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첫 사냥
마수의 서식지는 다양하지만, 솔즈베리 성 인근에 출몰하는 마수들은 기사단이 주기적으로 소탕하기 때문에 지금은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은 조금 멀리, 북쪽 산 근처로 가야 했다.
굶주린 마수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와 야생 동물을 해치는 일이 곧잘 있기 때문이었다.
‘북쪽 산’이라 하면 일견 두루뭉술하지만, 일반적으로 ‘이카로스 산’을 일컫는다.
솔즈베리 공작령 북쪽에는 산이 많은데, 그중 이카로스 산이 가장 크고 높으며 공작성과도 가까웠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내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말거라. 마수를 발견하더라도 혼자 무턱대고 쫓아가거나 하면 안 된다.”
“네, 명심할게요.”
두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이카로스 산 근처의 숲과 평야를 수색하던 중, 어디선가 야생 동물이 겁에 질려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움찔한 에이프릴이 고개를 돌려 그레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레이안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눈으로 매섭게 쫓고 있었다. 곧이어 에이프릴을 돌아본 그가 침착하게 지시했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 오거라.”
“네……!”
그레이안이 말의 속도를 높여 달려나갔고 에이프릴이 그 뒤를 따라갔다.
공포에 질린 야생 동물의 울음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등의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든 그레이안이 기마 자세 그대로 활시위를 당겼다.
평야에서 난동을 피우는 마수의 모습이 이윽고 시야로 들어왔다.
그 마수는 사자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꼬리 대신 뱀이 달려 있었고 등에는 박쥐 날개가 돋아 있었다.
칼라굴라. 에이프릴은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마수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칼라굴라는 막 붙잡은 새끼 사슴을 앞발로 누르고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이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퉁!
바로 그때, 그레이안이 활시위를 놓았다. 힘껏 쏘아진 화살이 공기를 가르고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푹!
“깨애액―!”
그리고 칼라굴라의 한쪽 눈에 정확히 명중했다.
눈에 화살이 박힌 칼라굴라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날뛰었다.
바로 그 틈을 타, 힘겹게 몸을 일으킨 새끼 사슴이 네 다리를 비틀비틀 움직여 어디론가 달려갔다.
에이프릴은 새끼 사슴이 도망친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 암사슴 한 마리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게 보였다. 새끼 사슴의 어미인 것 같았다.
‘다행이다…….’
새끼 사슴이 어미의 품에 무사히 돌아간 것을 보고 에이프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재빨리 마수 사냥에 집중했다.
화살대를 부러뜨린 칼라굴라가 이쪽을 향해 포효하며 발톱을 세운 앞발로 땅을 북북 긁어댔다. 공격의 조짐이 분명했다.
“공작님……!”
“괜찮다, 걱정 말거라.”
긴장한 에이프릴과는 달리 그레이안은 여유만만해 보였다. 칼라굴라가 그를 향해 달려든 순간, 그는 다시 한번 더 화살을 쏘았다.
푹―!
“끄애애액―!”
화살은 칼라굴라의 다른 쪽 눈도 마저 꿰뚫었다.
쿵!
칼라굴라의 육중한 몸뚱이가 그레이안의 바로 앞에 고꾸라졌다.
하마터면 그레이안이 저 날카로운 발톱에 당했을지도 모르는 아슬아슬한 찰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레이안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평온한 얼굴로 말에서 내려와 검을 뽑아 들었다.
숨을 쌕쌕 몰아쉬는 칼라굴라를 목전에서 쓱 훑어보며 그가 무심히 말했다.
“지금 이 녀석은 두 눈만 멀었을 뿐, 사지는 멀쩡하지. 그런데도 반격하기보단 이렇게 바닥에 늘어져 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에이프릴은 기억을 더듬어 칼라굴라에 대한 정보를 생각해 내려 애썼다.
‘강한 완력을 지녔고, 턱 힘이 매우 세며, 민첩하고…… 싸움을 잘하며 공격적이나, 저보다 강한 상대가 나타났을 시에는 빠르게 항복한다…….’
“……포기한 거 아닐까요? 공작님에게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죠…….”
그러자 싱긋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정답이다.” 하고 대꾸하고는 한 손으로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에이프릴이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졌고, 그레이안은 옆으로 비켜서며 에이프릴에게 제안했다.
“네가 끝내 보겠느냐?”
“네? 제가요……?”
무척 뜻밖이었기에 에이프릴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문했다.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어깨를 격려하듯 가볍게 토닥였다. 그의 말이 차분하게 이어졌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네가 아직 각오가 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아도 된다.”
“…….”
에이프릴은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았다. 죽음을 기다리는 마수가 쌕쌕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마수는 다른 생명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이기에 척결해야 할 대상이라고 배웠다.
그렇지만…… 마수라고 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프릴은 화살이 박힌 채 피를 흘리는 칼라굴라의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마수는 저 상처로 인한 고통을 어서 끝내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제가…….”
에이프릴이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로드리가 준 붉은 매듭 장식이 손잡이 끝에 매달려 흔들거렸고, 찌르기 자세로 검을 고쳐 쥔 에이프릴은 긴장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할게요.”
그레이안은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섰다.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르기에, 그는 칼라굴라에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에이프릴의 검 끝이 칼라굴라를 겨누었다. 천천히 심호흡한 에이프릴은 이내 각오한 듯이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푹―!
날카로운 검이 칼라굴라의 심장을 단번에 꿰뚫었다.
그대로 절명한 칼라굴라가 호흡을 멈췄다.
에이프릴은 검을 쥔 두 손에 힘을 풀며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손끝에서 생명이 꺼지는 감각.
그건 매우 낯설고, 또 두려운 기분이 들게 했다. 기이한 죄의식도 함께였다.
“…….”
에이프릴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온 그레이안이 소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옷자락 너머로 스며드는 그 온기에 에이프릴은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이번에는 네가 생명을 빼앗은 대상이 마수이지만…….”
“…….”
“네가 정말로 타인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자 한다면, 네 손에 생명을 잃는 상대는 너처럼 걷고, 너처럼 말하고, 너처럼 생각하는 같은 인간일 테지.”
에이프릴은 떨리는 눈빛으로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위대한 솔즈베리 공작인 에이프릴의 양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인자하고 강인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친 기색이라는 것을, 에이프릴은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을 각오로 싸운다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일임을.”
“…….”
숨을 거둔 칼라굴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이프릴이 다시 검을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힘껏 뽑아냈다. 은빛 검신에는 선명한 붉은 생명이 묻어 있었다.
그 장면은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터였다.
.
“공작님께서도…… 다른 생명을 해치는 일에 괴로우셨던 적이 있나요?”
사냥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는 길.
그레이안의 품에 안긴 채 에이프릴이 물었다.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말에 타고 있었으며, 에이프릴의 말은 뒤에서 터덜터덜 따라오는 중이었다.
그레이안은 에이프릴을 흘긋 내려다보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향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
“……언제 익숙해지셨나요?”
“글쎄…….”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고요한 밤에 눈이 내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흔들림 없이 사뿐사뿐, 그저 묵묵히 내리는 눈.
“언제부터인가, 검으로 사람을 벨 때도 떨지 않게 되었지. 그때부터 더는 악몽도 꾸지 않게 되었고.”
“악몽도 꾸셨어요……?”
설핏 웃은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누구에게나 어리숙한 시절은 있기 마련이란다.”
에이프릴에게 그 말은 상당히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에이프릴이 생각하는 그레이안은…… 날 때부터 완벽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공작님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졌어요.”
“내 어린 시절? 별로 재미없었지.”
“공작님이 열세 살 때 여장을 하고 영지를 몰래 시찰 다녔다고 아르윈이 그러던데…….”
“……아르윈이 그런 소리도 했어?”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라앉아 있었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졌다.
어느덧 솔즈베리 성에 도착했고, 그레이안과 에이프릴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글로리아가 정원으로 후다닥 뛰쳐나왔다.
“그레이안! 에이프릴!”
글로리아는 매의 눈을 하고 두 사람을 재빨리 스캔하고는, 이어서 에이프릴을 꼬옥 끌어안았다.
포근한 품에서 달콤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에이프릴은 무의식중에 토끼로 변하고 말았다.
“으앗.”
“꺄앙.”
당황한 글로리아의 옷자락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에이프릴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글로리아 앞에서는 자꾸만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진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데도 말이다.
“에이프릴, 사냥은 어땠어? 기분은 괜찮아……?”
세심하게 걱정해 주는 목소리가 어찌나 다정한지.
영원히 어린이일 수는 없을 테지만, 글로리아가 보듬어 주는 순간만큼은 언제까지고 어리광쟁이 토끼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웅꺄앙.”
“으음, 그래, 통역 귀걸이를 하고 올 걸 그랬나…….”
“끼앙~.”
품에서 고개를 쏙 빼든 에이프릴이 깡충 뛰어올라 글로리아의 뺨에 쪽 뽀뽀했다.
그냥, 불현듯 애정 표현이 하고 싶어서.
놀란 글로리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에이프릴을 꼭 껴안으며 마구 쓰다듬었다.
“우리 귀여운 토끼. 엄마 보고 싶었구나?”
그 말을 딱히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에이프릴이었다.
* * *
해가 높이 뜬 일요일 오후.
나는 비장하게 말했다.
“에이프릴, 오늘은 손님이 올 거야.”
“꺄웅?” (손님?)
웬일로 통역 귀걸이가 일을 한다. 마침 잘 됐군.
뒷발로 귀를 긁는 에이프릴을 향해, 나는 재차 이야기했다.
“엄마 치, 친구야. 엘로윈 사교계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지……!”
“끼훙…….” (흐음…….)
눈을 가늘게 뜬 토끼가 앞발로 턱을 받쳤다. 귀, 귀여워. 지금 모습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
“오늘 그 친구가 솔즈베리 성에 와서 나랑 티타임도 갖고, 성 구경도 하고, 에이프릴 너도 소개해 줄 건데, 착하게 굴어야 해? 알았지?”
“…….”
에이프릴은 어쩐지 불만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고는, 성의 없이 고개를 까닥했다.
뭐가 불만인지는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으니 된 거……겠지?
.
“글로리아!”
분홍 머리의 사랑스러운 숙녀가 마차에서 풀썩 뛰어내렸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더니, 이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초대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 오늘 내가 솔즈베리 성에 초대한 사람은…… 다름 아닌 피오렌 공작 부인!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워낙에 나를 좋아하기도 하고, 부유한 영지의 주인이니 잘 지내 두어서 나쁠 것이 없다. 후후후…….
“선물 가져왔는데! 마차 짐칸에 있어요!”
“선물 같은 건 안 줘도 되는데…… 그냥 빈손으로 오라니까.”
“그럴 수야 없죠! 오늘이 첫 방문인데!”
“후후……. 고마워요, 하인에게 안으로 들여놓으라 할게요.”
“뭘요~.”
나도 빈말을 좀 했을 뿐이지, 선물이 부담스럽거나 싫진 않았다.
알고 보니 비앙카가 안목이 굉장히 좋더라고. 얼마 전에 그녀가 보내준 선물들도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죠? 이따 함께 산책도 해요. 솔즈베리 성의 정원은 겨울에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답니다. 온실도 있고요.”
“온실! 저 정말 궁금해요! 어떻게 꾸미셨나요? 저희 성의 정원에도 온실이 있긴 하지만…….”
좋은 분위기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응접실로 향했다.
비앙카는…… 처음에만 좀 부담스러웠지, 친해지고 나니 대화하기 아주 편한 상대였다.
일단 사람이 너무 착하다. 진짜 너무 착해 빠져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은근히 단호한 구석이 있는 걸 보면, 줏대가 아예 없는 건 아닌 듯하고.
“여기가 응접실이에요, 들어와요. 아, 그리고…….”
머지않아 응접실에 도착했고,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
토끼를 소개할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