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행복을 바라는 기도
글로리아는 못내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머뭇거렸다.
“자는 줄 알았는데…… 헉, 혹시 우리 때문에 깬 거야?”
“끼아앙―.”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어 보이자, 글로리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아, 그런데 저 꽃은 뭐야?”
“꺄웅.”
사람으로 변해 설명해 주면 될 테지만, 에이프릴은 이대로 글로리아의 품에 안겨 좀 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하며 하품하거나 앞발로 쓱쓱 세수를 했다. 글로리아의 어이없어하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됐어. 말 안 해도 알아. 블레셋이 주고 간 거지?”
“……?!”
어…… 어떻게 알았지?! 에이프릴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글로리아를 올려다보았다.
글로리아는 씨익 웃으며 에이프릴의 귀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원래 엄마는 다 아는 법이야! 우후후!”
“…….”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아는 에이프릴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한편에선 그레이안이 당황한 기색으로 파란 꽃을 살펴보고 있었다.
“블레셋이라면…… 그 청룡 수인 소년……? 솔즈베리 성에 어떻게 침입한 거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에이프릴은 ‘나도 모름’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서 슬그머니 딴청을 피웠다.
.
시곗바늘은 11시 3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지만, 자정이 지나지 않았으니 아직은 에이프릴의 생일이었다.
“자, 우리 가족끼리만 따로 축하하는 거야.”
케이크에 초를 꽂아주며 글로리아가 말했다.
아까 연회장에서도 케이크를 먹었지만, 이 케이크는 크고 화려했던 그 케이크와는 달랐다.
분홍 버터크림 위에 조금 삐뚤삐뚤한 초콜릿색 글씨로 ‘에이프릴, 생일 축하해.’라고 쓰여 있는 작은 케이크.
어느 모로 보나 글로리아가 직접 만든 것이 틀림없는 케이크였다.
“그레이안이랑 같이 만들었어.”
“……!”
그건 또 매우 뜻밖이라, 에이프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레이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레이안은 민망한 듯이 엷게 웃고는 뒷덜미를 쓸어내렸다. 조금 쑥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모양은 좀 그렇지만…… 맛은 괜찮을 거란다. 레시피대로 만들었으니…….”
“……꺄웅.”
그레이안 앞으로 다가간 에이프릴이 그의 손등에 앞발을 쓱 올렸다.
나름대로 감사의 표현이었다. 잘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착하구나.”
그레이안의 반응을 보니 잘 전해진 것도 같다. 그의 커다란 손이 뻗어와 토끼의 작은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에이프릴은 그가 마음껏 쓰다듬게 내버려 두면서 글로리아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한창 초에 불을 붙이는 중이었다.
“으아……. 다 됐……다!”
성냥을 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어째 불안해 보였지만, 아무튼 간에 13개의 초에 다 불을 붙인 글로리아가 성냥불을 냉큼 흔들어 꺼버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에이프릴을 향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파란 눈은 즐거움을 가득 담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생일 축하하자! 나랑 그레이안이 노래 부를 테니까, 노래 끝나면 네가 입으로 바람 불어서 촛불 끄는 거야! 간단하지?”
에이프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 의문이었다.
공작님이 노래를 부를 거라니…… 도저히 상상이 안 갔다. 그냥 부르는 척만 하지 않으려나?
그러나 잠시 후.
그레이안은 진짜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것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토, 아니, 에이프릴의~.”
물론 글로리아의 노래하는 목소리가 더 컸다. 하지만 어쨌든 그레이안도 노래를 불렀다. 에이프릴을 위해서.
‘공작님이…….’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눈만 깜박이던 에이프릴은, 어서 촛불을 끄라며 글로리아가 재촉하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멍하니 있던 사이에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 있었던 것이다.
‘촛불을…….’
에이프릴은 테이블 위에 팔짱을 끼고 서서 13개의 초를 노려보았다.
입으로 후 불어서 끄는 건 재미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에이프릴은,
폴짝!
휘익―!
날렵한 돌려차기로 강풍을 일으켜 촛불 13개를 모조리 꺼버렸다.
“괴…….”
망연히 눈을 깜박이던 글로리아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굉장하다…….”
‘훗.’
에이프릴은 귀를 쫑긋 세우며 의기양양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곧이어 뻗어온 글로리아의 손이 마구 쓰다듬는 바람에, 위엄이고 뭐고 사라져 버렸지만.
.
세 사람은 케이크를 나눠 먹고 사이좋게 양치도 하고서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에이프릴의 왼쪽에는 그레이안이, 오른쪽에는 글로리아가 누워 있었다.
작은 토끼는 어둠 속에서 귀를 쫑긋거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힐끔거렸다.
“잘 자, 에이프릴…….”
글로리아가 하품을 하며 웅얼거리더니 눈을 감았고, 그레이안도 졸린 눈을 깜박이며 “좋은 꿈 꾸렴.” 하고 인사를 건넸다.
“웅꺗.”
짧게 답례한 에이프릴은 잠시 자는 척을 하다가, 슬그머니 실눈을 뜨고서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
솜 이불을 꼬옥 쥔 앞발을 꼼지락거리다가, 아까는 쑥스러움에 미처 꺼내지 못했던 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고마워, 내 생애 최고의 생일이야.’
행복해지고 싶던 때가 있었다. 행복은 나에게 사치가 아닐까 싶은 생각에 마음껏 웃지도 못했던 시절.
죄책감에 울고 슬퍼하던 그때가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스며든 이 행복이 에이프릴은 꿈만 같았다.
너무 행복하니 오히려 불안해지기도 하는구나. 어느 날 갑자기 이 행복을 잃을까 봐.
‘우리 가족이 계속 행복할 수 있게 해주세요…….’
에이프릴은 실로 오랜만에 기도란 것을 해 보았다. 신이, 혹은 세계수가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 * *
‘참, 살다 살다 별짓을 다 해 보는군.’
아르윈은 여장을 하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여장이라 함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그의 생물학적 성별은 여성이었으나 보통 남성의 모습을 취하곤 했고, 그 자신도 제 성별을 무엇이라 확실하게 정의한 적 없었으므로.
그래도 어쨌든 남성에 가깝지 않을까― 천 년이 넘도록 그리 생각하며 살아온 탓에, 아르윈은 여성복을 입어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래서, 지금 이 복장이 너무나 불편했다.
‘블라우스는 왜 이렇게 껴? 그리고 치마 허리는 왜 이렇게 꽉 죄이는 건데? 젠장, 팔자에도 없는 소화불량에 걸리겠네.’
옷이 너무 답답해서, 먹은 게 위장을 통과하지 못하고 식도로 역류할 것만 같았다.
아르윈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안색으로 차를 홀짝거렸다.
그의 건너편, 두세 블록쯤 떨어진 장소에는, 오늘의 ‘미끼’가 불안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 자식…….’
눈썹을 한껏 찡그린 아르윈은 이를 악물며 놈을 노려보았다. 저 마음에 안 드는 놈.
저 자식의 정체는 다름이 아니라 인세구원회에서 병사로 일했던, 어느 귀족 집안의 사생아라는 바로 그놈이었다.
원래는 인세구원회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가둬놓을 작정이었지만, 너무 시끄럽게 구는 데다 밥을 지나치게 많이 처먹고 지저분하기까지 해서, 그냥 미끼로나 쓰기로 했다.
그러나 인세구원회의 배후가 저걸 덥석 물 거라는 보장은 없다. 저건 상한 미끼였으니까.
‘저 자식의 가문이 인세구원회에 깊이 연루되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때였다.
“……!”
놈의 곁으로 누군가 은밀히 접근해 왔다. 아르윈은 찻잔을 내려놓고 건너편 길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괴한은 척 봐도 수상해 보였다.
그자는 예의 병사 놈과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놈을 으슥한 골목으로 이끌고 갔다.
아르윈은 테이블에 찻값과 팁을 재빨리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골목으로 달려갔다.
기척을 최대한 죽이고서, 놈들과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 나갔다.
“……는, 그래서…….”
“……가…….”
“……하지만…….”
골목은 어둡고 비좁았으며, 놈들이 대화하는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아르윈은 기절 마법을 날릴 준비를 하고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조금만 더…… 이제 곧 사정거리였다. 세 걸음, 아니, 두 걸음만 더―.
콰직―.
……발밑에서 무언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후드를 쓴 괴한이 이쪽을 홱 돌아보았다.
‘젠장.’
들킨 게 확실한 상황. 아르윈은 근처의 쓰레기 더미에 몸을 숨기는 대신, 차라리 표적을 향해 달려가 기절 마법을 연사했다.
그러나 표적에 맞기는커녕, 괴한이 전부 피하는 바람에 허튼짓을 한 게 됐다.
괴한은 심지어 예의 병사를 방패로 쓰더니, 기절 마법이 그에게 명중하자 그를 내버리고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아르윈은 마법을 써서 속도를 내면서 괴한을 뒤쫓았다.
그러나 놈의 속도도 만만치 않게 빨랐고, 좀처럼 거리를 좁힐 수 없었다.
‘대체 뭐 하는 자식이야? 얼굴이라도 좀 보자.’
아르윈은 기절 마법을 날리는 대신, 마력으로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저 후드라도 벗겨 보려는 심산이었다.
펄럭―.
그러나 놈의 후드가 막 벗겨지려는 순간, 갑자기 나타난 또 다른 괴한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르윈이 일으킨 바람에 그자의 후드가 펄럭이면서 독특한 홍채가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노란색이 섞인 푸른 홍채.
본 적 있는 눈이었다.
아르윈이 재빨리 그자를 잡아채려 했지만, 그자는 아르윈의 구속 마법을 간단히 파쇄한 후 자신의 동료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
이동 마법의 마력흔이 썰렁한 골목 안을 잔류했다.
아르윈은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노란색이 섞인 푸른 홍채.
아르윈이 아는 한, 그런 특이한 눈을 지닌 ‘마법사’는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세낙.’
아인스턴 국왕의 직속 마법사, 세낙이었다.
.
아르윈이 세낙을 만난 것은 5년 전쯤,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에서 열린 마도학회에서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세낙이라고 합니다.’
한참을 즐겁게 이야기한 상대가 특이한 홍채를 지녔다는 사실은 이름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더해서 아인스턴 국왕의 직속 마법사라는 사실도.
당시에 아르윈은 변장을 하고 가명을 댔으니, 세낙이 아르윈을 알아볼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윈은 그를 똑똑히 알아보았다. 그 괴한을 데리고 도망친 마법사는 틀림없는 세낙이었다.
세낙은 아인스턴 국왕의 직속 마법사. 그렇다는 얘기는…….
“인세구원회의 배후는 아인스턴의 국왕, 라니에로야.”
“…….”
아르윈이 확신을 담아 던진 말에 그레이안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생각할 거리가 많겠지. 아르윈은 그레이안이 혼자 심사숙고하게 내버려 두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은 인세구원회의 배후가 라니에로 왕임을 100% 확신하게 되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지 궁리할 따름이었다.
‘미끼는 완전히 상했어. 같은 방법은 두 번 이상 안 통할 거야.’
세낙을 붙잡는 것은 당연히 매우 어렵다. 마법사이니까. 그러나 그 괴한 놈이라면…… 그놈의 정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문제이지만.
‘그 병사 놈은 쭉정이라 쓸모가 없고.’
골목에서 무슨 대화를 했느냐, 더 아는 게 있거든 실토해라, 캐물어봤자 수확이 없었다.
미끼로서 역할도 다했으니 병사 놈은 이제 쓸모가 없다고 봐야 한다. 집에나 가라고 해야지.
‘집……. 그렇지, 그 병사 놈의 집안을 좀 더 샅샅이 털어 봐야 하려나.’
손으로 턱을 괸 채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문득 그레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아르윈…….”
“……?”
“계속 그 차림으로 있을 거야?”
“…….”
아르윈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리더니 눈빛이 싸늘해졌다.
자신이 여전히 여성복 차림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오늘 본 건 잊어라.”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닥치고 그냥 잊어.”
아르윈이 그레이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그레이안은 머쓱한 웃음을 흘리며 그의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별생각 없이, 진심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으며.
“잘 어울려, 아르윈. 그게 네 취향이라면, 힘들게 감출 필요 없다고 생각…….”
“취향 아니라고!”
아르윈이 버럭 소리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복도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그레이안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