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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95화 (95/144)

##  95화. 글로리아는 열심히 살고 있다

“마정석 공급이 끊겼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아인스턴의 국왕, 라니에로의 싸늘한 물음에 그의 신하가 고개를 조아렸다.

왕에게서 흘러나오는 냉랭한 분위기에 그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솔즈베리 공작가에서 해로를 차단했습니다. 아, 아시다시피, 카넬로의 광산은 지리적으로 험준한 곳에 위치해 있어 육로로 마정석을 운반하는 것은 어렵사온데―.”

“누가 그걸 모르나? 해상 기술도 부족한 놈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해로를 차단했냐는 말이다.”

왕가로 공급되는 마정석은 카넬로 지방의 광산에서 채굴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광산이 솔즈베리 공작령과 맞닿아 있다는 데 있었다.

광산에서 채굴한 마정석을 육로로 옮기려면 솔즈베리 공작령을 통해야 안전하고, 아닐 경우 마수가 들끓는 지역을 지나쳐야 한다.

그래서 여태 해로를 이용해 왔던 것인데…….

“해, 해로를 뚫으려면 솔즈베리의 해상군과의 마찰을 피해 갈 수 없을 듯합니다. 아니면 저희 쪽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하나 이상은 들어주어야…….”

쾅!

더는 듣기 싫다는 듯, 라니에로가 왕좌의 팔걸이를 크게 내리쳤다. 신하들은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왕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했다.

폭군에게 감히 간언을 올릴 수 있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신하는, 모두 라니에로의 손에 숙청되었으므로.

“그 천한 늑대 새끼들의 비위를 맞춰 주라고? 경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카넬로의 마정석 광산은 버려라. 어차피 채굴량이 점점 떨어지던 곳 아닌가. 새 마정석 광산을 발견하는 데 더 노력을 기울여라! 이런 시답지 않은 분쟁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는, 지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곳으로 말이다.”

라니에로가 신하들을 닦달했다. 새 마정석 광산을 발견해 내라니……. 신하들은 눈을 질끈 감고 침음을 삼켰다.

마정석 광산을 발견하는 게 그토록 쉬운 일이었으면, 진즉에 카넬로의 광산을 버렸을 것이다. 마정석 하나도 아쉬운 상황이기에 이토록 애를 쓰는 것 아니었던가.

그렇지 않아도 대륙 남쪽의 마정석 광산에서 전반적인 채굴량이 줄어드는 추세였고, 새로운 광산을 발견하지 못할 경우, 이르면 10년 후에는 엘로윈에서 수입해 오는 수밖에 없었다.

혹은 마정석 광산이 있는 다른 대륙이나 섬을 찾아야 했는데, 그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후의 수는 엘로윈과 전쟁을 일으켜 광산을 빼앗는 것뿐인데…….

전쟁은 언제나 최악의, 최후의 수단이었다.

득보다 실이 더 크다는 게 사실상 정론이고, 혹시라도 엘로윈에 패배해 마정석 공급이 완전히 끊기는 것보다는 외교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다져놓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하지만 남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폭군이 과연 간언에 고개를 끄덕일까. 무엄하다며 목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날, 관료들은 한층 시름이 깊어진 표정으로 알현실을 나왔다.

아인스턴의 국운이 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어서.

.

신하들을 모두 내보낸 후, 라니에로는 답답한 심경으로 알현실을 서성였다.

솔즈베리에서 해로를 차단한 것은 지난번 자신이 암살자들을 보낸 것에 대한 보복이 분명했다.

의문은 왜 이제 와서 보복을 하는가이다.

몇 년 전부터 라니에로는 솔즈베리에 수도 없이 많은 암살자들을 보내 왔고, 그것은 일종의 경고였다.

감히 아인스턴 왕가에 기어오르지 말라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라니에로는 글로리아와 솔즈베리 공작이 자신의 이혼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보복이자 경고 조치로 암살자들을 보냈다.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습격이었을진대 이번엔 어째서인지 솔즈베리 공작이 과민 반응을 해 왔다. 도대체 왜?

그레이안 솔즈베리, 그 작자는 무디기 이를 데 없어서,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먼저 보복해 오는 일이 없다.

그의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글로리아와 그 토끼 수인 계집애는 건들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했을 터인데…….’

글로리아는 아직 쓸모가 있기에 죽어선 안 된다.

라니에로는 글로리아를 솔즈베리 공작과 이혼시키고 다시 아인스턴으로 불러들이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토끼 수인 계집애는 솔즈베리 공작의 역린이기에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다.

당장은 솔즈베리와 전면전을 할 생각이 없으므로, 라니에로는 늘 그 점을 암살자들에게 당부해 두곤 했다.

사실 그 토끼 수인 계집애는 아깝게 죽이는 것보단 살려 두었다가 납치하든지 해서 협상의 수단으로 쓰는 게 더 유용할 테고…….

‘그래, 그런데…….’

도대체 뭐가 어떻게 꼬인 거지?

라니에로의 수중에 있는 암살자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교육받기에 실수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욱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자아 없는 인형이나 다름없는 암살자들이 명령에 불복하거나 계획을 이탈하는 일 따위, 있을 리 없는데…….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라니에로는 서성이다 말고 방향을 바꿔 알현실을 나섰다. 솔즈베리 공작은 갑자기 미칠 놈이 아니다.

분명 다른 원인이 있을 터. 라니에로는 그 원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한편.

암살자들이 머무는 왕궁의 지하 시설에 라니에로가 도착하기 전, 그곳을 유령처럼 빠져나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 존재는 검은색 후드 아래 창백한 얼굴을 감춘 채, 어둠 속에서 라니에로를 응시하였다.

아인스턴의 마지막 왕이 될, 어리석은 폭군의 말로를.

{세이렌! 또 어딜 가 있는 거야?}

“예, 곧 가지요. 왕녀 전하…….”

이 역할극도 슬슬 질려가고 있었지만, 어차피, 이 세계의 끝도 머지않았다.

* * *

어느덧 1월 중순이 되었다.

그간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어쨌든 크고 굵직한 사건은 암살자들의 습격 이후로 없었고, 대체로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솔즈베리 성의 방어 마법은 더욱 견고해졌고, 성의 설비와 치안도 전보다 훨씬 강화되었다.

나와 에이프릴에게 붙은 호위도 여전히 다섯 명씩이나 된다.

아, 에이프릴은 로드리를 포함해 여섯 명이지만.

참고로 제이드 녀석도 에이프릴의 호위가 되고 싶은 눈치였는데, 그레이안과 기사단장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불만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출신이 불명확한(높은 확률로 아인스턴의 귀족일 것 같은) 녀석에게 중책을 맡길 순 없을 테니까.

그래서 제이드의 위치는 다소 붕 떠 있는 듯했다.

언젠가 자신의 가문으로 떠날 소년. 모두가 제이드를 그렇게 여기는 듯했으므로.

“그렇지만, 공작 부인께서 보증해 주시면 되잖아요? 로드리 경의 경우처럼요.”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온 제이드가 답지 않게 살살 기며 부탁해 왔다.

나는 인세구원회의 피해자인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이송하는 중이었는데, 아이들은 나랑 떨어지기 싫다며 들러붙고, 제이드도 옆에서 자꾸 채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 잘 지내야 해요!”

“흐앙, 선생님…… 보고 싶을 거예요…….”

“앞으로 잘 자라겠다는 불확실한 말밖에 드릴 수 없어 죄송합니다.”

“토끼도 보고 싶을 거야……!”

“끼앙.”

중간에 아이답지 않은 누군가가 스친 듯했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아이답게 굴어!’라고 할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그간 아이들과 잘 놀아 주었던 에이프릴도 아쉬운 기색으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이제껏 토끼 모습을 고수한 탓에, 에이프릴이 진짜 토끼인 줄 아는 아이들이 많았다.

“공녀님, 공작 부인, 감사합니다!”

물론 제대로 아는 녀석들도 있었지만.

그렇게 절반의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보낸 후, 나머지 아이들은 부모나 친척이 데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몇몇 아이들은 솔즈베리 성에 남고 싶다며 고집을 부려서, 수습 하인으로 일하게 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이 성에서 하는 일이어야 봤자 간단한 심부름 정도이지만.

“하, 이제 좀 조용하네…….”

아이들에 관한 일을 전부 마무리한 후, 나는 손으로 허리를 짚고 넓은 정원을 둘러보았다.

어쩐지, 조금 쓸쓸한 듯도 하고…….

‘좋은 보육원이니까, 다들 잘 지낼 수 있겠지.’

솔즈베리 공작가에서 후원하는 보육원이라 주기적으로 소식도 들을 수 있고, 거리가 멀지 않아서 시간 날 때마다 직접 보러 갈 수도 있다.

‘가끔 에이프릴과 함께 놀러 가야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따라 하늘이 참 파랗다.

“끼아웅~.”

“그렇죠? 에이프릴도 내가 호위가 되었으면 하죠?”

“웅꺄앗.”

한편에선 제이드와 에이프릴이 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내 통역 귀걸이는 툭하면 고장 나는데 제이드 것만 멀쩡하다니…… 왠지 박탈감이 든다!

“공작 부인, 들어보세요. 에이프릴도 제가 호위가 되었으면 한다잖아요.”

“끼얏웅~.”

제이드가 에이프릴을 안고 다가와 말했다. 둘을 번갈아 본 나는 눈썹을 쓱 치켜세우며 입을 열었다.

“아니, 전혀 모르겠는데. 난 얘가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고.”

“통역 귀걸이는요? 안 하셨어요?”

“그 고물은 툭하면 고장 나서 서랍에 처박아둔 지 오래다.”

“그래도 주머니에 넣고 다니세요. 멀쩡한 날이 7일에 1번쯤은 있을 수도 있잖아요.”

“어, 그래.”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제이드에게서 에이프릴을 쏙 빼앗아 왔다. 제이드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두 팔을 축 늘어뜨렸다.

‘하여간…….’

절레절레 고개를 가로저은 나는 에이프릴을 안고 본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이드가 침울해하거나 말거나, 토끼는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이나 할 따름이었다.

* * *

내 사업은 대박이 났다. 뭐, 예상대로의 결과라 별로 놀랍진 않다. 우후후. 후후훗. 후후후훗……!

“입이 귀에 걸리겠습니다, 공작 부인.”

내 사업 파트너나 다름없어진 아르윈이 장부를 훑어보며 핀잔을 주었다.

저렇게 까칠한 태도도 이제는 너그럽게 넘어가 줄 수 있다. 아르윈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니까……!

“……뭡니까, 그 부담스러운 시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후후, 훗…….”

사진기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지만) 아인스턴 왕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수출은 중간 업자를 끼고 이루어졌지만 어찌 되었든 대박이 났고, 나는 돈방석에 앉았다.

이 돈이면 앞으로의 내 계획에 충분히 운용하고도 남는다……!

“아인스턴의 수입업자가 가져가기로 한 수수료 이상으로 떼먹은 돈은 없는 것 같군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계속 잘 감시해야겠지요.”

“그래요, 아르윈. 전부 아르윈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진짜!”

“텐션이 너무 높으십니다만…….”

참고로 카나번의 광산도 얼마 전 발견하여 철도 사업에 필요한 마정석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철도가 쭉쭉 깔리는 중이니, 열차가 다니는 건 이제 시간문제다. 돈을 잔뜩 벌어들일 생각에 벌써 신나는구만. 음하하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급한 용무가 있으시거든 통신 마도구로 호출해 주십시오.”

“앗, 그래요, 나중에 또 봐요!”

아르윈은 심플하게 고개를 까닥하곤 횅~ 바람을 일으키며 사라져 버렸다. ……날마다 봐도 적응이 안 되는 퇴장법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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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가 되자, 나는 그레이안, 그리고 에이프릴과 함께 근교로 나왔다.

이곳에 노예 출신 수인들을 위한 보호 시설을 짓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공작님, 공작 부인, 그리고 공녀님! 안녕하십니까!

우리를 발견한 공사 책임자가 후다닥 달려와 인사하더니, 진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이 보호 시설이 계획대로 잘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제법 큰 뿌듯함을 느꼈다.

“이제 약 30일 후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듭니다. 그러고서 내부 설비를 좀 해야 할 테지만, 늦어도 두 달 안에는 완공될 거로 예상합니다.”

두 달 안이라……. 그럼 시기가 얼추 맞는다. 물론 그전에, 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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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즈베리 성으로 돌아와, 나는 일주일 전에 심부름꾼 길드에 부탁해 두었던 정보를 건네받았다.

[아인스턴 왕국 내, 반―노예 제도 단체, 7일 후 아인스턴의 소도시 맥시스에서 은밀히 회동.]

재력은 준비되었으니, 아군을 얻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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