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3화. 오후의 습격 사건
아니 그러니까, 거실에서 에이프릴과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
와장창!!
갑자기 창문이 부서졌다!
“뭐, 뭐야?!”
“끼앵!”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토끼를 감싸 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영화에서처럼 괴한이 들이닥치려나 싶었는데― 그냥 바람만 횅~ 불었다.
……창문은 도대체 왜 깨진 거지? 멀쩡한 창문이 저절로 깨질 리 없는데…….
“마님!!”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안나가 뛰어들어왔다. 다른 하인들과 호위 기사들도 함께였다.
안나는 창문이 깨진 것을 보고는 대경실색하더니, 토끼와 나를 서둘러 대피시켰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안나, 그리고 호위 기사들과 함께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했다. 토끼는 내 품에 쏙 안겨 있었다.
“안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누군가 솔즈베리 성의 방어 마법을 뚫었어요. 창문은 그 여파로 깨진 거고, 침입자들은―.”
“부인! 에이프릴!!”
갑작스레 들려온 그레이안의 목소리에 안나의 설명이 뚝 끊겼다.
다급한 기색으로 맞은편에서부터 달려온 그레이안은 등에 활을 메고 검을 뽑아든 채였다.
그의 검에 묻은 피를 본 순간, 나는 이게 진짜로 심각한 상황임을 비로소 실감했다.
“부인, 에이프릴……! 다친 데는―.”
“괘, 괜찮아요. 나도, 에이프릴도…….”
그레이안은 나와 에이프릴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이내 안도한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은회색 눈에는 채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제 집무실로 들이닥친 침입자 다섯은 제거했습니다만, 그게 끝이 아닐 테니 부인과 에이프릴은 어서 대피해야 합니다. 패닉 룸이 있는 곳까지 제가 호위하겠습니다. 자, 서두르십시오.”
아니, 이거 뭐 암살? 그런 건가? 누가 솔즈베리 성에 암살자를 보낸 거야? 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그레이안에게 이끌려 갔다.
채 마르지 않은 피가 그의 검 끝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소름이 확 끼쳐 몸을 떨었다가, 그레이안의 뺨에 난 작은 상처를 발견했다.
‘……아니! 이 완벽한 얼굴에 상처라니!’
혹시 다른 곳도 다쳤을까 싶어 그레이안의 상태를 샅샅이 살펴보았다. 다행히 뺨의 작은 상처 외에 다른 곳은 멀쩡한 듯싶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
웬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람?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오후를 보내는 중이었는데, 별안간 암살자라니!
‘누가 보낸 암살자일까? 엘로윈에 솔즈베리 가문의 정적은 없으니…… 당연히, 아인스턴 쪽이겠지. 높은 확률로 아인스턴 왕가.’
놀라서 굳었던 머리가 다시 멀쩡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 보려 애썼다.
갑자기 창문이 부서졌고, 거실에는…… 침입해온 암살자가 없었지. 나를 노린 게 아니란 뜻이다. 즉, 표적은…….
‘……그레이안을 노린 거구나.’
암살자를 보낸 게 아인스턴 국왕의 소행이 확실하다면, 그 작자는 여전히 내 쓸모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리라.
나를 죽이기보다는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하길 원하는 걸 테니까.
“이쪽입니다.”
어느새 패닉 룸 앞에 도착했다.
아무것도 없는 벽면에 그레이안이 손을 얹자, 푸르스름한 문양이 벽 위에 떠오르더니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창문 없이 사방이 막힌 패닉 룸이 나타났다.
심지어 환기구도 없어서, 이 방의 산소 공급은 마법으로 이루어진다는 모양이었다.
“상황이 다 정리될 때까지 에이프릴과 함께 이 방에 계십시오. 절대 밖으로 나오시면 안 됩니다.”
그에게 대답하려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꺄웅!”
별안간 내 품에서 폴짝 뛰어내린 토끼가 사람 모습으로 변신했다.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끼고, 분홍빛 눈이 올곧게 그레이안을 향했다.
“공작님, 저도 싸울 수 있어요. 저도 함께…….”
“안 돼.”
에이프릴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으나, 그레이안이 말을 뚝 잘라 버렸다.
곧바로 에이프릴의 얼굴에 울컥한 기색이 떠올랐다. 두 손을 꽉 주먹 쥔 에이프릴이 재차 입을 열었다.
“공작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검을 다룰 줄 알고, 암살자들도 상대할 수 있어요. 아시잖아요.”
“그래도 안 돼. 새어머니와 함께 여기 있도록 해라, 에이프릴. 넌 아직…….”
그레이안의 시선이 검신에 남은 핏자국 위를 언뜻 스쳤다.
그의 턱이 꽉 악물리는 듯하더니,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에이프릴을 마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손에 피를 묻히기는 아직 이르다, 에이프릴.”
“……!”
“살아 있는 생명을 베는 일은 네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아. 나중에…… 나와 함께 마수 사냥부터 시작해 보자.”
“…….”
에이프릴의 눈꺼풀이 파르르 흔들리고 입술이 떨렸다.
그레이안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에이프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후 등을 돌렸다.
패닉 룸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 그는 나를 돌아보며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장담했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부인.”
그리고 문이 닫혔다.
그레이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 어쩐지 무너질 것 같은 에이프릴의 작은 어깨를 나는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뭐랄까, 그동안 에이프릴은 강해지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았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누군가를 상처 입혀야 한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지 못했나 보다.
다른 존재의, 특히 동등하게 사고하는 지성을 지닌 상대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확실히 쉽지 않지.
나는 에이프릴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저 조용히, 아무 말 없이. 에이프릴 스스로 생각을 다 정리할 때까지.
* * *
“아직 더 남았나?”
“이놈들이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깨끗하던 본관의 홀에 검붉은 핏물이 가득 흘렀다.
글로리아와 에이프릴을 패닉 룸에 안전히 숨긴 후, 그레이안은 암살자들을 홀까지 유인해 모조리 처리했다.
아르윈은 솔즈베리 성의 방어 마법을 복원하는 중이었고, 기사단은 혹시 숨어 있을지 모를 암살자들을 찾아 성 안을 샅샅이 수색하는 중이었다.
“한두 명은 살려둬야 하는데.”
암살 배후를 알아내려면 살려놓고 취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레이안은 넓은 홀에 가득 쌓인 시체의 산을 느리게 훑어보았다. 살아 있는 놈은 없어 보였다.
“조절을 못 했군.”
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낸 그레이안이 낮게 중얼거렸다. 탁해진 은회색 눈에 도사리는 살기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의에는 살의로 대응해야 하고, 폭력과 살인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정신에 흔적을 남긴다.
“혹시 성 안에 숨어 있는 암살자를 더 찾거든―.”
“주군!! 암살자를 찾았습니다!”
그레이안의 말을 가로막으며 웬 기사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그레이안을 비롯해 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암살자 한 명이 두 손을 포박당한 채 한 기사에게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잘했다, 빌. 이자는 어디서 찾았지?”
그레이안의 치하에 뿌듯한 듯이 씩 웃던 기사, 빌이 이어진 질문에 낯빛을 굳히곤 입을 달싹거렸다.
“그, 그게, 일단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공녀님의 방 옆을 지나치는데 낌새가 이상해서…… 그래서 감히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가 조사해 봤더니, 글쎄, 이놈이! 공녀님의 침대 밑에 숨어 있지 뭡니까!!”
빌은 감히 공녀님의 방을 침입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더했다. 그러나 그레이안의 귀에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어둡고 잔인한 충동이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눈앞은 붉게 물들었다.
암살자를 향해 성큼 다가간 그가 팔을 확 뻗어 놈의 목을 움켜잡았다. 옆에 서 있던 빌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지금, 그레이안에게서는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컥…….”
목을 졸린 암살자가 마른기침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그레이안은 이대로 놈의 목을 꺾어 버리고 싶은 것을 초인에 가까운 인내심으로 자제하며, 묵직하게 느릿느릿 물었다.
“대답해라. 내 딸의 방에서 뭘 어쩔 작정이었지?”
암살자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으며 히죽 웃었다.
이자의 얼굴은 특색 없이 무난해서, 지나가다 한 번쯤 마주칠 법한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허한 눈빛에는 소름 끼치는 악의가 깃들어 있어,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열세 살짜리 어린 계집애 방에 들어가서 뭘 하려 했겠어? 뭐 재미 볼 게 있다고…… 그저 네놈들이 방심한 사이에, 컥, 그 예쁜 낯짝을 좀 난도질해 주고, 숨통을 끊― 커억!!”
그레이안은 참지 못하고 놈을 거칠게 내팽개쳤다.
계속 목을 쥐고 있다간 힘을 조절하는 데 실패하고 죽여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온몸이 격노로 떨렸다. 암살자는 바닥을 구르며 킬킬 웃었다.
“이런 미친 새끼……. 그냥 죽여 버립시다! 죽여서 까마귀밥으로나 줘 버리죠!!”
“……안 돼.”
화난 빌이 펄펄 날뛰었으나 그레이안은 침착하게 만류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암살자일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죽일 순 없었다.
고문하여 정보를 모조리 캐낸 후, 쓸모가 없어지면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여도 늦지 않다.
‘그래, 하지만…….’
몇 번 쥐어패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퍽!!
갑자기 날아든 인정사정없는 발길질에 암살자가 비명을 토하며 굴러갔다.
그레이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놈을 쫓아가, 손가락을 밟아 부러뜨리고 얼굴을 발로 짓눌렀다.
“컥, 학…… 하학…….”
신음 같기도 한 기괴한 웃음소리를 흘린 암살자가 눈만 굴려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놈은 이 상황이 즐거운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비아냥댔다.
“솔즈베리 공작 각하……. 공명정대하신 분인 줄 알았더니, 개뿔……. 잔악무도하기 그지없으십니다……? 하하하, 하…… 컥!”
놈의 얼굴을 피가 터지도록 걷어찬 그레이안이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으나, 겉보기에만 그런 것일 뿐. 그는 당장이라도 이 개자식을 죽이고 싶은 충동과 싸우는 중이었다.
“크흑, 킥…… 킥킥…….”
피부가 터져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그레이안을 돌아본 암살자가 정신이 나간 듯 웃었다.
일단은 놈을 시야에서 치우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그레이안이 막 명령을 내리려던 차였다.
“이건 경고다, 솔즈베리 공작. 이제 시작일 뿐이야. 그러게, 적당히 건방지게 굴었어야지. 저주받은 짐승 새끼 주제에…….”
참다못한 빌이 놈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콰직―.
암살자의 입안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놈의 눈이 회까닥 뒤집히고 입에 뿌연 거품이 맺혔다.
“으, 으헉?! 뭐야, 갑자기?!”
화들짝 놀란 빌이 암살자를 내팽개쳤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암살자는 눈을 까뒤집은 채 그대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주, 죽은…….”
“…….”
그레이안은 이미 시신이 된 것으로 보이는 사내의 모습을 싸늘히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다가가 놈의 상태를 확인했다.
맥박도 뛰지 않고, 호흡도 멎었으며, 눈동자의 반응도 없다.
죽은 게 확실한 상태였다.
“아, 아니, 주군, 저는 그냥 멱살만 잡았는데……!”
“……그렇지. 네가 죽인 게 아니다. 입안에 숨겨둔 독약을 씹고 자결한 거야.”
당황해 허둥지둥하는 빌에게 그레이안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잠시 굽혔던 몸을 일으킨 그는 죽은 암살자의 시신을 차갑게 응시하며 명령했다.
“죽은 시체들에겐 더 얻을 것도 없으니, 전부 불태워라. 하나도 남김없이.”
“아…… 알겠습니다! 주군!”
그레이안은 고개를 한 번 까닥이곤 돌아섰다. 그의 머릿속에 암살자가 죽기 전 남긴 말이 메아리쳤다.
‘그러게, 적당히 건방지게 굴었어야지.’
이 습격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너무도 훤했다.
사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크게 동요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은 경우가 달랐다.
조금이라도 대응이 늦었더라면 글로리아가 다쳤을지도 모른다. 아니, 놈들이 그녀를 납치해 갔을 가능성도 있지. 그리고 에이프릴…….
습격자들이 에이프릴을 해치려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건방지다고……?’
그레이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누굴 죽일 듯이 분노하는 일이 드물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선연한 증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말, 똑같이 돌려주지.”
사람 된 도의도 지키지 않는 자들에게, 일말의 자비도, 용서도 베풀지 않을 생각이었다. 더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