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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98화 (98/144)

##  98화. 물밑의 흐름

결론부터 말하자면, 비앙카는 에이프릴을 너무너무 좋아했다. 완전히 쏙 빠져 버렸다.

“세상에! 어쩜! 너무 귀여워~!!”

“끄웅…….”

에이프릴을 보자마자 너무 귀엽다며 감탄사를 연발하더니, 앞발도 슬쩍 잡아 보고, 머리도 살살 쓰다듬어 보고, 껴안아― 보려고도 했지만 에이프릴이 거부했다.

에이프릴은 비앙카를 부담스러워하는 게 훤히 보였는데, 싫어서라기보단 낯선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았다.

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저렇게나 열렬한 눈빛을 보내면 누구나 다 그럴 테지…….

“에이프릴, 이거 먹을래? 되게 맛있다?”

비앙카가 에이프릴에게 간식거리를 건넸다. 그게 또 에이프릴이 가장 좋아하는 딸기잼 쿠키였다.

에이프릴은 눈만 굴려 비앙카를 흘긋 보고는, 비앙카의 손에서 딸기잼 쿠키를 냉큼 빼앗아 왔다.

그러고는 멀찍이 도망쳐서는, 비앙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며 쿠키를 갉아먹는 모습이 제법 앙칼지다.

“아~ 너무 귀여워!”

그러거나 말거나, 비앙카는 에이프릴을 귀여워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에이프릴이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토끼를 보는 비앙카의 눈은 초롱초롱 반짝였다.

“글로리아가 정말 부러워요! 이렇게나 귀여운 딸이 있다니……! 저도 어서 아이를 갖고 싶지만…….”

상기된 어조로 말하던 비앙카의 목소리가 별안간 착 가라앉았다.

왜 그럴까 싶어 물끄러미 비앙카를 바라보자, 그녀가 어딘지 쓸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날 마주 보았다.

“아시다시피 저는 몸이 약해서…… 남편이 계속 반대하는 중이에요.”

“아…….”

“그래서 입양도 생각해 봤는데, 그건 또 시어머니가 반대하시더라고요……!”

“아…….”

아까와는 다른 뉘앙스의 “아…….”였다. 비앙카는 내가 무슨 친정 식구라도 되는 양 시댁 욕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고지식한 분들이세요. 혈통이 다 뭐라고……. 그치만 전 몸이 약한 게 늘 눈치 보여서, 뭐라 반박도 잘 못 해요. 에휴…….”

한숨을 포옥 내쉰 비앙카가 에이프릴을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피할 줄 알았던 에이프릴은 뜻밖에도 비앙카의 쓰다듬을 받으며 가만히 있었다.

게다가 비앙카를 보는 눈도, 아까보단 훨씬 누그러져 있었고.

‘와, 무슨 일이지?’

물론 비앙카에게 적극적으로 치대거나 하진 않지만…… 앙칼지게 굴지 않는 것만으로도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잘은 몰라도 비앙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호감을 갖게 되었나 보다. ……아, 혹시 입양 얘기 때문인가?

‘흠……. 역시 그럴 확률이 높지?’

에이프릴도 솔즈베리 공작가에 입양된 아이라서…… 비앙카의 사연이 남 얘기 같지 않았나 보다.

“헉……. 에이프릴, 이젠 내가 만져도 가만히 있네? 계, 계속 만져도 돼?”

“……웅꺗.”

“꺄악~! 너무 귀여워! 사랑스러워!!”

비앙카가 참지 못하고 꼭 끌어안으려 하자, 어김없이 캬앙거리며 거부했지만 말이다.

.

비앙카와 산책도 하고, 후원의 온실도 구경시켜 주고, 그러다 보니 하루가 훌쩍 지났다.

어느덧 떠날 때가 된 비앙카는 마차 앞에서 머뭇거리며 아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 나보단 에이프릴과 헤어지는 게 더 아쉬운 기색이다. 우리 토끼는 누구에게나 인기가 많구만…….

“다음번에는 제가 피오렌 공작성에 초대할 테니, 꼭 놀러 와요! 에이프릴도 같이……!”

“네, 그럴게요.”

“웅꺄앙.”

내 품에 쏙 안겨 있는 토끼를 보며 비앙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두 손을 꼭 모아 쥐며 간절하게 부탁해 왔다.

“저, 저기……. 에이프릴, 떠나기 전에 한 번만 안아보면 안 될까?”

“…….”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비앙카를 노려보는 토끼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이러다 토끼가 비앙카에게 앞발을 휘두르면 어쩌나 싶어 긴장한 채 예의주시하는데…….

“엇…….”

뜻밖에도 토끼가 비앙카를 향해 앞발을 쭉 뻗는 게 아닌가?

이건 누가 봐도 ‘그래, 어디 안아 봐라.’ 하는 몸짓이었다!

“고, 고마워……!”

비앙카는 무척 감격한 듯, 눈물까지 글썽이고는(……) 두 손을 뻗어 토끼를 안아 올렸다.

그것도 매우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말이다.

“흐읍……. 진짜 말랑말랑해…….”

토끼의 말랑함에 감동한 것이 틀림없는 비앙카가 꿈을 다 이룬 듯한 표정으로 토끼를 연신 쓰다듬었다.

토끼는 불쾌한 듯 세모꼴 눈이었지만, 비앙카에게 패악을 부리진 않았다. 잘 참는구나, 우리 토끼…….

“그럼,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또 봐, 에이프릴!”

그렇게 소원을 이룬 비앙카는 몹시 흡족한 얼굴로 솔즈베리 성을 떠났다.

토끼는 심통이 나 있었지만.

* * *

2월 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인스턴 국왕이 사진기에 대해서 수입, 판매 금지를 때린 것이다.

‘빌어먹을 라니에로 왕! 완전히 쫌생이 같은 놈!’

라니에로 왕이 그런 조치를 취한 이유야 뻔하다. 솔즈베리 공작가에서 마정석 운반 경로를 막아 버린 것에 대한 보복이겠지.

나는 무척 분개했으나, 이 일로 너무 화를 내면 그레이안이 나에게 미안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제 와서 금지해 봤자 내 사업엔 아무런 타격도 없어요. 어차피 사진기로 벌 돈은 이미 다 벌었거든요.”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사진기 판매로 예상했던 것 이상의 수익을 거두어들였기에, 이제 와서 라니에로 왕이 금지한다 한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아인스턴의 마도공학자들이 사진기의 구조를 파악해 ‘짝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걸 막으려면 특허를 내는 것뿐인데, 엘로윈에서는 이미 특허권을 취득했지만 아인스턴이 문제였다…….

‘라니에로 왕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

내가 사진기에 대한 특허권을 취득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도 남을 위인이다, 그 작자는.

‘아아악, 짜증 나!’

분노를 식힐 겸 냉차를 꿀꺽꿀꺽 들이켜는데, 내 눈치를 보는 그레이안의 시선이 느껴졌다.

차갑고 달콤한 꿀 홍차를 마시고 애써 진정한 나는 그레이안을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척.

“부인, 제가 내린 결정 때문에…….”

“아니에요!!”

그레이안이 본격적으로 땅을 파기 전에 나는 재빨리 부정하고 나섰다.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좌우로 격하게 가로저었다.

“진짜 아니에요. 그거 때문이 아니라 라니에로 왕은 원래 비열하고 졸렬해서 언젠간 사진기를 금지했을 거였어요. 그전에 잔뜩 벌어두었으니 다행이죠. 진짜 괜찮아요.”

“…….”

나는 그레이안의 옆으로 냉큼 옮겨가 그의 어깨를 토닥여 주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그레이안은 얌전히 쓰다듬을 받으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는데, 그 눈빛이…… 뭐랄까,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고 싶어지는……? 그런 종류의 눈빛이었다.

“앗…….”

곧이어 그레이안이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내 손을 잡고는 손가락, 손등, 그리고 손목 안쪽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움찔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틀림없이 붉어져 있을 것이었다. 잘 익은 토마토처럼 말이지.

“제 결정이 이번 일에 아무런 영향도 없진 않았을 테지요. 그래서……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속눈썹을 살짝 내리깐 그레이안이 내 손을 슬며시 놓으려 했다.

나는 그 손을 후다닥 붙잡아 끌어당기며 그의 말을 재차 부정했다.

“아니, 진짜 괜찮다니까요? 이 일로 괜히 나한테 미안해하고 시무룩해하면 나 화낼 거예요? 부부는 우, 운명공동체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려니 나도 모르게 말을 버벅거렸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그레이안은 이내 설핏 웃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너그러우십니다, 부인.”

“아니― 뭐, 당연한 거…….”

“그래도 제 마음이 편치 않으니, 제게 원하는 게 있으시거든 뭐든 시키십시오. 바닥에 엎드려 짖으라 하면 짖겠습니다.”

“그럼 늑대 모습 10분만…….”

“네, 10분이라면 괜찮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변신해 있는 건 저주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렇지만 늑대의 자아가 강해져 개처럼 행동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한다고…….

‘……오히려 좋아.’

나는 보송보송한 털을 지닌 늑대가 된 그레이안을 꼭 끌어안아 보기도 하고, 마구 쓰다듬어 보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늑대 그레이안은 내가 앉으라 하면 앉고, 손을 달라고 하면 냉큼 줬다.

그리고 내 얼굴을 핥으며 꼬리를 붕붕 흔들거나 왕! 짖기도 했다.

그러다 10분이 다 되어 그레이안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나는 못내 아쉬워하며 탄식을 흘렸다.

“부인은…… 제가 늑대 모습일 때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

뜨끔한 나는 그레이안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할 따름이었다.

‘그, 그건…… 나는 동물을 좋아하니까…… 인간보다 동물이 더 귀여운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럼, 부인.”

“……!”

별안간 그레이안이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씩 웃는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았다.

사람을 쉬이 홀리는 은회색 눈이, 위험하게 반짝이는 것도.

“이제부터는 사람 모습인 저와도 놀아주셔야지요?”

“어……. 그…….”

몸을 뒤로 빼보았으나, 등이 소파 쿠션에 가로막혀 더는 도망칠 데가 없었다.

천천히 고개를 숙인 그레이안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여기서부터는 19세 관람가였다.

* * *

글로리아 왕녀가 발명한 마도구, 이른바 ‘사진기’의 수입 및 판매 금지가 내려지자, 아인스턴의 상인 조합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사진기를 수입해 파는 중간 이익이 쏠쏠했기 때문이었다.

상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라니에로 왕은 금지를 강행했고, 직접적으로 불만을 터뜨린 몇몇 상인은 사상 불순으로 잡혀가기까지 했다.

이 사건으로 아인스턴 왕국 내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뒤숭숭해졌다.

라니에로 왕의 통치에 불만을 갖는 자들이 상인 조합을 필두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그렇지 않아도 왕에게 부정적이던 자들이 그 세력을 뒷받침하였다.

그중 대다수가 거대 상단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한 귀족들로, 그중에는 아인스턴 왕가의 자금줄도 있었다.

그들은 아인스턴 왕가의 사치와 폐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들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두고 봐야만 합니까?”

“라니에로 왕은 아직 건재하고, 몇십 년 뒤 그의 적자 중 한 명이 왕위를 잇게 되더라도 지금 같은 폭정이 계속될 거요.”

“왕자와 왕녀들도 왕을 닮아 전부 개차반이니…….”

“저희 쪽에서 조금씩 자금줄을 끊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가 뭉치면 왕가에도 타격이 클 겁니다.”

“우리 중에 배신자가 나오지만 않는다면, 실효성 있는 계획이긴 하오.”

“차라리 각서를 쓰죠. 왜, 목숨을 걸고 써야 하는 각서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마법은 금지된 지 오래입니다만……. 필요하다면 제가 조달해 올 수 있습니다.”

“……그 각서만 쓰면, 우리 중에 배신자가 나올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로군.”

“그렇지요.”

“그럼, 칼윈 공작.”

늦은 밤, 등잔불이 희미하게 비추고 있을 뿐인 어두운 회의실.

타원형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 모두가 ‘칼윈 공작’이라 불린 남자를 일시에 주목했다.

루벨라이트 칼윈은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매력적인 얼굴로 싱긋 웃으며 여유를 뽐냈다.

“네, 말씀하시죠.”

“칼윈 공께서 그 맹약의 각서를 구해다 주시오. 다음 회의가 있는 목요일 자정까지.”

“물론 그래야죠, 그리고…….”

끼익,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난 칼윈 공작이 회의실 안의 사람들을 쓱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아인스턴 왕국의 큰손이었으며 왕가의 자금줄이었다.

뭉치기만 한다면, 왕가에 대항할 만큼 큰 힘을 낼 수 있는 자들.

그런 그들을 향해, 칼윈 공작은 여유롭지만 단호함을 잃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는 여러분이 배신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어차피 누가 배신하든, 라니에로 왕은 그 배신자의 목도 칠 위인임을 잊지 마십시오.”

* * *

요즈음 제이드가 영 수상하다.

불러도 멍하니 있는 경우가 많고, 기사 훈련에서도 실수가 잦다고 하는데…….

‘혹시 걔 아버지인 칼윈 공작에게 위치를 들킨 건가…….’

조만간 얘기를 좀 해 봐야겠는데, 요새 너무 바빠서 틈이 안 나니 원.

‘오늘이 벌써 3월 11일이라니!’

으아아아 너무 바빠!! 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이제 이틀 후면…… 엘로윈 왕국의 수도, 아발론에서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린다!

그렇다!

에이프릴의 사교계 데뷔가,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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