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화. 선한 방향으로
‘여기인가……?’
아인스턴 왕국 북동부의 소도시, 맥시스.
나는 변장을 하고 후드를 눌러쓴 채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의 대륙 끝자락에 위치한 소도시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정보상이 알려준 골목은 이쯤이 맞는 것 같은데.’
길이 워낙 복잡해서인지 내가 맞게 온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좁은 골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아르윈이 유사시에 쓰라며 준 마도구를 손에 꼭 쥐고서.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세 번째 문…… 이건가?’
일단은, 다섯 번 노크를 해야 한다고 했지.
나는 구리로 된 문고리를 잡고서 똑똑똑똑똑, 연달아 문을 두드렸다. 5번이라는 횟수가 잘 전달되도록, 적당한 속도로.
곧이어 철컹!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 위로 난 작은 창문의 빗장이 열렸다.
그 너머로 누구일지 모르는 이의 고동색 두 눈만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 눈은 의심스러운 빛을 띠고 나를 찬찬히 훑어보았고, 이어서 깐깐하고 경직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암호는?”
“엉겅퀴꽃, 수선화, 바다쇠오리, 호랑지빠귀, 1014532.”
정보상에게 미리 들어둔 암호를 재빨리 대자, 나를 보는 눈이 조금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쪽문이 닫혔다.
곧이어 철컹거리는 소리가 한 여섯 번쯤 들려왔고, 낡은 문이 끼익― 소음을 내며 열렸다.
“들어오시오.”
나는 문지기에게 짧게 묵례를 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다. 그리고 쾌적했다.
구조는 대피소나 은신처 따위와 비슷했는데, 어두운 복도를 통과해 안쪽의 문을 열자 회의실처럼 꾸며진 방이 나타났다.
“뭐지? 더 올 사람이 있었나?”
“누구야?”
삼삼오오 모여 서 있거나 앉아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며 수군거렸다.
나는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면서 선량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나는 솔즈베리 성에서 일하는 한 하녀의 모습을 하고 있기에,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내 정체를 알아볼 수 없을 터였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엘로윈 왕국에서 왔습니다.”
“엘로윈에서?”
“어…… 누구의 추천을 받고 오셨죠?”
내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한층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솔즈베리 공작 각하의 명으로 오게 됐습니다.”
이건 그레이안과 합의된 부분이다.
당연히, 그는 내 계획을 다 알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싶어 했다.
“솔즈베리……?!”
“솔즈베리 공작이 여긴 어떻게 알고……?”
“그만한 가문이면 다 아는 수가 있겠지.”
“이거 뜻밖인데…….”
사람들은 호기심과 경계심이 어린 눈빛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솔즈베리 공작이 무슨 의도로 나를 보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흔들림 없는 태도로 이야기했다.
“여러분은 아인스턴의 수인 노예 제도에 반대하고 계시죠. 솔즈베리 공작님께서는 여러분과 뜻을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그 말은…….”
“우리를 지원하겠다, 뭐 그런 뜻이오……?”
“네, 그렇습니다.”
나는 단박에 대답하며, 외투 안쪽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주머니 안이 보이게끔 매듭을 풀자, 가득 들어 있는 금화가 빛을 내뿜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 이건…….”
“허억…….”
금화를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이 정도 금화면 아인스턴의 수도에 사는 시민의 10년 치 생활비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활동은 아인스턴 내에서 불법이기 때문에, 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불법이라 함은 들키지 않게 물밑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부유한 귀족이나 상인의 후원금을 받게 되면 꼬리가 잡히기 쉽다.
그렇기에 이 단체의 활동 자금은 회원들의 얼마 안 되는 회비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단체의 구성원은…… 시민, 상인, 기자, 교수, 학생, 예술가로 다양하고.’
와중에는 부유한 상인이나 신분을 감춘 귀족 집안의 자제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들이 내는 회비로도 자금 운용이 어렵겠지. 큰돈을 떡하니 냈다간 세무 조사에 걸릴 테고, 결국 이 단체의 꼬리가 밟히게 될 테니.’
따라서 이들에게 필요한 건 아인스턴 왕국에 속하지 않은 자금줄.
혹여 들키게 되더라도, 아인스턴 왕가에 굴할 필요가 없는 거대 세력이리라.
‘딱 솔즈베리 가문이지.’
씩 웃은 나는 놀라워하는 사람들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뜻밖에도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저 사람은…….’
테나 위즈벨 박사.
피오렌 공작성에서 만났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진으로 있다던.
‘친 수인 성향이라더니, 이런 단체에서도 활동하는구나.’
너무 빤히 보았던 것일까? 위즈벨 박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체하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은 정체를 드러낼 때가 아니지.
“저, 실례하오만…… 귀하를 솔즈베리 공작님께서 보내셨다는 증거가 있소? 그게…… 아무래도 이런 건 확실히 하는 편이 좋을 듯해서…….”
“아.”
그때 누군가 슬그머니 건넨 말에 나는 저절로 외마디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그걸 안 보여 줬구나.
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솔즈베리 가문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냉큼 꺼냈다.
이 서류에는 앞으로 아인스턴의 반―노예 단체를 금전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그레이안의 뜻이 친필로 적혀 있었다.
서류를 펼쳐 모두에게 보여주자, 사람들은 앞다퉈 인장과 필적을 확인하고는 “진짜인가 본데……?” 하고 중얼거렸다.
“그럼, 귀하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안젤라 하스우드입니다.”
미리 지어둔 가명을 자신 있게 꺼내자, 사람들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글로리아일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하는 것처럼.
“그럼…… 귀하의 성함을 우리 협회의 명단에 올려도 될까요?”
“그럼요.”
“그리고 솔즈베리 공작 각하께서 우리를 후원하신다는 사실은, 일단 대외비로 부칠까 하는데. 이견 있으신 분?”
손을 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만장일치로 상황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회의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가장 시급한 안건은, 오는 4월에 열릴 대규모 노예 경매에 관한 것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경매는…….”
나는 자리에 앉아 회의 내용을 경청했다.
처음에만 몇몇 사람이 나를 힐끔거렸을 뿐, 얼마 안 있어 다들 진지한 자세로 회의에 몰입했다.
그 막중한 분위기에 나 역시 빠르게 적응을 마쳤다.
.
“그럼 살펴 가십시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들과 헤어져 도시를 벗어나 마차에 올라탔다.
뭐랄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유익하고, 얻은 게 많은 회의였다.
‘처음 빙의했을 때는 아인스턴 왕국엔 순 나쁜 인간만 있는 게 아닌가 싶었지.’
하지만 그건 편견이 확실했다.
세상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악하지 않았다.
나약하게 멈춰 서 있지도 않고, 혐오에 휘둘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도 않는다.
그래, 뭐라 해야 할까, 이 기분은…….
‘……인류애가 충전된 기분?’
나는 작게 웃으며 마차의 창밖으로 하늘을 내다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내일은 산책을 못 하겠구나.
하지만, 뭐, 때로는 비도 와 줘야 땅이 비옥해지니까.
어쩌면 눈이 올 수도 있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면 우리 토끼가 좋아서 방방 뛰어다니겠군.
‘아, 얼른 토끼 보고 싶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의 옅은 어둠 속에서 귀여운 토끼의 모습과 에이프릴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오늘 회의에 참석했던 열네 살짜리 소년이 불현듯 생각났다.
‘우편배달부라고 했던가…….’
수인 친구가 있었지만 어느 날 실종되었고, 몇 년 후 노예가 된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그 일을 계기로 수인 노예 제도에 경각을 느끼게 되었다고.
비단 그 소년뿐만이 아니었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사람, 공동 목욕탕 주인, 인쇄소를 하는 사람, 작가, 시인, 화가, 직물공과 수공업자, 양치기, 양봉업자, 농부, 교수와 학생…….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뜻을 모으고 있는 게, 왠지 모르게 신기하고도 감동적이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권력과 재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 같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이다.
권력과 재력이 없어도, 대단하지 않아도, 옳다고 믿는 일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은 언제나 선한 방향으로 나아갔구나.
‘……뭐, 그 반대로, 세상의 어두운 면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지만…….’
그럼에도.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긍정적인 희망이 드는 이 기분, 나쁘지 않다.
* * *
이제 30일+a 후면 에이프릴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코앞이다.
그렇기에 나는 지난주부터 데뷔탕트 무도회를 위한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드레스와 슈즈를 고르고, 머리 장식, 보석, 향수, 그밖에 온갖 것들을 찾아 주문하고 감정하기를 반복했다.
데뷔탕트 무도회는 3일 동안 계속되는 데다가 그 주 내내 사교 시즌이기 때문에, 드레스도 여러 벌 맞춰야 했고 신발과 보석도 다 다른 거로 준비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사업을 하느라, 에이프릴의 사교계 데뷔를 준비하느라, 누가 코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바빴다.
이런 내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토끼는 뭔가를 골라야 할 때마다 건성으로 ‘앞발로 척.’ 그러곤 하품. 또 건성으로 ‘앞발로 척.’ 지루한 듯이 뒷발로 귀 긁기.
진짜로 이게 좋아? 하고 물어도, 늘 그렇듯 ‘꺄웅.’ 또는 ‘웅꺄앙.’ 따위의 대답만 하는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요 녀석아. 네 데뷔라고! 관심 좀 가져!”
“끼애웅!”
“수도에 가서 처, 첫사랑을 찾게 될지도 모르잖아! 연애엔 전혀 관심이 없니?”
“끄앵~.”
에이프릴은 별걸 다 물어본다는 듯이 나를 흘겨보곤, 또 뒷발로 귀를 긁었다.
부들부들…… 나는 부들부들 떨었다.
“에이프릴…… 네 데뷔인데 꼭 내 데뷔 같다. 전부 내가 준비하니까…… 토끼 녀석은 데뷔하는 당사자 주제에 관심도 없고 하품만 하니까…….”
“웅꺄앙~.”
토끼 녀석이 보란 듯이 하품을 했다. 참다못한 나는 카탈로그를 집어 던지고 토끼를 습격했다.
보송보송한 배와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히자, 토끼가 캬앙거리며 굴러다녔다.
“이 토끼 녀석! 사교계가 얼마나 무서운데! 사교계도 일종의 전쟁터라고!”
“끼얏웅!”
“얼른 적극적으로 이브닝드레스를 고르지 않으면 온실에 딸기 안 열리게 할 거야!”
“……!”
그 말에 벌떡 일어난 토끼가 카탈로그를 냉큼 펼쳐 들더니 주의 깊게 훑기 시작했다.
……진즉에 이럴 걸 그랬나. 먹는 걸 인질로 삼으니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군…….
“끼앙? 웅꺗.”
“……그게 마음에 든다고?”
“꺄앙.”
“그래, 어디 보자…….”
토끼가 고른 것은 자신의 눈 색과 닮은 분홍빛 실크 드레스였다.
특이하게도 밑단으로 내려갈수록 색이 짙어지는 그러데이션 원단이었는데, 웬만해선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이지만 우리 토끼라면 잘 어울릴 듯싶었다.
“좋아. 이 드레스에 신을 슈즈는?”
“꺄웅……. 꺗.”
“흐음~. 이건…….”
소가죽에 흰색 비단을 덧대고 핑크 스피넬과 루비로 장식한 슈즈.
드레스의 상의 부분이 흰색이니, 과연 잘 어울릴 듯싶었다.
“그럼…… 보석은?”
“끼얏꺄웅.”
토끼는 별로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척 골랐다. 또 대충 고르나 싶었는데, 의외로 괜찮은 것을 앞발로 짚고 있었다.
“탄자나이트에 다이아몬드……? 흐음…….”
탄자나이트는 옅은 보랏빛에서 짙은 파란색까지, 다양한 채도를 지닌 보석이다.
에이프릴이 고른 탄자나이트는 보랏빛이 도는 짙은 파란색으로, 최상급이라 할 수 있었다.
‘드레스가 분홍색이니까…… 잘 어울리겠네. 포인트도 되고.’
사이드 스톤은 맑고 투명한 다이아몬드로 광학이 아주 좋아 보였다. 뭐, 정말로 괜찮은지는 실물을 직접 보고 판단해야 할 테지만.
나는 에이프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토끼야……. 너 은근히 안목이 좋구나?”
“꺄앙~.”
그런데 그 좋은 안목을 두고 여태 방관했단 말이냐……. 나는 토끼를 다시 마구 간지럽혔다. 그러다 결국 콱 물리고 말았지만.
* * *
“준비되었니?”
“……네, 공작님.”
에이프릴은 등에 활이 잘 매여 있는지, 허리에 검은 잘 있는지 재차 확인한 후 말고삐를 잡았다.
오늘은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에게 ‘마수 사냥부터’ 가르쳐 주기로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