뭉스러운 태도로 응대할 따름이었다.
에반젤린은 주먹을 꽉 쥔 채 아르윈을 노려보더니, 이어서 나를 매섭게 쏘아보고는 홱 등을 돌렸다.
성큼성큼 출입문으로 향하는 그녀를 사람들은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양 슬금슬금 피했다.
그렇게 에반젤린이 퇴장하자, 고요하던 무도회장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어휴, 소문대로네요.”
“엘로윈의 데뷔탕트 무도회엔 대체 왜 온 거래……?”
“너무 불쾌해요. 오늘 제 딸의 데뷔 날인데.”
“아인스턴 왕족이란…….”
에반젤린을 향한 비난은 자연스럽게 아인스턴 왕국과 왕가를 향하게 됐다.
그러다 몇몇 사람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다음과 같은 말로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솔즈베리 공작 부인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모든 아인스턴인이 다 수인 혐오자인 건 아니라오. 내 친구도…….”
그런 흐름 속에서 에반젤린이 몰고 온 파란은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듯했다.
나는 사람들을 살펴보다가, 아르윈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작은 소리로 추궁했다.
“망토로 뭘 숨겼어요?”
“아니, 왜 옆구리를 찌르고 그러십니까?”
옆구리가 민감한지 아르윈은 물고기처럼 펄쩍 뛰었다. 나는 머쓱하게 손을 뒤로 감추며 재차 물었다.
“망토로 뭘 숨겼냐니까요.”
“지금은 곤란하고…… 무도회가 끝나면 보여 드리겠습니다. 무도회나 마저 즐기시지요. 저는 혹시 모르니 저 구석에 서 있겠습니다.”
아르윈은 ‘이 불편한 무도회장에 버려지다니이―!’라고 외칠 것만 같은 표정으로 말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무도회가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을 돌아보았다.
왠지 닮은 것 같은 동그란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던 두 사람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방긋 웃었다. 거의 동시에 말이다.
“……좀 성가신 일이 있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쓸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아르윈이 때마침 나타나서 뭔가 낚아채기도 했고……. 아차, 로드리, 아깐 정말 잘했어.”
내가 칭찬하자, 에이프릴 근처에 제이드와 함께 서 있던 로드리가 뺨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귀여워라. 아깐 되게 듬직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또 새끼 고양이 같네.
“……에반젤린 왕녀는 대체 여기까지 뭘 하러 온 거죠? 에이프릴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제이드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 녀석은 아인스턴 왕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게 티가 난다. 반골 기질이 있어 보인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건 이따 무도회가 끝난 후에 아르윈이 알려줄 거야. 에반젤린이 그냥 놀러 온 건 아니겠지. 그래 봤자 실속도 못 챙기고 망신만 당하다 도망치듯 떠났으니, 지금은 잊어버리고 무도회나 마저 즐기자.”
그리 대답한 나는 어서 가서 춤을 추라며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마침 새로운 춤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망할 에반젤린 때문에 에이프릴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엉망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기에 지금은 에반젤린에 대한 건 잠시 접어두고 무도회를 즐겨야 할 때다.
“우리도 한 곡 출까요? 부인.”
그레이안이 눈치 좋게 손을 내밀며 춤을 청해 왔다. 내 뜻을 벌써 다 읽은 게 분명했다.
하여튼 귀신같은 사람……. 나는 설핏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우리 두 사람이 리드하기 시작하자,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망설이던 이들도 하나둘씩 댄스 플로어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로드리와 춤을 췄다. 제이드는 그 다음 순서인 모양이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졌나? 아니면, 로드리가 연장자라 제이드가 양보한 걸지도……. 정말 그런 거라면, 제이드 녀석 철 좀 들었는데?
그렇게 한 곡 마친 후, 에이프릴은 곧이어 바로 제이드와도 춤을 췄다. 제이드는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헤벌쭉 웃고 있었다. 그렇게 좋냐?
“사과 주스입니다, 부인.”
“고마워요. 마침 목말랐는데.”
그레이안은 나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고 상냥하게도 로드리의 마실 것도 챙겨 줬다. ……내 남편이지만 정말 너무 착하다.
등 뒤로 하얀 날개가 보이는 것만 같아. 물론 그는 조류가 아니라 늑대이지만…….
“부인.”
로드리의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준 그레이안이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나는 사과 주스를 홀짝이며 그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그레이안은 왜인지 자책 어린 표정이었다.
“제 불찰입니다. 오늘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는 이들의 명단을 미리 받아 뒀어야 했는데…… 그랬더라면 에반젤린 왕녀가 이곳에 나타날 수 없게 막았을 겁니다.”
나는 고개를 휘휘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설마 에반젤린이 엘로윈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왔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리고 아마 다른 사람의 신분을 훔쳐 몰래 참석한 걸 거예요. 명단을 미리 봤더라도 몰랐을 테죠.”
이 일은 나중에 외교 문제로 번질 우려가 있지만, 기실 엘로윈과 아인스턴 사이의 문제가 한둘이 아니라서……. 이런 사소한 소동은 아마 에반젤린 개인의 망신으로 끝날 가능성이 컸다.
“……에반젤린 왕녀가 무슨 의도로 에이프릴에게 접근하려 했던 것인지, 혹시 짚이는 데가 있으십니까?”
“음…….”
그레이안이 넌지시 건네온 물음에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짚으며 비음을 흘렸다.
에반젤린이 에이프릴에게 접근하려 했던 의도……. 당연히, 좋은 의도는 아닐 테지. 단순히 모욕감을 주기 위해 그런 것도 아닐 터였다.
‘그 반지…….’
아르윈이 나타난 직후 에반젤린의 손에서 사라진 것은 그 이상한 반지였지.
에반젤린은 그 반지를 낀 손으로 나를 붙잡으려 했고…….
‘그 반지가 수상하다는 것을 아르윈은 대번 알아챘던 거야.’
그 반지에 담긴 주술력 위에 정령력을 덧씌워 감추는 요행을 벌였다 하더라도, 마력을 지닌 마법사는 단번에 알아차릴 터였다.
그 반지에 묻어나는 주술력도, 정령력도 말이지.
마력, 주술력, 정령력은 서로 상충하는 힘이니까.
“내 생각엔―.”
추리를 마치고 그레이안을 돌아보며 막 운을 뗀 순간이었다.
‘……어?’
익숙한 인영 하나가 에이프릴 곁으로 다가가는 광경이 시야에 잡혔다.
뒤늦게 무도회장에 나타나 사람들의 이목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 인물은…….
‘저, 저 녀석이 이런 델 와?!’
다름 아닌, 블레셋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