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단란한 가정입니다
만인의 아이돌인 꽃사슴(?) 왕자님이 에이프릴에게 춤 신청을 하다니!
저러고 나란히 서 있으니까, 둘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내 눈이 오늘 호강하는구나…….’
얼빠인 나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
“아…….”
에이프릴은 망설이는 기색으로 외마디를 흘리더니, 조금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네, 그럼…….”
에이프릴의 손이 안드레아 왕자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에이프릴?”
부드럽게 에이프릴을 부른 그레이안이 아이의 작은 손을 꼭 그러쥐었다.
그의 얼굴엔 언제나처럼 자상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첫 춤은 이 아버지와 추기로 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아……!”
그제야 퍼뜩 생각난 듯, 에이프릴이 크게 탄식했다.
이내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빠르게 깜박이더니, 안드레아 왕자를 돌아보고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투로 양해를 구한다.
“죄송해요, 안드레아 왕자님……. 첫 춤은 아버지와 추기로 해서…….”
오, 방금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을 ‘아버지’라고 부른 건가?
아주 듣기 좋은 울림이었다. 앞으로도 우리를 ‘아버지’나 ‘어머니’로 자주 불러줬으면.
“아……. 나는 괜찮네. 그럼 두 번째 춤은 나와 추겠나?”
“네, 기꺼이.”
“그래, 고마워.”
안드레아 왕자가 생긋 웃으며 물러났다. 첫 번째 순서를 빼앗겼음에도 전혀 불쾌한 기색이 아닌 걸로 보아, 성격이 유순한 모양이었다.
‘얼굴과 잘 매치되는 성격이로군…….’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데? 우후후……. 이렇게 사위 후보가 늘어나는 건가? 역시 우리 에이프릴은 인기가 많아.
이윽고 무도회장에 춤곡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고,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손을 잡고 댄스 플로어로 나갔다.
사람들의 이목은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레이안은 키 차이가 한참 나는 에이프릴을 데리고도 능숙하게 스텝을 밟았다.
에이프릴도 실수하는 일 없이 완벽한 동작을 선보였고, 마침내 춤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갈채가 쏟아졌다.
“솔즈베리 공녀는 춤도 참 잘 추네요.”
“그러게요.”
“솔즈베리 공작이 딸을 무척 아낀다는 얘기가 사실인가 봐요.”
“저렇게 사랑스러운 딸이 있으니 오죽하겠어요? 나 같아도 싸고돌 것 같네요.”
“그러고 보니 솔즈베리 공녀는 아직 약혼자가 없죠?”
“네, 제가 알기론…….”
들려오는 말소리들에 입꼬리가 자꾸만 헤벌쭉 올라갔다.
‘저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고, 쟤가 바로 내 딸이다!’
여러분, 부럽습니까? 나는 부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긋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세우고 부채를 흔들었다. 아, 정말 기분 끝내준다.
“부인.”
“어머니……. 저 어땠어요?”
곧이어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고, 나는 날 ‘어머니’라고 부르는 에이프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하마터면 이성을 잃을 뻔했다.
‘아!! 꼭 껴안고 싶어 미치겠다!!’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참아야 했다.
이, 이따가 타운 하우스로 돌아가면…… 그때 꼭 안아 주도록 하자. 나는 짐짓 점잖은 체를 하며 에이프릴에게 대답했다.
“정말 너무 완전히 대단하고 아름답고 완벽해서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줄 알았단다.”
……말하고 난 뒤에야 깨달았다. 주접을 자제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에이프릴은 날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먼저 내 품에 쏙 안겨 오는 게 아닌가……!
‘으아아악―?!’
내 안에서 무언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여린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끌어안은 에이프릴이 얼굴을 치대며 말했다.
“감사해요, 어머니.”
“어, 어흠……! 뭐 이런 걸로 다…….”
애써 품위를 지키려 해 봤지만, 팔불출처럼 미소가 지어지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에이프릴의 귀여움은 진짜 불가항력이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에이프릴을 꼬오옥 마주 안고야 말았다.
그런 우리 둘을 그레이안이 두 팔로 한꺼번에 끌어안았고…… 그렇게 우리는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뜻밖의 가족 드라마를 찍었다.
좀 부끄러웠지만…… 우리 가족이 이렇게나 단란하다고 대대적으로 알리는 데 성공한 것 같아서, 한편으론 엄청 뿌듯했다.
.
이어서 에이프릴은 안드레아 왕자와도 춤을 췄다.
미래의 선남선녀가 댄스 플로어에 나오자 사람들은 무척 잘 어울린다며 칭찬을 연발해댔다.
에이프릴은 부드러운 미소를 연신 입가에 걸고 있었는데…… 비즈니스 미소 같기는 했다…….
반면 안드레아 왕자는, 비즈니스라기엔 에이프릴을 보는 눈이 매우 반짝거려서…….
진심으로 에이프릴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안드레아 왕자는 평판도 좋고, 착하고, 미소년이니까…….’
둘이 잘해보면 좋을 텐데……! 연애 눈치라곤 단 1g도 없는 에이프릴이 과연? 게다가 안드레아 왕자에겐 경쟁자도 있지.
‘제이드 녀석, 오늘 무도회에 에이프릴의 호위 기사 신분으로 참석했을 텐데…….’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무도회장을 살펴보던 나는, 마침 저만치서 로드리와 함께 우두커니 서 있는 제이드를 발견했다.
예상대로 제이드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신분을 밝히며 안드레아 왕자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랬다간 에이프릴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망치게 될 테니.’
사실, 원작의 제이드라면 그러고도 남았을 거다.
그렇지만 제이드도 나를 만나며 변화했다. 좋은 쪽으로 말이지.
‘흠, 다행히 로드리가 형 노릇을 잘하고 있군.’
로드리가 제이드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라 권하는 게 보였다.
제이드는 로드리가 건네준 레모네이드를 원샷하더니, 조금은 차분해진 안색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현실이 원작 소설과 같았더라면…… 절대 못 봤을 광경이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좀 지쳐서…… 쉬고 싶네요…….”
한편 에이프릴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춤 신청을 전부 거절하고 있었다.
그제야 에이프릴 쪽 상황을 파악한 나는 인상을 와락 구겼다.
‘아니, 이 신사적이지 못한 소년들 같으니라고.’
안드레아 왕자와 춤춘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춤 신청을 하고 난리야? 다들 센스가 없구만.
이럴 땐 말이지, 레모네이드 한 잔 건네면서 ‘레이디, 저쪽으로 가서 쉬시지요.’ 하면 호감도가 쑥 올라가는 거라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에이프릴 곁으로 다가갔다. 신사적이지 못한 소년들이 더는 에이프릴을 성가시게 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큼큼―.”
그런데 내가 막 헛기침한 순간이었다.
별안간 비틀거린 에이프릴이 나에게 몸을 기대 왔다. 내 품에 쏘옥 안긴 채 연약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린다.
허어…….
진짜 오늘 연기 대상 감이로구만.
나는 에이프릴에게 트로피를 건네는 상상을 하며 한 팔로 아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에이프릴에게 재차 다가오려던 자제들은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하며 물러났다. 내가 무섭니……? 나약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가만 보면, 나에게 되바라지게 구는 제이드가 오히려 더 강단이 있다니까?
“내 딸이 쉬고 싶어 하는 것 같으니, 춤 신청은 나중에 하시게. 그럼 이만.”
나는 쌀쌀맞은 투로 말한 뒤 에이프릴을 데리고 발코니로 향했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발코니 문을 닫고 커튼까지 치고 나자, 에이프릴이 한숨을 크게 쉬며 중얼거렸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사람들을 상대하는 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나 보다.
나는 에이프릴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이며 달래 주었다.
그런 내 품으로 에이프릴이 쏘옥 파고들어 왔다.
“공작 부인…….”
“또 공작 부인이야?”
“……어머니.”
“좀 더 짧게!”
“어, 엄마―.”
“옳지~!”
나는 희희낙락 웃으며 에이프릴을 꼬옥 끌어안았다. 부끄러운 듯이 뺨을 발그레 붉힌 에이프릴은 너무나 귀여웠다.
달칵―
“아……. 역시 여기 있었군.”
그때, 발코니 문이 열리더니 그레이안이 나타났다.
그의 한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샴페인 두 잔과 레모네이드 한 잔이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마실 것을 좀 가져왔습니다, 숙녀분들.”
그가 웨이터 흉내를 내며 우리에게 다가와 샴페인과 레모네이드를 건네주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샴페인 잔을 받아들었다. 레모네이드는 에이프릴의 몫이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공…… 아니, 아빠…….”
에이프릴의 ‘아빠’ 소리에 그레이안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얼마간 뻣뻣이 굳어 있던 그는 이윽고 벤치에 쟁반을 내려놓더니, 에이프릴을 와락 끌어안았다.
“공작……! 아니, 아, 아빠……. 저 레모네이드 흘려요!”
에이프릴은 레모네이드 잔을 손에 쥔 채 중심을 잡으려 애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에이프릴의 손에서 레모네이드 잔을 슬쩍 빼앗아 왔다.
에이프릴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어색한 동작으로 그레이안을 마주 안았다.
늦겨울의 쌀쌀한 바람이 체온을 앗아가는데도, 마음은 난롯가에 있는 듯 포근하고 따뜻했다.
‘둘 다 참 귀엽다니까.’
나는 샴페인을 홀짝이며 속으로 잔잔한 웃음을 흘렸다.
* * *
‘어느 발코니로 간 거지?’
여자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람이 하도 많아 그들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여자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짓씹으며 불쾌한 기분을 대놓고 드러냈다.
근처의 사람들이 여자를 힐끗거렸으나, 나비 모양의 반가면이 여자의 얼굴을 가린 탓에 그녀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은데…….’
세이렌의 도움을 받기는 했으나 궁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최근 들어 감시가 심해진 부왕도 문제였고, 툭하면 흠을 잡으려 드는 형제들에게 틈을 보여서도 안 됐다.
‘빌어먹을 글로리아,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가면을 쓴 여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었다. 그녀는 오늘 신분을 감춘 채 이 무도회에 몰래 참석했다.
원래라면 거들떠도 안 봤을 수인들의 무도회 따위에 에반젤린이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글로리아를 저주하는 데 필요한 의식을 몰래 행하기 위해서.
‘저주를 걸기 위한 준비는 거의 다 마쳤습니다만……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에반젤린 님께서 직접 글로리아 왕녀에게 주술의 낙인을 새기셔야 합니다…….’
그 낙인이 새겨져 있어야만 대상을 향한 저주를 발동할 수 있다고, 세이렌은 말했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안 되고 에반젤린이 직접 새겨야 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여기까지 와야 했던 것이다.
‘잠깐 스치기만 하면 충분할 텐데…….’
에반젤린은 주술이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이 반지의 인장을 글로리아에게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된다. ‘맨살에’ 가져다 대야 한다는 게 문제였으나, 마침 옷차림이 가벼운 무도회장이라 어렵지 않을 듯싶었다.
에반젤린은 반지의 인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는 문양. 이 낙인은 세계수의 나비들이 알아차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했다.
사실, 조금 의외였다. 세이렌의 능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날 줄은 몰랐는데…….
‘끽해야 세계수의 성령들을 잠깐 속이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는데…… 완전히 속일 수 있고, 들킬 걱정도 없다니.’
에반젤린의 입가에 비열한 웃음이 맺혔다. 만족스럽게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재차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드디어.’
막 발코니에서 빠져나오는 가족의 모습이 시야로 잡혔다.
솔즈베리 공작과 그 딸인 공녀 사이에서 글로리아는 무척이나 행복한 듯 웃고 있었다.
그 장면을 목격한 순간, 마음속의 무언가가 크게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