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엘로윈 왕국의 수도, 아발론
“에이프릴, 데뷔탕트 무도회 기대되지 않아?”
“끼앵~.”
방금 ‘딱히~.’라고 한 것 같은데.
“……인생에 단 한 번뿐인 데뷔 무도회잖아! 기대되지 않아?!”
“꺄웅잇.”
방금은 나를 조금 귀찮아하는 투였다. 그래, 책 읽는 데 방해하지 말라, 이거지?
“또 무슨 책을 읽는데 그래?”
토끼 앞발이 쥐고 있는 책의 표지를 슬쩍 들춰 확인해 봤다.
《사회복지행정론》……. 이번에도 엄청난 걸 읽는구만.
‘대체 뭐가 되려고……. 진짜로 임금님이 꿈인가?’
나는 수상한 토끼를 가자미눈으로 흘겨보았다. 토끼는 책에 집중하느라 내 눈초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토끼야…….”
“…….”
“우리 토끼가 커서 뭐가 되고 싶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사교 생활도 중요하단다?”
그러자 토끼는 책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더니 “키훙.” 하고 작게 코웃음 쳤다.
‘이 토끼 녀석이……! 내 진심 어린 조언을 비웃다니!’
“끼얏꺄웅.”
방금 그 대답은 ‘나도 알아.’라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 잠깐만. 나 어느새 토끼어(?)를 저절로 통역하고 있잖아?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토끼 집사…… 몇 개월이지? 아무튼 토끼 집사 좀 하면 토끼어 번역이 되는 건가!’
토끼어가 번역이 되고 의사소통도 된다고!
어느새 올라간 내 능력치에 감탄하며, 토끼에게 계속 말을 걸어 보았다. 과연 내가 토끼어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토끼야, 그 책 재밌어?”
“끼애웅.”
“별로라고?”
“웅꺗.”
“가끔은 소설 같은 것도 읽지그래? 안나가 추천해 준 로맨스 소설 재밌던데.”
“끼웅잇.”
“취향 아니라고?”
“웅꺄웅.”
방금 완벽하게 의사소통이 됐다……!
“토끼야……!!”
“끄앵!!”
나는 감격에 겨워 토끼를 와락 끌어안았다. 독서를 방해한 죄로 토끼님께 된통 혼나고 말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아~. 나도 독서나 해야겠다. 소설 읽어야지.”
희희낙락 웃으며 소설을 몇 권 골라 오자니, 토끼가 흘긋 보고는 또 코웃음을 쳤다. 토끼야……. 너 지금 취향 존중 안 하는 거니? 그러는 거 아니다.
‘저쪽 세계에 있을 땐 웹소설 읽기가 내 소중한 취미이자 인생의 낙이었는데…….’
웹소설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재미있는 웹소설을 읽지 못하면 너무너무 심심하고 인생이 곧잘 지루해졌다.
사실 웹소설을 접하기 전부터, 영미 판타지 소설, SF 소설, 영화, 드라마, 웹툰, 등등……. ‘이야기’를 담은 온갖 콘텐츠를 집착적으로 즐겨왔던 것 같기도.
그러다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SNS로 알게 되었을 땐, 얼마나 즐거웠던지. 새벽까지 웹소설 해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더랬다.
‘사람은 참…… 이야기가 없으면 못 사는 동물 같아.’
이 세계에 와서도 이렇게 소설을 읽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머지않아 새로운 이야기 속에 푹 빠져들었다. 토끼가 관심을 보이며 슬쩍 훔쳐본다는 것도 뒤늦게 알아차릴 정도로.
* * *
3월 12일, 이른 아침.
엘로윈 왕국의 수도 ‘아발론’으로 향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 안에는 나와 그레이안, 에이프릴, 그리고 로드리와 제이드, 마지막으로 안나와 아르윈이 타고 있었다.
9~11명 정도 수용 가능한 커다란 여행용 마차라서 전혀 좁다는 느낌이 안 들었다. 총 7명의 사람이 타고 있는데도 넓고 쾌적했다.
이런 대형 마차를 타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조금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에이프릴, 그 배낭 안에 뭐 들었어요?”
“끼얏웅.”
“오……. 혹시 직접 만든 거예요?”
“끼앵.”
에이프릴만 보면 말을 걸기 바쁜 제이드가 오늘도 열심이었다.
제이드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에이프릴은 언제나 담백한 태도였지만…….
‘근데 저 배낭은 진짜 뭐지……?’
어김없이 토끼 모습인 에이프릴은 조그만 배낭을 등에 메고 있었는데, 뭐가 들었는지는 몰라도 풍선처럼 빵빵했다.
‘높은 확률로 간식일 것 같긴 한데…….’
“그럼 출발합니다.”
늘 그렇듯 무심하게 툭 던진 아르윈이 곧이어 이동 마법을 시전했고, 일행은 수도 아발론 근처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발론 성내로 바로 대규모 순간 이동을 하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이렇듯 교외에서부터 아발론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와, 저 멀리 세계수가 보인다.’
아발론은 성지 히페리온 북쪽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기에 멀리서나마 세계수를 볼 수 있었다.
참고로 솔즈베리 공작령에서는 세계수가 안 보인다.
{우리의 고향…….}
{그립읍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팔랑거리며 나타난 나비들이 망향을 토로했다.
말투는 또 어디서 주워들은 듯한 인터넷 말투다. 나는 짐짓 도끼눈을 뜨며 나비들에게 경고를 주었다.
‘야, 조심 좀 해. 너희 하는 말 에이프릴도 들을 수 있다고.’
{아 맞다.}
{깜박했음.}
{큰일 날 뻔…….}
마침 토끼가 귀를 쫑긋거리고 있었다. 보나 마나, 엿듣기 모드가 활성화 중인 거다. 얌체 토끼 같으니라고.
{토끼야, 배낭 안에 뭐 들었니?}
{먹는 건가?}
{아 심심해.}
나비들은 에이프릴 근처를 날아다니며 마치 날파리처럼 토끼를 귀찮게 했다.
그러다 성질난 토끼의 앞발에 후려쳐지고는 엉엉 울면서 내게로 날아왔다.
{흐어엉 앞발에 맞았어~.}
{토끼 너무해.}
{포악한 토끼!}
뭐래, 맞을 만했지.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애 신경을 건드려?
나비들은 울며 칭얼거리다가 어느새 잠잠해지더니 모습을 감추었고, 마차는 아발론을 향해 착실히 이동하고 있었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바깥 풍경을 만끽하기도 잠시.
바스락, 바스락.
“……?”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싶어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배낭에서 뭔가를 꺼내는 토끼의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토끼가 꺼낸 것은 종이로 포장된…… 샌드위치 같았다. 아마도.
‘역시 간식을 들고 온 거였구만.’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면서 간식을 까먹는 애는 우리 토끼밖에 없을 거야…….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토끼를 지켜보았다.
뭉툭한 앞발로도 능숙하게 포장지를 벗기더니, 모서리가 드러난 삼각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는 토끼의 모습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였다.
‘그래, 먹고 싶은 거 다 먹어라.’
행복하다면 OK입니다.
.
약 30분 후, 우리 일행은 수도 아발론에 도착했다.
나는 아발론에 처음 와 보는 것이었기에, 창밖을 내다보며 구경하기 바빴다.
“와…….”
엘로윈에서 제일가는 도시의 풍경은 저절로 감탄이 나오게 했다.
물론 피오렌 공작령의 아란사가 더 화려하긴 하지만, 아발론은 뭐랄까……. 절제미와 숭고함이 느껴졌다. 한 나라의 수도로서 갖춘 기품이라고나 할까?
‘역시 수도는 이래야 제맛이지.’
뭔가 내가 하던 RPG 게임도 생각나고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렇게나 부유하다’라고 광고하는 듯한 아인스턴의 수도 웨일스보다는 여기가 더 내 취향이었다.
“꺄웅~!”
마차가 파티세리 앞을 지나쳐 가자 토끼가 폴짝 뛰며 소리쳤다. 샌드위치를 두 조각이나 먹고도 여전히 식탐이 들다니 대단한 토끼다.
“끼아앙……!”
“나중에, 나중에 가자, 토끼야.”
“꺄웅잇……!!”
“제발 진정해……!”
당장이라도 마차에서 뛰어내려 파티세리로 달려가고 싶어 하는 토끼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솔즈베리 공작가의 타운 하우스에 도착해 있었다.
‘와, 생각보다 크네.’
토끼를 품에 안고 마차에서 내리며 타운 하우스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저택은 본관 하나, 별채 하나, 이렇게 둘로 구성되어 있었고, 분수대가 있는 넓은 정원을 갖추고 있었다.
‘타운 하우스인데 이렇게 근사한 정원도 있다니…….’
보통 타운 하우스라 하면 대로와 출입문이 바로 맞닿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솔즈베리 공작가라 그런지 타운 하우스도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럼 일단 저택 구경부터 하고…… 그다음에 아발론을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레이안이 넌지시 건네온 제안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집 구경부터 하는 게 정석이지.
.
그렇게 되어 나는 그레이안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그가 직접 안내해 줄 줄은 몰랐는데, 이렇게 함께 다니니 데이트하는 기분도 들었다.
물론 토끼가 내 품에 쏙 안겨 있었기에 가족 나들이라 봐야 할 테지만…….
“끄우웅…….”
“그래, 그래. 이제 그 파티세리 가자.”
저택 구경을 마친 후, 나지막이 불만을 표하는 토끼를 달래며 정원으로 나왔다.
정원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는 우리가 타고 온 커다란 여행용 마차가 아니라, 가볍게 외출하기 적당한 크기의 마차였다.
마침 제이드와 로드리도 어슬렁거리고 있었기에 녀석들도 나들이 멤버로 끼워 주기로 했다.
너희도 같이 가자, 라고 말하기 무섭게 제이드의 얼굴이 밝아지는 걸 보면, 역시 애는 애다. 아무리 애늙은이 같아도 말이지.
“에이프릴은 아발론에 와본 적 있댔지?”
“웅꺗.”
“저도 와본 적 있어요.”
“어, 너도?”
제이드도 아발론에 와본 적이 있다니, 뜻밖……은 아닌가? 가출한 후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을 테니.
‘로드리는 처음이겠지?’
가만히 앉아 말이 없는 걸 보니 처음이 분명했다. 로드리는 구태여 ‘저는 처음이에요.’ 하고 부연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발론에서 지내는 동안 로드리에게도 좋은 추억 많이 만들어 줘야지.’
나는 손을 뻗어 로드리의 붉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늘 그렇듯 솜사탕 같은 감촉이었다.
.
“꺄앙~!”
파티세리에 도착하자 신이 난 토끼가 폴짝 뛰었다.
토끼는 내 품에 안긴 채 간식거리를 골랐는데, 토끼 앞발로 척 가리키면 제이드가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그 간식을 쟁반에 담았다. 단 한 번도 잘못 담거나 하는 일 없이.
그야말로 훌륭한 에이프릴 발닦개였다…….
“에이프릴, 그거 맛있니?”
“웅꺄앙.”
“행복하니?”
“꺄앙.”
파티세리의 2층 테라스. 하얀색의 원형 테이블 위에 가득한 간식거리를 하나씩 열심히 공략하는 토끼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나 좋아하니…… 앞으로도 아발론에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말이다.
“얘들아, 너희도 좀 먹어.”
내 옆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는 그레이안에게 타르트를 먹여 주고서, 로드리와 제이드를 향해 넌지시 권유했다.
로드리는 설핏 웃더니 괜찮다고 대답했고, 제이드는…….
“전…… 에이프릴이 먹는 거만 봐도 배가 불러요.”
헛소리를 했다…….
황당함에 절로 실소를 흘린 나는 제이드의 앞접시를 가져다가 디저트를 이것저것 덜어주었다.
그게 몹시 뜻밖이었는지 제이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짐짓 무심한 체하며 툭 말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너도 먹어라.”
그러고서 로드리의 몫도 챙겨 줬다. 로드리는 정말 괜찮다며 계속 사양했지만, 내 강요에 못 이겨 케이크를 한 입 먹고는 뺨이 발그레해졌다.
괜찮기는 무슨, 잘 먹으면서.
.
파티세리에서 간식을 배불리 먹고 나온 후, 우리는 아발론의 번화가를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겼다.
거리는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는데, 인간 모습일 때도 동물의 특징이 드러나는 수인들이 많이 보였다.
예를 들면 귀나 꼬리를 내놓고 다닌다든가, 피부에 비늘이 돋아 있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그에 더해, 에이프릴처럼 아예 동물 모습으로 다니는 수인들도 종종 보였고 말이다.
“꺄아앙!”
에이프릴은 오늘 들른 곳 중 3층짜리 대형 서점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이 서점에서 에이프릴은 책을 무려 20권이나 샀다.
이번에는 친히 사람 모습을 하시고 책을 고르셨는데, 계산을 끝내자마자 토끼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에이프릴은 책을 참 좋아하는구나…….”
“웅꺗.”
책을 20권이나 사고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서점을 응시하며 에이프릴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이 도시를 떠나기 전, 저 서점을 다시 한번 더 들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다음 날인 13일.
대망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왕궁에서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