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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90화 (90/144)

##  90화. 12월 25일

시간이 흘러, 어느덧 12월 23일.

이제 내일모레면 에이프릴의 생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시간 참 빠르다니까.

‘우리 토끼는 지금 뭐 하고 있으려나?’

일주일 전부터 솔즈베리 공작성은 에이프릴의 생일을 위한 준비로 바빴고, 당사자인 에이프릴은 평소보다 좀 더 들떠 있는 듯했다.

볼 때마다 폴짝폴짝 뛰고 있으니 누가 봐도 기분 좋은 토끼였다.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이 블레셋과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은 건지 아직 알아내지 못했는데.’

오늘 슬쩍 떠볼까? 기분 좋은 토끼가 얼떨결에 실토해 버릴지도.

‘흠…… 그렇다면.’

나는 서랍에서 통역 귀걸이를 꺼냈다.

이 망할 고물은 아르윈이 수리해 줬음에도 제대로 작동할 확률이 매우 낮아, 7일에 1번 정도 멀쩡해지곤 했다.

‘이게 칼윈 가의 보물 창고에 있던 물건이라 했던가……. 피오렌 공작성의 파티에서 칼윈 공작에게 은근슬쩍 떠봤더라면…….’

수상한 사람 취급받았겠지. 보나 마나.

그리고 제이드가 이 귀걸이를 비롯한 여러 가보를 훔쳐 달아났다고 했으니…… 칼윈 공작은 말을 꺼낸 나를 의심했을 게 분명하다.

‘말 안 하길 잘했어.’

칼윈 공작, 루벨라이트 칼윈은 나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좋은 사람 같지도 않았고. 적당히 실속을 챙기면서 체면도 차릴 줄 아는…… 영리한 사업가 혹은 정치가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는데…….

‘뭐랄까, 제이드의 완성형? 그런 느낌이야.’

제이드 녀석이 제 아버지를 싫어하는 건 혹시 동족 혐오인가.

……아, 아니지. 칼윈 공작은 희대의 바람둥이었지……. 제이드가 싫어한 건 바로 그 점이었을지도.

그 녀석, 의외로 순수한 구석이 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토끼나 보러 가자!’

귀걸이를 착용한 다음, 숄을 걸치고 방을 나섰다. 오늘도 솔즈베리 공작령의 날씨는 추웠다. 봄은 도대체 언제 오려나.

‘얼른 봄이 와야 우리 토끼의 데뷔탕트 무도회도 열릴 텐데…….’

매년 3월 13일, 엘로윈 왕국에서는 13세가 된 소녀들을 위한 데뷔탕트 무도회가 열린다. 장소는 당연히, 수도 아발론의 왕궁.

데뷔탕트 무도회를 위한 드레스는 보통 한 달 전부터 준비하는데…… 흠, 우리 에이프릴은 좀 더 일찍 준비하면 어떨까 싶다.

‘일찍 준비할수록 좋아. 그래야 인기 많고 유명한 의상실을 독점할 수 있을 테니……!’

에이프릴에게 가장 예쁜 옷을 입힐 생각에 화르륵 타오르기 시작했다. 좋아, 당장 오늘부터 알아보……는 건 좀 유난인가?

.

에이프릴은 방에 없었다.

이 토끼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건가 싶던 중, 지나가던 하인이 ‘공녀님은 장서실에 계십니다.’ 하고 넌지시 알려주었고, 나는 에이프릴을 찾아 곧장 장서실로 향했다.

‘우리 토끼, 책 읽는 것도 참 좋아한다니까.’

그런데 연애 소설이나…… 뭐 그런 건 읽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역시 연애 눈치가 하나도 없는 토끼라 연애 자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인가?

뭐, 에이프릴이 ‘결혼 안 하고 엄마랑 평생 살 거야.’ 하면 나야 좋지! 으하하하!

사위 후보 놈들은 영 못 미덥고, 에이프릴이 누굴 데려와도 썩 성에 차지 않을 것 같으니…….

‘내가 ‘우리 딸이 너무 아까워!’ 하는 전형적인 팔불출이 될 줄이야.’

빙의 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아니, 에이프릴의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장서실의 문을 열었다.

에이프릴을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최대한 소리 죽여 걸음을 옮기는데,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로드리, 그리고 제이드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로드리는 호위 기사 임무 중일 테고…… 제이드는…… 이 녀석은 왜 있는 거야? 지금은 기사단 훈련 시간 아닌가? 설마 농땡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제이드가 씩 웃는다. 이 요망한 녀석이. 어딜 눈웃음으로 모면하려 들어?

나는 제이드를 흘기며 옆을 지나쳐 갔다. 로드리는 나를 향해 말없이 묵례했고, 나도 고개를 까닥여 주었다.

‘자, 그럼, 토끼는…….’

책을 읽는 중―이 아니라, 책상 위에 엎어져 잠들어 있었다.

정확히는 읽던 책 위에 발라당 널브러진 채였는데, 책이 토끼보다 훨씬 컸다. 이거 무슨 백과사전 같은 건가.

‘오늘도 연애 소설은…….’

……없군. 전부 정치, 경제, 지리학……. 국가경영론? 이런 것도 읽어?

‘우리 토끼…… 혹시 나중에 엘로윈의 국왕이 되려는 걸까?’

엘로윈의 국왕은 선출직이니 에이프릴이 나서지 못할 것도 없지.

왕좌에 앉아 근엄하게 정무를 보는 토끼를 떠올렸다가 그만 푸흡 웃고 말았다.

‘위엄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귀엽기만 한 임금님…….’

잔웃음을 흘리며 토끼의 털을 살살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에 심장이 다 두근거릴 지경이다. 보들보들 보송보송 귀여운 토끼.

“끼얏웅…….” (고기…….)

“……응?”

그때, 토끼가 뒤척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잠꼬대 같았다. 그런데 통역되어 머릿속에 들어온 걸로 보아…….

‘잠꼬대도 통역이 되는구나!’

그렇다면……!

이 기회를 놓칠세라, 나는 에이프릴에게 냉큼 말을 걸었다.

“에이프릴?”

“꺙……. (웅…….)”

오, 대답한다.

두근두근……. 이거 왠지 좀 떨리는데.

나는 달래듯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있잖아, 엄마가 궁금한 게 있는데~.”

“끼앙……. (으응…….)”

“필리온 산의 마을에서, 블레셋이랑 헤어질 때 무슨 대화했어?”

과연……! 토끼의 대답은!

“꺄우웅……. (비밀이야…….)”

……쳇, 쉽게 넘어오지 않는군.

‘뭐……. 그럴 거 같긴 했어.’

하지만 포기할 수야 없지. 다시 한번 더……!

“에―.”

재차 에이프릴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하려던 순간이었다.

토끼가 몸을 뒤척이더니 반짝 눈을 떴다.

잠에서 깨고야 만 것이다……!

‘젠장, 좋은 기회 다 날아갔네.’

나는 내심 안타까워하며,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 앞발로 눈을 비비는 토끼를 바라보았다.

토끼는 입을 쩌억 벌려 하품을 하더니, 앞발을 앞으로 쭉 뻗으며 엉덩이는 뒤로 쑥 뺀 자세로 기지개까지 켰다.

그러고는 입맛을 다시듯 쩝쩝거리며 풀썩 앉더니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어, 그래, 안녕. 나는 어색하게 손을 올려 인사했다. 그러자 토끼가 자신도 앞발을 하나 들어 올리며 똑같이 인사해 주었다.

아, 뭐야, 너무 귀여워. 웃음을 참으며 토끼 앞발에 하이파이브를 했다.

“……?”

고개를 갸웃한 토끼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이어서 보송보송한 앞발이 내 손바닥을 탁 쳤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나는 실실 웃으며 토끼의 앞발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끼아앙?” (점심 먹었어?)

“응? 아니, 아직.”

“웅꺄앙! 끼앙!” (그럼 먹자! 배고파!)

폴짝폴짝 뛰던 토끼가 단번에 훌쩍 도약하더니 내 어깨에 찰싹 달라붙었다.

아이고, 그래, 점심 먹으러 가자. 나는 웃으며 토끼를 감싸 안고 걸음을 옮겼다. ……로드리와 제이드, 저 녀석들도 하는 수 없이 같이 먹어야겠구만.

* * *

공기의 온도가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듯했다. 코를 킁킁거리던 에이프릴은 이내 반짝 눈을 떴다.

“…….”

꿈에서 본 장면이 아직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본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보통은 맨정신일 때,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으니까.

‘아무래도 조만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에이프릴은 앞발로 턱을 짚고 고민했다. 닉스의 정령석은 에이프릴과 늘 함께였다.

닉스는 깊이 잠들어 있었지만, 에이프릴은 그 존재감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공작님과 공작 부인에게 말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에이프릴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큰 위협은 아니었으므로.

‘내가 조심하면 돼. 그리고…… 닉스도 도와줄 테니까.’

조만간…… 닉스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것 같다.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켠 에이프릴은 폴짝폴짝 뛰어 창가로 향했다. 당연하지만, 토끼의 모습으로 커튼을 여는 건 불가능하다.

에이프릴은 하는 수 없이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그리고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와……!”

창밖의 풍경을 보자마자 에이프릴은 크게 감탄을 터뜨렸다. 하얀 세상이 반사된 분홍 눈이 좀 더 옅은 색을 발했다.

12월 25일 아침,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에이프릴의 생일을 축하해 주듯이.

* * *

“꺄앙!”

에이프릴 녀석, 처음 정원에 나왔을 땐 사람 모습이었는데.

“끼얏웅!”

눈이 가득 쌓인 걸 보고는 신이 나서 폴짝폴짝 뛰더니, 결국 토끼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끼아앙!”

하얀 토끼가 하얀 눈밭을 마구 뛰어다녔다. 눈밭에서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며 아주 열심히 노는 중이었다.

쟨 춥지도 않은가 봐. 난 코트 자락을 좀 더 여미며 덜덜 떨었다. 입으로 뱉는 숨이 공기 중으로 뿌옇게 퍼진다.

“캬앙!”

별안간 로드리의 발치로 달려간 에이프릴이 로드리의 발목을 앞발로 마구 때렸다.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은데. 당최 뭘 요구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로드리는 긴가민가 하는 듯하더니, 이내 새끼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붉은 털을 지닌…… 조금 커다란 고양이처럼 보이는 모습.

“꺙!”

토끼가 바로 그거라는 듯이 앞발을 샥 휘둘렀다. 곧이어 빙글 돌며 폴짝 뛰더니, 뒷발을 샤샤샥 움직여 로드리에게 눈 세례를 퍼붓는다.

졸지에 눈으로 범벅된 붉은 호랑이는 꼭 설탕 묻힌 핫도그처럼 보였다.

부르르 몸을 떨어 눈을 털어내더니, 잠시 머뭇거리던 호랑이가 앞발을 한 번 휘둘러 토끼에게 눈을 쏟아부었다.

“캬앙!”

폴짝 뛰며 피한 토끼가 이번에도 어김없이 호랑이에게 눈가루를 들이부었다.

그렇게 엎치락덮치락하며 잘도 노는 둘을, 나는 슬그머니 사진기를 꺼내 촬영했다.

찰칵―.

‘이 사진들도 사진첩에 끼워야지.’

내가 만든 사진첩은 이미 에이프릴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나는 앞으로도 에이프릴의 사진을 잔뜩 찍어서 우리 토끼가 성장하는 과정을 사진첩에 간직할 예정이다.

물론 그레이안과 다른 사람들의 사진도 있지만.

“얘들아! 그만 놀고 거실로 가서 따뜻한 코코아나 마셔!”

저러다 감기에 걸릴 듯해, 에이프릴과 로드리를 소리쳐 불렀다.

코코아 소리에 먹보 토끼는 눈을 번쩍이며 엄청난 속도로 달려왔다. 코코아가 그렇게 좋으니……? 무슨 대포알인 줄 알았네.

* * *

에이프릴의 생일 연회는 저녁 여섯 시부터 시작되었다.

“공녀님, 축하드립니다.”

“공녀님, 정말 축하드려요. 이건 저희 영지에서 가져온 선물…….”

“이제 열세 살이시니 내년 3월에는 데뷔탕트 무도회에 참석하시겠군요.”

“드레스는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의상실을 한 곳 추천해 드릴까 하는데…….”

각지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에이프릴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고, 선물도 가득 쌓였다. 심지어는 국왕이 보낸 선물도 있었다.

상자 크기로 보아, 작고 반짝이고 비싼 것일 예감이 드는데…… 궁금하니까 이따 에이프릴이랑 같이 풀어봐야지.

“에이프릴, 생일 축하한다.”

그리고 그레이안도 에이프릴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며 선물을 주었다. 전에 그레이안이 주기로 약속했던, 실전용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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