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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89화 (89/144)

##  89화. 협상은 성공적

왕실 시종이 안내해 준 장소는 피오렌 공작성 본관 1층에 있는 응접실로, 오늘의 접선을 위해 피오렌 공작이 마련해 준 자리였다.

“폐하, 솔즈베리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라.”

응접실에 도착해 시종이 고하자, 닫힌 문 너머로 고고한 음성이 전해져 왔다.

곧이어 시종이 문을 열었고, 나는 심장이 바짝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끼며 걸음을 뗐다.

‘기,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응접실 안에 들어선 순간,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자, 이내 시야로 들어온 것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선 얼굴.

어디선가 본 듯하지만, 기억으로는 없는…….

글로리아는 구면일 테지만, 나는 아니기 때문이겠지.

“솔즈베리 공작 부인, 이렇게 단둘이 이야기를 나눠 보긴 처음이로군.”

엘로윈의 국왕, 베노아 액시스 엘로윈이 웃으며 운을 뗐다. 저 말인즉 예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는 뜻이다.

내 기억으론 가물가물하지만, 결혼식에서 봤었을 수도 있다. 그레이안과 나의 결혼식에는 왕족도 참석했었다고 하니까.

‘당시에는 정신이 나가 있어서 그런 사실이고 뭐고 신경 쓸 겨를이 하나도 없었으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정중히 예의를 갖추어 묵례했다. 엘로윈의 최고 권력자 앞이라 그런가, 역시 좀 긴장이 된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최대한 공손하고 진중한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인사했는데, 갑자기 베노아 왕이 웃기 시작했다.

고개를 반쯤 들어 올린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저기, 왜 웃으시는……?

“그렇게 긴장할 필요 없네, 너무 깍듯이 굴 필요도 없고. 자, 어서 이리로 와서 앉게.”

베노아 왕이 자신의 앞자리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당황해서는 조금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뭐랄까……. 예상했던 거랑은 좀, 아니, 많이 다른 분위기인데……?

“내가 엘로윈의 국왕이기는 하나,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거나 무엇이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닐세. 엘로윈의 ‘국왕 선출 방법’은 아인스턴과는 많이 다르거든. 중앙 정부가 운영되는 방식도 그렇고.”

“……?”

“그러니 나를 어려워할 필요는 없다네. 자, 차 마시겠나?”

“네…… 네? 아니, 제가―.”

베노아 왕은 심지어 내 잔에 직접 차를 따라주기까지 했다. 이 임금님, 완전 파격적이잖아!

“히비스커스, 로즈립, 엘더베리 꽃에 사과를 블렌딩한 차일세. 향긋하고 가볍지. 입맛에 맞을 거라네.”

“가, 감사합니다…….”

눈을 마구 깜박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연한 붉은빛의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자, 달고 시큼한 맛과 사과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헐.’

완전 맛있다. 나는 잠시 이성을 잃고 차를 몇 모금 더 홀짝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베노아 왕이 배를 잡으며 웃고 있었다.

‘으아니.’

민망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냉큼 찻잔을 내려놓자, 베노아 왕이 여전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더 들지 않고. 마음껏 음미하시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자, 쿠키도 드시게나.”

베노아 왕이 테이블 위의 쿠키 접시를 내 앞으로 쭉 밀어주었다.

나는 당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는 기분으로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이,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건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베노아 왕은 금갈색의 머리와 눈을 지닌, 선하고 부드러운 인상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금사자 수인이기도 하다.

금사자 수인들은 수명이 길고 체력이 강하며 머리도 좋다고 한다. 용에 비견되는 영물에 속해 있으니 당연하다고 봐야 하려나.

이제껏 워낙에 괴상한(……) 용들만 봐 와서인지, 금사자 수인인 베노아 왕도 비슷한 느낌으로 대하기 껄끄러운 상대가 아닐까 예상했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이 푸근함은 도대체…….’

……그래도 방심하지 말자. 아무리 친절해도 상대는 국왕이니까……!

“그래, 파티는 즐거웠나?”

“네,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피오렌 공작 부인과 친해졌다던데?”

“그…… 그게, 어쩌다 보니…….”

편하고 일상적인 주제로 대화를 시작했지만,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갈 때 즈음에는 본론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철도 사업에 관심이 있다지.”

“그렇습니다.”

“흠,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엘로윈 왕국 전역에 철도를 놓는 데 공을 들여왔네. 그러나 몇 가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지.”

베노아 왕이 말해 준 ‘현실적인 문제’란 다음과 같았다.

1. 전시에 열차를 점령당하면 적군의 활로가 될 수 있다는 점.

2. 보수와 유지를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가는 탓에 반대의 목소리도 높다는 점.

3. 두 번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인스턴 왕국인들을 상대로 관광 산업을 개방하는 수밖에 없는데, 테러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점.

4. 열차에 쓰일 연료인 마정석이 부족하다는 점.

이렇게 네 가지였다.

“마정석 문제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호오……. 그런가? 어떻게?”

“아시다시피 저는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습니다. 나비들은 감각이 남달라 탐색 작업에도 뛰어납니다. 나비들을 시켜 마정석 광산을 찾아내게 하면 됩니다.”

사실은 원작의 정보를 통해, 대규모 마정석 광산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는 거지만…… 나비들을 활용한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든 가능한 방법이니까.

“그거 참 놀랍고도 고마운 일이로군.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엘로윈의 철도 사업을 위해 이렇게나 적극적으로 나서 줄 줄은 몰랐네. 몹시 뜻밖이야.”

은근히 뼈가 있는 말이었다. ……역시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라니까. 나는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저도 이제 엘로윈 왕국의 일원이니 평생 이곳에서 살다 죽게 되겠지요. 나라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보는 베노아 왕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날카로운 느낌이라기보단, 지금 이 상황을― 나라는 사람을 흥미롭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나는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철도 사업을 인수하게 되면, 재정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어떻게?”

계획했던 대로 신호를 보내자, 잠시 후 안나가 고급스러운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사진기였다.

“아인스턴 왕국인들을 상대로 이런저런 사업을 할 생각이거든요.”

나는 베노아 왕에게 사진기의 기능을 설명하면서, 앞으로의 사업 계획을 간단명료하게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 사진기 외에도 여러 발명품을 아인스턴 왕국에 수출―.”

“굉장해!”

사진기를 사용해 본 베노아 왕이 별안간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손에는 찻잔과 쿠키를 촬영한 제법 그럴듯한 사진이 들려 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나?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천재로군!”

“네? 아니, 저보단…… 솔즈베리 공작가의 마법사가…….”

사진기 발명에는 아르윈의 공이 컸다. 나는 마도 공학에는 문외한이라, 그냥 아이디어만 낸 수준이니까.

구체적인 설계도나 작동하는 원리 따위는 전부 아르윈의 솜씨란 말씀.

“솔즈베리 공작가의 마법사라, 아르윈 리벤티움 말인가? 그 사람이라면 나도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지.”

베노아 왕은 사진기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고 내 사업 계획도 긍정적으로 보는 듯했다.

이만하면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나는 웃음을 감추며 준비해둔 말을 꺼냈다.

“그 사진기는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폐하.”

“이거 참…… 뜻밖에 기쁜 선물이로고. 정말 고맙네, 솔즈베리 공작 부인.”

그렇게 사진기를 선물로 받아 기분이 좋아진 베노아 왕과, 철도 사업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마저 이어나갔다.

“철도 사업을 개인에게 맡기기에는 우려되는 점이 많아. 그래서 솔즈베리 공작 부인에게 사업을 전부 양도할 수는 없네.”

“그럼…… 어떻게 하는 편이 이상적이라고 보십니까?”

“나는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 철도 사업의 일정 지분을 넘겨받고 마정석 공급을 담당했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일정 지분이라 하심은 몇 퍼센트쯤…….”

“오십 퍼센트. 딱 절반일세. 마정석 공급은 철도 사업의 핵심이니 그 정도는 받아야겠지.”

오십 퍼센트라, 나쁘지 않다.

내 쪽에선 마정석 공급만 담당하고 나머지 자잘한 일들― 이를테면 설비라든가 운영이라든가, 혹은 보안이라든가……

이런 복잡한 요소들은 왕가에서 맡겠다는 거니까.

“그리고, 이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이 사업은 나, ‘베노아 액시스’와 액시스 가문에 상속되지 않네. 어디까지나 ‘엘로윈’의 이름을 지닐 때만 내가 운영하는 걸세.”

“아, 네, 알겠습니다.”

아까는 기억이 흐리멍덩했는데, 지금은 또렷이 짚어낼 수 있었다.

엘로윈의 ‘국왕’이란 개념은 아인스턴과는 여러모로 다르다는 사실을.

아인스턴의 왕위는, 당연하지만 세습제다. ‘아인스턴’의 피를 잇는 자가 왕위를 물려받는 것.

그러나 엘로윈의 왕위는 그런 개념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선출직……. 귀족 회의와 민선 의회에서 과반수로 뽑힌 자가 다음 대 왕이 되며, ‘엘로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 이름도, 국왕 본인과 배우자, 직계 자손만 물려받을 수 있고, 삼대부터는 물려받지 못한다.

‘어쨌든 종신직이기는 하지만, 국왕의 힘이 막강하지는 못해. 뭘 하려고 해도 귀족 회의와 민선 의회, 양측에서 제재가 들어올 테니까…….’

국왕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아인스턴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볼 수 있었다.

이런 특이한 시스템을 만든 것은 엘로윈의 초대 국왕이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그럼, 솔즈베리 공작 부인, 오십 퍼센트 지분을 넘겨받는 데 동의하나?”

“아, 네! 물론입니다. 마정석 공급은 제가 담당하고요.”

“그래, 그러면…….”

이후로는 계약서를 작성하고 철도 사업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하며 느낀 점은, 베노아 왕은 생각이 매우 깊고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거였다.

“표 값에는 상한선이 있어야 하네. 그래야 가난한 이들도 표를 사서 열차를 이용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 다음 대 왕이 함부로 인상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제해 둬야겠지.”

그렇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전부 맞는 말이라, 나는 별달리 반박할 생각도 안 들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칠 뿐.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상상했던 것과는 참 다른 사람이로군.”

하하……. 그야 진짜로 다른 사람이니까요. 비밀이지만.

* * *

피오렌 공작령을 떠나기 전, 에이프릴에게 줄 선물을 샀다.

일단은 간식거리 몇 개. 당연하다. 먹을 것을 안 사 가면 에이프릴이 실망하리란 건 우주의 진리이니까…….

‘온갖 맛이 나는 사탕……. 이거 꼭 해× 포터에 나오는 거 같네. 나 해× 포터 좋아했는데…… 영화 보고 싶다…….’

다음엔 영화와 상영관을 발명해 볼까……. 아직 구체적이지 않은 사업 구상안을 몽글몽글 떠올리면서, 에이프릴에게 선물할 간식을 골라 나갔다.

‘버터와 얇은 햄을 넣은 샌드위치…… 이거 좋아할 거 같네. 그리고 피오렌 공작령의 명물이라는 피시 파이…… 맛없어 보이지만, 의외로 괜찮을지도.’

그밖에 솔즈베리 공작령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여러 가지 먹거리를 사고, 에이프릴이 좋아할 만한 아기자기한 소품이나 인형도 샀다.

그렇게 에이프릴을 위한 선물을 잔뜩 사들고 솔즈베리 성에 도착하자마자―.

“꺄앙―!”

토끼가 폴짝 뛰어오며 나를 반겨주었다.

“에이프릴, 잘 있었어?”

내 품에 쏙 안긴 토끼를 헤헤 웃으며 쓰다듬어 주자, 토끼는 내 옷자락에 뺨을 비비며 애정을 표현했다.

“끼아아앙―.”

한참을 애교 부린 후, 어서 선물을 내놓으라는 듯이 토끼가 앞발을 파닥거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은 나는, 이내 토끼님 앞에 얼른 선물을 대령해 드렸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토끼님―.”

“캬아앙!”

그런 말투로 놀리지 말라며 토끼가 호통을 쳤다. 아이고 무서워라. 나는 간신배처럼 넙죽 엎드렸다.

“토끼님의 입맛과 안목에 부합하는 귀한 선물들로 엄선했나이다~.”

“캬우웅……!”

선물을 뜯다 말고 토끼가 앞발로 내 머리를 팍팍 때렸다. 역시 패륜 토끼…….

“꺄앙!”

그러나 맛있어 보이는 간식거리를 보자 대번 화색을 띠고는, 선물 상자 주변을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정말 바보 같고 단순하다…….

토끼와 나는 응접실로 가서 간식을 먹으며 나머지 선물들도 마저 풀어보았다.

와중에 그레이안이 허겁지겁 달려와 합석하게 되었다.

“늦게 마중 나와 죄송합니다, 부인.”

“죄송은요, 오늘도 종일 바빴을 거 아니에요.”

피시 파이 조각을 포크로 쿡 찍어 먹여 주자, 그레이안의 뺨이 보기 좋게 발그레해졌다.

“꺄아앙―!!”

한편에선 다람쥐 인형을 보고 기분 좋아진 토끼가 탄성을 질렀다. 토끼는 폴짝폴짝 뛰다가, 뒷발로 서더니 권투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다람쥐 인형을 마구 때리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파파팟팍―.

“…….”

저러라고 사준 거 아닌데…….

“캬하항.”

그래, 뭐……. 행복하다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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