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결정의 무게
“……제 탓이에요.”
또, 또 시작이다.
“제가 습격을 예지했더라면, 성의 방어 마법을 강화한다든지, 그런 대책을 미리 세울 수 있었을 텐데―.”
습격 사건 이후, 에이프릴은 툭하면 제 탓을 해댔다.
아무래도 이번 일이 에이프릴의 해묵은 트라우마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나는 에이프릴의 양 어깨를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에이프릴, 그런 생각 하지 마. 너에겐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뿐이지, 그 능력으로 너에게 어떤 의무가 주어진 건 아니야.”
“그렇지만…….”
“그리고 그레이안도, 너도, 나도. 우리 다 무사하잖아. 가신들 중에서도 다친 사람 한 명도 없고. 네 탓하지 말고, 죄책감 갖지도 마, 에이프릴.”
“…….”
에이프릴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두 눈에 물기가 그렁그렁하다.
이런 에이프릴의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슬퍼졌다.
속으로 탄식하며, 나는 두 팔을 에이프릴의 등 너머로 뻗어 아이를 꼬옥 안아 주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하지만 너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거, 꼭 명심해.”
“…….”
아이의 작은 몸이 살짝 떨리더니, 이윽고 내 어깨 부근이 축축하게 젖어가기 시작했다.
이내 작게 흐느끼는 에이프릴을, 나는 가만히 감싸 안고 토닥여 주었다.
* * *
어느 순간 토끼로 변한 에이프릴은 울다 지쳤는지 내 품에서 잠들어 버렸다.
나는 토끼를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준 후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호위 기사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습격 사건 이후 에이프릴의 호위가 강화되어, 무려 다섯 명.
그리고 내 호위도 다섯 명이다.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에이프릴은 잠들었으니 소음에 주의해 주시게.”
“예, 공작 부인.”
어찌 됐든 나는 기사들에게 충고한 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름 아닌 기사단 본부.
이번 일로 제일 고생했을 기사단을 치하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것도 다 공작 부인의 일이니 소홀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공작 부인! 어서 오십시오!”
“오셨습니까, 공작 부인.”
기사단 본부에 도착하자, 단장과 부단장을 비롯한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나를 환대해 주었다.
예전과는 달리 기사들도 나에게 많이 친절해졌다. 참 감개무량하다니까.
“다들 고생했어요. 오늘 저녁은 특식으로 부탁한다고 주방장에게 일러두었으니 마음껏 먹도록 하세요. 그리고 공작님께서 곧 포상도 내리실 거예요.”
특식과 포상 얘기에 기사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눈에 담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여러분의 출중한 무예 덕분에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모쪼록 정진하며 솔즈베리를 위해 공헌해 주길 바랄게요.”
“물론입니다! 공작 부인!”
“이 한 몸, 솔즈베리를 위해 기꺼이 바치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충성하겠습니다!!”
기사들은 다소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빛내며 자신들의 충성심을 표출했다.
나는 미소가 어색해지지 않도록 애쓰며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나를 기사들은 감격 어린 눈으로 응시했고, 못내 부담스러워진 나는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했다.
“그럼, 나는 이곳을 좀 둘러보다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돌겠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사들이 이렇게나 열성적이 된 이유는 내가 그들 몸에 남은 자잘한 상처를 나비들의 힘으로 치료해 주어서인 듯했다.
그때부터 나를 보는 기사들의 눈빛이 평범한 존경심을 넘어선 듯한…… 그런 느낌적 느낌…….
“음, 본부를 둘러보는 것 정도는 나 혼자서도―.”
“그건 안 될 일이지요, 공작 부인.”
별안간 끼어든 목소리에 깜짝 놀라 옆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아르윈이 특유의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지만…… 나는 얼마 전 일로 조금 어색해하면서 이야기했다.
“안녕하세요, 아르윈. 기사단 본부에는 무슨 용건으로…….”
“저기요? 공작 부인? 설마 제 여장한 모습을 봤다고 아직까지 어색해하시는 건 아니겠죠?”
속으로 뜨끔한 나는 그를 피해 걷기 시작했다. 우르르 따라오려는 기사들을 아르윈이 눈빛으로 제압했다.
내 바로 옆에서 그의 따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전의 그 복장은, 일 때문에 했던 겁니다. 절대 제 취향이 아니고 저는 저 자신을 남성에 더 가깝게 인식하고 있으니 오해하지 말아 주시죠!”
“그러시군요……. 명심할게요.”
“제 눈을 보고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 네…….”
아르윈을 피해 걷다 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다름 아닌 반성실.
여기에 제이드와 로드리가 있다고 한다. 명령 불복종으로 벌을 받는 중이라나…….
암살자들이 성을 습격했을 당시에, 제이드와 로드리를 비롯한 18세 미만의 기사들은 내부 방어 임무를 하달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제이드와 로드리 두 녀석이 본부를 뛰쳐나가 암살자들과 대면해 싸웠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기사단장이 크게 화를 내며 둘에게 벌을 내렸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부터 물밖에 못 마셨다고 하니 측은지심이 들어서 내가 여기까지 왔다.
바보 같은 녀석들……. 호승심도, 정의감도 적당히 발휘해야지. 에이프릴이랑 나이 차도 얼마 안 나는 녀석들이 왜 그렇게 어른 행세를 하려 드는지 모르겠다.
에이프릴도 그렇고, 얘들도 그렇고, 자신들이 보호받아야 하는 나이라는 자각이 너무 없는 것 같다.
‘이 사위 후보 녀석들아!’
라고 속으로만 외치며 벌컥 문을 열었다. 반성 의자에 정자세로 앉아 있던 녀석들이 나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녀석을 찬찬히 스캔했다. 음, 다친 곳 없이 멀쩡하군!
“공작 부인, 공녀님은…….”
“공작 부인, 에이프릴은…….”
두 녀석이 거의 동시에 말문을 텄다.
습격 사건이 있던 당일에도 에이프릴 걱정부터 하더니, 어쩜 이리 한결같은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에이프릴은 엄마인 내가 잘 달래고 재우고 왔으니 걱정 말도록. 너흰 일단 밥이나 좀 먹어라.”
그러고서 안나에게 손짓하자, 내 뒤편에 서 있던 안나가 냉큼 앞으로 나와 도시락 바구니를 풀기 시작했다.
바닥에 착 깔린 담요 위에 하나둘씩 차려지는 음식들을, 로드리와 제이드는 토끼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자, 시장할 테니 어서 먹어. 주스도 있으니 마시고.”
“하지만, 공작 부인……. 저희는 지금 벌을 받는 중이라, 금식해야 하는데…….”
로드리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고 제이드도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는 눈알을 굴리며 한숨을 쉬었다.
“한창 자랄 시기에 금식은 무슨 금식이야! 내가 기사단장에게 잘 말해둘 테니, 어서 먹어. 굶으면 키 안 큰다? 에이프릴은 키 큰 사람 좋아해.”
“……!”
움찔하며 반응을 보인 건 제이드였다. 로드리는 ‘그 얘기는 갑자기 왜 하지?’ 하는 표정이었고.
로드리 녀석, 역시 에이프릴을 여동생쯤으로 생각하나 보군……. 에이프릴에게 연애 감정이 있는 건 제이드뿐이고.
‘에이프릴이 키 큰 사람을 좋아한다느니 하는 얘긴 사실 거짓말이지만…….’
효과는 굉장했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제이드가 먼저 음식을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 제이드를 멍하니 응시하던 로드리도 이내 머뭇거리며 담요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삶은 달걀부터 먹기 시작한다.
배경이 반성실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마치 피크닉을 나온 듯한 모양새였다. 담요도 노란색 체크무늬고.
‘잘 먹고 쑥쑥 커라, 소년들.’
……어른의 특권이란 마음껏 아이를 위할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잘 먹는 두 녀석을 보며 나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로드리와 제이드를 챙겨 주고서 에이프릴의 방으로 돌아와 보니, 뜻밖에도 그레이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든 에이프릴의 곁에 파수꾼처럼 앉아 있던 그는 날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없이 상냥한 미소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피곤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기사단 본부에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네, 가서 기사들 좀 격려해 주고, 로드리와 제이드가 굶는 중이래서 먹을 것도 챙겨 주고요.”
“부인은…….”
잠시 멈칫한 그레이안이 좀 더 가까이 다가오더니, 물 흐르듯 부드러운 동작으로 손을 뻗어 내 뺨에 가져다 댔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의 손등을 내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바깥에 있다 와서인지 그의 체온이 평소보다 뜨겁게 느껴졌다.
그 녹을 듯한 온도 때문일까,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도 같고…….
“……정말 상냥하십니다.”
“네? 제가요?”
나보단 당신이 더 상냥하죠, 확신을 담아 덧붙인 말에 그레이안은 어쩐지 쓰게 웃었다. 잘은 몰라도, 무게가 느껴지는 미소였다.
“이제부터 전혀 상냥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 어, 어떤 일인데요?”
“……나와 내 나라, 내 가문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진즉 했어야 할 일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 입는 선량한 이들도 분명히 생길 것이기에 미뤄 왔던 일입니다.”
그리 말하는 그레이안의 목소리는 이미 각오한 듯하면서도 채 지워내지 못한 고뇌를 담고 있는 듯했다.
“높은 지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통솔하고,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은 무수한 고민을 떠안게 되는 일이지요. 제 결정 하나에 누군가의 생사가 달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여태 비교적 현명한 판단을 해왔다고 믿었는데…….”
시선을 미끄러트리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지도 모르는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그런 얘기죠?”
“……네, 그렇습니다.”
“당신은 그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못내 죄책감을 느끼는 걸 테고요.”
“그래요.”
“그럼…… 내 생각은 이래요.”
잠시 한숨을 내쉬고서 나는 말을 이었다.
“‘만인에게 선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라고요.”
내 말을 들은 그레이안이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진솔하게 들릴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말을 골랐다.
“우리는 신이 아니니까요. 아니, 어쩌면…… 모든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신조차 할 수 없는 일 아닐까요.”
“…….”
“삶은 매 순간 선택이고, 그저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에요. 당신도, 나도. 우리 모두가.”
나는 그레이안의 손을 품으로 가져다가 두 손으로 꼭 감싸 안았다.
그는 얼마간 말없이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한숨 같은 미소를 떨어트렸다.
“네, 부인의 말이 옳습니다.”
조금은, 홀가분한 듯한 얼굴로.
그러나 여전히 슬픔 어린 눈빛이어서, 나는 다시금 깨닫고 말았다. 그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를.
……이토록 마음이 여리면서도 강하다니, 나는 그가 기특하고, 또 한편으론 안쓰러운 감정도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결정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져야 했을까?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당신이 내리는 모든 결정의 무게는…….”
“…….”
“앞으로, 나도 함께 짊어질게요.”
……그러나 말하고 나니 괜스레 민망해져서, 부부는 일심동체이고 운명공동체이고 어쩌고 하는 말을 부연하듯 웅얼거렸다.
그런 내 머리 위로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훨씬 가벼워진 듯한 웃음.
“감사합니다, 부인.”
그가 나를 마주 안았다. 세상 어떤 풍파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따뜻한 품에 안긴 채, 나는 가만히 생각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을 꼭 지켜주고 싶다고. 그에게 걸린 저주를 반드시 풀어주고 싶다고.
{걱정 마, 글로리아. 네 길은 우리가 비춰줄 테니까.}
살랑거리며 나타난 나비 몇 마리가 우리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나의 다짐을, 그의 다정함을 지켜주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