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검을 선물로 받은 에이프릴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반짝거렸다. 그만큼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는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검을 선물할 걸 그랬나? 에이프릴의 환심을 사는 덴 역시 검만 한 선물이 없는…….
‘음, 아니야.’
난 검에 대해서는 뭐가 좋은지 잘 모르는 문외한이니까. 그리고 에이프릴과 그레이안의 사이도 이 기회에 좀 더 돈독해져야지.
“정말 감사해요, 공작님!”
폴짝 뛰어오른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곧바로 민망해하며 팔을 풀더니 딴청을 피우긴 했지만.
‘보기 훈훈한 광경이로구만. 아무튼, 나도 슬슬 선물을 줘 볼까.’
내가 준비한 선물은 안나가 타이밍 좋게 가져다주었다. 아주 커다란 상자로,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안나에게도 비밀이다.
“엄청난 걸 준비하셨나 보네요, 마님.”
“뭐, 신경 좀 썼지.”
새침하게 웃으며 상자를 들어 올린 나는 에이프릴의 곁으로 총총 다가갔다.
마침 나를 발견한 에이프릴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래, 상자 크기가 심상치 않지? 내가 이번에 작정을 했거든. 음하하하.
마침내 에이프릴의 앞에 다다라,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커다란 상자를 건넸다.
“에이프릴, 여기 내 선물이야. 생일 축하해.”
“가, 감사합니다, 공작 부인…….”
에이프릴은 얼떨떨한 기색으로 상자를 건네받더니,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싶은 듯이 나를 힐끔거렸다.
그리고 그레이안과 다른 사람들도, 내가 에이프릴에게 무엇을 선물했는지 궁금한 눈치였다.
“저어…… 풀어봐도 될까요?”
내 안색을 살피던 에이프릴이 소심하게 허락을 구했다.
뭐 물어볼 것까지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당연하지. 널 위한 선물인걸? 네 마음대로 하렴.”
그러자 설핏 웃은 에이프릴이 상자를 빈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장식 리본부터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에이프릴의 눈 색을 닮은 분홍빛 리본이 스르륵 흐트러지고, 마침내 상자를 열어보는 에이프릴의 표정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곧이어 모습을 드러낸 선물은―.
“……!”
사실 한 가지가 아니었다.
“이, 이게 다…….”
에이프릴이 말을 버벅거렸다. 크게 뜨인 두 눈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뺨을 긁적거렸다.
‘좀 과했나……?’
내 선물은 총 일곱 개였다.
일단은, 에이프릴이 훈련할 때 입기 좋은 편한 옷을 상하의 세트로 두 벌.
에이프릴은 붉은색 계열이 잘 어울리지만, 푸른색 계열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두 벌로 준비했다.
그리고 그 옷과 잘 어울리는 가죽 부츠 한 켤레. 무슨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거라 엄청 튼튼하다고 한다.
용암지대도 무리 없이 다닐 수 있다나?
다음으로는 금장식이 달린 허리띠. 이것도 그 마수 가죽으로 만든 거다.
더해서 반장갑. 이건 또 다른 마수의 가죽으로 만든 거라는데, 구하기 엄청 어려운 가죽이라고 들었다.
어쩐지 비싸더라. 하지만 비싼 값을 하는 장갑이었다.
체온 조절 기능이 있어서, 추운 날씨에 손이 시리거나 더운 날씨에 땀이 찰 일이 없다고 하니까.
그리고 마지막 두 가지는…… 앞의 물건들과 비교하자면 다소 소박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손수 만든 머리끈.’
동그란 모양의 원석들을 굵은 실로 엮어 만든 거다.
마크라메 공예 같은 거라고나 할까? 훈련할 때 에이프릴은 머리를 묶곤 하니까, 나름 유용하게 쓰일…….
“너무 마음에 들어요!”
별안간 큰 소리로 감탄한 에이프릴이 두 눈을 초롱초롱 반짝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내 폴짝 뛰어와 내 품에 폭 안기더니, 심지어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나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그레이안의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도 격한 반응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검 선물이 최고인 줄로 알았는데……?
“특히 머리끈……. 공작 부인이 직접 만드신 거죠?”
“……!”
어, 어떻게 알았지? 귀신인가? 족집게 토끼다!
“너무나 마음에 들어요, 정말 감사해요, 공작 부인.”
에이프릴은 내 옷자락에 뺨을 비비적거리더니, 어느 순간 토끼로 변신해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저, 저기, 에이프릴? 지금 네 생일 연회 중이란다? 어서 예장한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끼우웅……!”
……떼어놓으려 해도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아서, 결국 연회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 상태로 있어야 했다.
* * *
생일 연회는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이 났다.
에이프릴은 방으로 올라와 깨끗이 목욕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방 한편에는 오늘 받은 생일 선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에이프릴은 그중에서 중요한 선물 몇 개만 쏙쏙 골라내 자신의 침대 옆에 두었다.
그레이안과 글로리아가 준 선물, 솔즈베리 성의 사람들이 준 선물, 그리고 제이드와 로드리의 선물도 있었다.
아무리 값비싼 선물을 많이 받았다 하여도, 에이프릴은 소중한 사람들이 준 선물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제이드와 로드리가 준 장식 끈은 검에 달아야지.’
그레이안이 선물해 준 검이 마침 두 자루라 다행이었다. 이걸 예상하고 검을 두 자루 선물해 달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또…….’
다음으로는 글로리아가 준 커다란 상자를 열어보려던 에이프릴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막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듯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상대는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로 스며들었고, 에이프릴은 옆에 둔 검으로 손을 뻗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콱― 검 손잡이를 힘껏 그러쥔 에이프릴이 날렵하게 뒤를 돌아보며 검을 휘둘렀다.
휙―!
날카로운 검날이 달빛에 희게 반사되었다. 검 끝에 겨누어진 사람은, 다름 아닌―.
“……블레셋?”
에이프릴의 놀란 얼굴을 담은 암청색 눈이, 초승달처럼 가느다란 곡선을 그렸다.
“안녕, 에이프릴.”
.
블레셋은 약속대로 생일에 찾아와 주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어쨌든 자정은 안 지났으니까.
“생일 축하해요, 에이프릴. 선물을 줄 테니, 손을 내밀어 볼래요?”
에이프릴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블레셋의 살짝 서늘한 손이 에이프릴의 손을 감싸 쥐었고, 곧이어 새끼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
눈을 동그랗게 뜬 에이프릴이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느 틈에 끼운 것인지, 푸른 보석이 박힌 은빛 반지가 자연스럽게 자리해 있었다.
“블루 다이아몬드예요. 마음에 들어요?”
반지는 뫼비우스의 띠 모양으로 꼬인 은빛 링 사이사이에 파란 다이아가 촘촘히 박혀 있는 형태였다.
솔즈베리 공녀로 지내오면서 여러 가지의 다양한 보석을 자주 보아온 에이프릴이었지만, 이런 반지는 또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잘은 몰라도 아주 귀중한 물건인 것 같은데…….’
이런 걸 자신이 받아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는 표정으로 에이프릴이 블레셋의 눈치를 살폈다.
블레셋은 한쪽 눈썹을 쓱 치켜세우더니, 조금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당신을 위한 선물이에요, 에이프릴.”
그리 말하는 블레셋의 목소리는 진지하기 그지없어서, 장난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에이프릴은 반지를 낀 손가락을 소심하게 만지작거리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을 구했다.
“정말…… 제가 받아도 되는 거겠죠?”
“물론이죠. 내가 그걸 누구에게 주려고 여기까지 날아왔겠어요?”
블레셋의 말에 에이프릴은 눈을 크게 뜨고는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 날아왔어요?”
“……?”
그냥 말이 그렇단 얘기였는데, 정말로 날아온 것으로 받아들인 에이프릴 때문에 블레셋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블레셋이 이렇게나 크게 웃는 것은 몹시 뜻밖이었기에, 에이프릴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만 깜박거렸다.
‘늘 차분할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크게 웃기도 하는구나.
.
“여기, 이건 두 번째 선물.”
“두 번째도 있어요……?”
떠나기 직전, 블레셋은 에이프릴의 손에 파르스름한 꽃 한 송이를 쥐여 주었다.
캄파뉼라를 닮은 그 꽃은 마치 요정의 드레스처럼 파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신기한 꽃을 본 에이프릴의 눈동자에 또다시 놀라움이 깃들었다.
“그 꽃은 ‘밤빛 요정의 드레스’라고 하는데, 물을 주지 않아도 일주일 동안은 시들지 않죠. 시들고 나서는 약재로 쓸 수 있으니 약제사에게 물어보도록 해요.”
드레스 같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이름이 ‘밤빛 요정의 드레스’라니. 에이프릴은 못내 신기해하며 파란 꽃을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블레셋은 신기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구나, 새삼 생각하면서.
“그럼, 이제 정말로 갈게요.”
“아……!”
“잘 자요, 에이프릴. 좋은 꿈 꿔요.”
옅은 미소를 머금은 블레셋이 창가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깜짝 놀란 에이프릴은 재빨리 바깥을 살펴보았지만, 블레셋의 모습은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친 에이프릴은 블레셋이 준 꽃을 화병에 꽂아 침대 옆 협탁에 두었다.
밤빛 요정의 드레스. 이름처럼 신비로운 꽃이 내뿜는 파란빛은 묘하게도 사람을 홀리는 데가 있었다. 마치 이 꽃을 주고 간 이처럼.
‘……이제 자야지.’
멍하니 꽃을 응시하던 에이프릴은 고개를 휘휘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블레셋은 만날 때마다 깊은 잔상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청룡 수인의 신비한 분위기 때문인가?
‘공작 부인은 블레셋을 경계하는 눈치였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로리아가 준 커다란 상자에서 수제 머리끈 두 개를 꺼낸 에이프릴은 그것을 품에 안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솜이불을 폭 덮고, 토끼 모습으로 변신한 에이프릴이 앞발로 머리끈 두 개를 꼬오옥 껴안았다.
그래도 역시, 오늘 받은 것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선물은 바로 이 머리끈 두 개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글로리아가 손수 만들어 준 것이니까.
에이프릴은 머리끈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눈을 감았다.
내일은 꼭 일찍 일어나서, 엄마랑…….
* * *
“……잠들었나 봐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두 인영이 은밀히 말을 주고받았다.
“케이크와 꽃만 놓고 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자는 아이를 깨울 순 없으니.”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네……. 생일 축하 노래 부르고 촛불 끄는 거, 어릴 때 꼭 해 봐야 하는데.”
“아인스턴 왕가에 그런 풍습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군요.”
“아, 아인스턴 왕가의 풍습이라기보단, 그냥 제가 생각해 낸 거예요! 하하…….”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토끼의 뛰어난 청력은 기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
에이프릴은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지금 들려오는 이 목소리들은…….
“그럼, 케이크는 여기에 놓고…….”
“응? 이 꽃은 뭐지?”
‘……공작님과 공작 부인!’
잠에서 확 깨어난 에이프릴이 눈을 번쩍 떴다.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키자, 몽롱했던 정신이 순식간에 맑아졌다.
에이프릴은 파란 꽃을 살펴보는 두 사람을 향해 냉큼 외쳤다.
“끼앙!”
그러자 움찔한 두 사람이 홱 고개를 돌려 에이프릴을 쳐다보았고, 에이프릴은 동그란 눈을 마구 깜박이다가 자리에서 폴짝 뛰어올랐다.
“에이프릴?! 일어났―.”
“꺄아앙!”
멋지게 도약한 작은 토끼가 글로리아의 품에 쏙 안착했다.
토끼는 보송보송한 뺨을 부드러운 옷자락에 비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들어 글로리아를 올려다봤다.
이내 황당한 듯이 너털웃음을 흘리는 글로리아의 목소리가 에이프릴은 듣기 좋았다.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는 따뜻한 눈빛도, 보기 좋았다.
“웅꺄앙…….”
간지럽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에이프릴의 마음속에 포근한 봄기운처럼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