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불청객은 이만 퇴장해 주세요
너 따위가 왜 그렇게 행복한 듯이 웃어?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에반젤린은 입술을 깨물며 두 손을 꽈악 주먹 쥐었다.
울컥 치솟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불쾌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글로리아가 행복한 듯 웃는 게, 너무나도 기분 나빴다.
떠돌이 점술가 소생인 글로리아는 아인스턴 왕가의 천덕꾸러기였다.
어릴 땐 그래도 영리했던 모양이지만, 자라면서 매우 어리석은 반푼이가 되었고, 그런 주제에 또 숨 쉬듯 사치하고 패악을 부려 인심을 잃었다.
그 탓에 자기 세력 하나 없는 글로리아였으나, 허울뿐인 왕녀의 신분이라도 지킬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인스턴 왕가의 혈통은 특별하다’는 선전을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부왕의 방책 때문이었다.
그런 글로리아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반젤린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차피, 부왕에게 평생 이용당하며 살다 불행히 죽는 것이 글로리아의 운명일 것이었으므로.
솔즈베리 공작과 결혼한 글로리아는 보나 마나 전쟁의 불씨가 될 것이었다. 솔즈베리에서도 경멸당하고, 미움받고, 그렇게 평생 불행하겠지.
그에 반해 내 삶은 얼마나 유복하고 평탄한지! 에반젤린은 글로리아와 자신의 처지를 비교해 위안을 얻고 우월감을 느꼈다.
글로리아는 언제나 저 아래 밑바닥에, 자신은 언제나 저 위 천상에 가깝게 있어야 했다. 그건 세상의 섭리처럼 당연한 것이었는데…….
‘글로리아 따위가 왜…….’
말아 쥔 주먹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에반젤린은 글로리아가 화목하게 웃고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닫게 되었다.
글로리아는 저 토끼 수인 여자애를…… 진심으로 아낀다.
연기가 아닌 진짜 애정이, 글로리아의 눈빛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거기까지 판단했을 때, 에반젤린의 머릿속에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글로리아가 아니라, 저 토끼 수인 여자애를 저주하면 어떨까?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자신 때문에 망가지면, 글로리아는 몹시도 불행해지겠지. 절망과 죄책감에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될 터였다.
‘그래, 아주 괜찮은 생각이야.’
에반젤린의 입술에 뒤틀린 미소가 맺혔다. 문제는 저 토끼 수인 여자애에게 어떻게 접근하느냐인데…….
“어머, 솔즈베리 공녀님이 하프를 연주하시려나 봐요!”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하프 연주를 한답시고 토끼 수인 계집애가 글로리아와 솔즈베리 공작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이다.
‘하프 연주? 꼴에 공작 영애라고…….’
에반젤린은 입을 비죽이며 천천히 그리로 다가갔다. 구경꾼들 사이를 파고들어 맨 앞줄에 선 그녀가 그린 듯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연주가 끝나면 감격한 척하며 앞으로 뛰쳐나가, 저 토끼 수인 여자애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의 술렁임이 뚝 멎었다. 하프의 현을 오가는 두 손이 물 흐르듯 유연했다.
솔즈베리 공녀는 에반젤린이 듣기에도 제법 그럴듯한 연주를 해내고 있었다. 천한 수인 주제에 말이다.
‘……짜증 나.’
에반젤린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어서 빨리 이 연주가 끝나 버렸으면 했다.
저 계집애에게 낙인을 새기고 나면, 뒤도 안 돌아보고 이 무도회장을 빠져나갈 것이다. 더러운 수인들의 무도회 따위…….
“브라보!”
“와―!!”
“대단한 연주였어요!”
얼마 후 솔즈베리 공녀의 하프 연주가 끝났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찬사와 갈채를 보냈다.
에반젤린은 비웃음을 삼키며 재빨리 앞으로 뛰쳐나갔다.
악수를 청하듯 손을 쭉 내밀며, 솔즈베리 공녀와 막 가까워지려던 순간이었다.
“……!”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붉은 머리의 소년이 에반젤린의 앞을 황급히 가로막았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얼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에반젤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고, 가면 아래 감추어진 미간이 인정사정 없이 구겨졌다.
이 소년은, 글로리아의 훼방으로 경매에서 놓쳤던 바로 그 적호 수인이었다.
.
“로드리……?”
뒤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리는 에이프릴을 보호하듯 등 뒤에 숨긴 채, 눈앞의 여자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확실해. 이 사람은…… 에반젤린 아인스턴이 틀림없어.’
로드리는 아인스턴 왕궁에서 보았던 에반젤린의 영혼의 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매우 어두운 녹색에 음침한 회색이 섞인 지저분한 아우라였다.
두세 가지 이상의 색이 섞인 아우라를 지닌 사람은 많이 봐 왔지만, 에반젤린 공주의 아우라는 유독 거북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기에 로드리는 그녀의 아우라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이 에이프릴의 앞을 막아선 이유를 해명하려면 저 가면의 여자가 에반젤린 공주라는 사실을 폭로해야 할 터.
로드리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영혼의 빛을 볼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은…… 글로리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에게는 웬만해선 비밀로 하고 싶었다.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여러모로 힘들어질 테니까.
‘하지만…….’
로드리는 주변을 흘긋 살펴보았다. 무도회장 안의 사람들이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귀족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대단한 결례라는 것을. 더군다나 자신은 에이프릴의 호위 기사였다.
자신의 잘못은 주인인 에이프릴의 책임이 되기도 한다…….
‘……어쩔 수 없어.’
고민은 길지 않았다. 가면을 쓴 여자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로드리가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누구인가 했더니…… 노예 경매장에서 봤던 적호 수인 꼬마잖아?”
“……?”
끝까지 정체를 감추려 할 줄 알았던 에반젤린 공주가, 별안간 가면을 벗어던졌다.
당황한 로드리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에반젤린 공주의 붉은 입술이 비딱한 호선을 그리고, 녹색 눈에는 경멸과 분노가 묻어났다.
자신을 ‘물건’ 보듯 하는 그 눈이 로드리는 소름 끼쳤다.
“저거 설마 아인스턴의 에반젤린 공주야……?”
“저 사람이 여긴 왜 왔대?”
“뭐야? 왜 아인스턴의 왕족이…….”
에반젤린을 알아본 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드리는 이 상황에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사실 자신이 에반젤린 공주를 가로막은 이유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불길한 직감 때문이었다.
그걸 설득력 있게 말로 풀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로드리는 알지 못했다.
그런 로드리를 비웃듯, 에반젤린이 냉소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설마하니 노예 출신을 호위 기사로 두었을 줄은 몰랐네요, 솔즈베리 공녀.”
그 말에 사람들이 반응했다.
“노예 출신……?”
“저 붉은 머리가?”
“혹시 적호 수인인가……?”
이어서 에반젤린이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난 그저 내 조카와 인사를 나누려 했을 뿐인데, 감히 아인스턴 왕족의 앞을 가로막다니…… 호위 기사의 예의범절 교육을 다시 해야겠어요, 공녀.”
그 말을 듣고 로드리는 깨달았다. 에반젤린 공주가 왜 자진해서 정체를 밝혔는지.
‘……이럴 작정이었구나.’
로드리에게 정체를 폭로당하는 것보다는, 이렇듯 자신 있게 나서서 제 행동을 정당화하는 게 유리하리라고― 에반젤린 공주는 판단했을 것이었다.
곤혹스러운 기분에 휩싸인 로드리가 멈칫하기도 잠시.
“아인스턴의 에반젤린 왕녀 전하, 저와 인사를 나누고 싶으시다고요?”
뜻밖에도 에이프릴이 로드리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섰다.
* * *
“잠깐 기다려 봐요.”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그레이안을 덥석 붙잡았다.
“부인……?”
그가 초조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나는 에반젤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확인할 것이 있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엘로윈의 데뷔탕트 무도회장에 에반젤린이 등장한 건 몹시 뜻밖이었다.
그리고 에반젤린은 아무런 목적 없이 움직일 바보가 아니었다. 틀림없이 뭐가 있는 거다. 그게 뭘까…….
‘……에반젤린 곁에 붙어 있던 주술사……. 세이렌이라고 했던가? 원래 글로리아의 주술사였던 모양이지만, 에반젤린을 섬기게 된 후로는 에반젤린의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주는 것처럼 보였지.’
에반젤린이 여기까지 와서 무슨 수를 쓰고자 한다면 그 주술사의 힘을 빌렸을 게 분명했다. 한 90%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주술의 기운……. 혹시 느껴져? 좀 일어나 봐. 급한 상황이야.’
내 부름에 하품하며 깨어난 나비들의 목소리가 곧이어 들려왔다.
{으음……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
{에반젤린이 뭘 하고자 했다면 우리가 벌써 느꼈을 거야.}
{……하지만, 주술력을 정령력으로 덮어 버리면 우리는 알아차릴 수 없어. 어쩌면 그 방법을 썼을 수도…….}
‘그럼? 어떻게 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데?’
{마력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 주변에 마법사 없어?}
마법사……. 아르윈이 수도까지 함께 오긴 했지만, 무도회 같은 덴 안 간다며 타운 하우스에 처박혀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를 부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부를 수 있었다. 유사시에 쓰라며 그가 통신 마도구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백금 팔찌의 사파이어 장식을 엄지로 꾹 눌렀다. 이 팔찌가 바로 그 통신 마도구였다.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하고서, 마음속으로 아르윈을 불렀다.
‘아르윈, 내 목소리 들려요? 당장 무도회장으로 와 줘요.’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아르윈의 답신이 돌아왔다.
{예, 곧 가죠.}
이유도 안 묻고 바로 온다고 하는 게 아주 쿨하고 마음에 들었다.
한편, 에이프릴은 에반젤린의 주장에 또박또박 반박하고 있었다.
“수인 혐오자인 에반젤린 왕녀 전하께서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실 줄은 몰랐는데요.”
“……수인 혐오자라니, 그렇지 않아요. 나를 오해하고 있군요, 공녀.”
그리고 에반젤린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거짓말하는 중이었다.
“왕녀 전하, 얼마 후 열릴 대규모 노예 경매에 참석하실 예정이시죠?”
“뭐……. 그걸 네가 어떻게―.”
“저는 솔즈베리 가문의 사람으로서 노예 제도 아래에 고통받는 수인들을 최대한 구조할 의무가 있어요. 그렇기에 노예 경매에 대한 정보는 언제나 입수해 두는 편이죠.”
에이프릴이 던진 폭탄에 무도회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경악과 분노가 수인들 사이에 번져나갔고, 악의 어린 시선들이 에반젤린을 향해 화살처럼 꽂혔다.
“얼마 후에 열릴 대규모 노예 경매에 참석하실 분이, 수인 혐오자가 아니다……? 설득력 없는 주장이로군요, 왕녀 전하. 당신과는 전혀 접점이 없는 엘로윈의 데뷔탕트 무도회에 얼굴을 비치신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자리에 당신을 환영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것 같군요.”
“……너, 네가 감히…….”
“그러니 더는 소란 피우지 마시고 이만 퇴장하시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오늘만을 기다려온 소녀들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망치면, 큰 원한을 사게 되실 거랍니다.”
“……하! 이 되바라진 게, 아인스턴의 왕족인 나에게 감히……! 아인스턴의 혈통이 얼마나 특별하고 위대한지 네가 정녕 모르는 것이냐? 근본도 없는 계집애가―.”
“거기까지 하시죠, 언니.”
내 목소리가 파고들자 에반젤린이 우뚝 굳었다. 나는 에이프릴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아이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런 우리를 비호하듯 그레이안이 옆에 섰고, 나는 무표정하게 에반젤린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랑스러워하시는 아인스턴의 혈통, 여기도 하나 있는데요.”
“뭐……?”
“하지만 저는 언니와는 달라서 혈통을 내세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위협하는 짓 따윈 하지 않죠. 게다가 얼마나 ‘특별한지를’ 굳이 따지자면…….”
내 부름에 응답한 나비들이 영롱한 오팔 빛으로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대행자인 제가, 훨씬 더 특별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