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비즈니스
“비앙카.”
와우. 꿀 떨어질 듯 달콤한 목소리에 나는 내심 감탄을 흘렸다. 이 양반, 딱 봐도 비앙카에게 푹 빠져있구만.
“늦어서 미안해. 별일은 없었나?”
별일. 그거 완전 있었죠. 그러나 비앙카는 해맑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파티장까지 날아오다가 저혈압으로 기절할 뻔했지만 다행히 무사하고, 히아신스 시몬 양이 갑자기 울며 뛰쳐나가 버렸지만 괜찮아요!”
피오렌 공작은 그거 정말로 괜찮은 게 맞냐는 표정이었다. 이어서 그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또 기절할 뻔했다니……. 지금은? 어지럽거나 하진 않고?”
“네! 멀쩡해요! 아, 그리고 여기 이분이―.”
별안간 비앙카가 나를 가리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피오렌 공작의 첨예한 시선이 내게로 와닿았다. 속을 훤히 꿰뚫어볼 듯이 날카로운 눈빛이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신데, 날다가 떨어진 저를 받아 주셨어요!”
“……솔즈베리 공작 부인……. 글로리아 아인스턴?”
넵, 접니다. 나는 피오렌 공작의 의심 어린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럴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역시 만만치 않게 어려운 상대다.
“……흐음.”
짧게 비음을 흘린 피오렌 공작이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얼마간 침묵이 흐른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아내를 도와주신 것에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비앙카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거나 앓곤 하지요.”
“아……. 그렇군요. 감사는 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디까지나 우연히 돕게 된 것뿐이라…….”
“생각과는 달리 겸손한 분이시로군요, 솔즈베리 공작 부인.”
피오렌 공작이 살짝 웃으며 한 말에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와 대화를 나누고 갔던 이들이었다.
왠지 황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표정 관리에 주력했다.
“제 아내와 제법 친해지신 모양이고.”
“네? 아, 그게…….”
막 대답하려는 찰나, 비앙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요!”
이 순간만큼은 비앙카가 다소 원망스러웠다.
뱁새님, 당신 남편 표정 좀 보라고요. 내가 무슨 소형 조류를 잡아먹는 뱀이라도 되는 양 경계하고 있잖아!
“글로리아와 저는 이제 친구 사이예요. 그렇죠, 글로리아?”
순수하게 기뻐하며 묻는 말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고……. 나는 반쯤 포기한 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러자 비앙카가 더욱 활짝 미소를 지으며 내 팔을 꼬옥 끌어안는 게 아닌가.
바로 그 순간 피오렌 공작의 눈동자가 번득였다. 곧이어 천천히 손을 뻗은 그가 비앙카와 나를 자연스럽게 떨어트려 놓았다.
그러고는, 자신에 비하면 한참 작은 비앙카의 몸을 슬그머니 끌어당겨 안는다.
난데없이 피오렌 공작의 품에 쏙 안기게 된 비앙카가 물음표를 띄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피오렌 공작은 살벌한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아니, 왜 저한테 질투하고 난리세요…….’
진짜 별걸 다…….
왠지 그럴 거 같았지만, 피오렌 공작은 진짜로 애처가에 팔불출인가 보다. 질투의 화신이기도 하고.
‘예쁜 사랑하세요…….’
나는 해탈한 기분으로 핑거푸드나 입에 넣었다.
.
파티가 한창 무르익어갈 때 즈음, 오늘의 특별 게스트들이 마침내 홀에 당도했다.
“아인스턴 왕국의 칼윈 공작, 그리고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테나 위즈벨 박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밖에도 대여섯 명 정도의 아인스턴 왕국 인사들이 호명되었다. 동시에 파티장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웅성웅성 이야기를 주고받거나, 귀엣말을 속삭였다.
“아인스턴 왕국의 인간들……”
“칼윈 공작이라면, 저도 전에 본 적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던가요?”
“수인 혐오자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뭐랄까, 그런 것보단 이익을 가장 중요시하는 사람 같았죠…….”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박사라고?”
“마도학계에서는 꽤 저명한 인사예요. 그런데 친 수인 성향을 자주 드러내서, 아인스턴 국왕이 예의주시한다던…….”
“그리고 저기 저, 녹색 머리의 남자는…….”
나는 구석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를 엿들으며 샴페인을 홀짝거렸다.
파티의 주최인 피오렌 공작과 비앙카가 특별한 손님들을 앞장서 맞이하는 중이었고, 다른 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내 관심은 단연 칼윈 공작이 독차지했다. 그도 그럴 게,
{인물 정보 ― 루벨라이트 칼윈 (New!)
아인스턴 왕국의 귀족으로, 칼윈 공작가의 가주.
소문난 바람둥이로 17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무려 21명이다.
제이드의 친부로, 가출한 아들을 찾는 중.}
……그렇다.
저 남자가 바로, 제이드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제이드랑 하나도 안 닮았어!’
아무래도 제이드는 어머니를 닮았나 보다.
그 어머니는…… 지금은 고인이시지. ……생각해 보니, 제이드가 혹시 그런 이유로 에이프릴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건가?
‘……여하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저 중에 글로리아와 아는 사이인 사람이 상당히 많을 텐데. 일단 칼윈 공작은 백 퍼센트다.’
‘어느 날 갑자기 기억을 잃어버렸다!’ 하는 황당한 콘셉트를 계속 유지할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얕보여선 안 되지.
왜냐면 나는 저 사람들을 시작으로, 아인스턴 왕국인들의 지갑을 털어먹을 거니까…….
‘……슬슬 그것을 개시해야 할 때로군.’
아르윈이 만들어준 마도구로 호출하자, 사용인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나가 냉큼 파티장으로 달려왔다.
안나의 손에는 바로 그것이 들려 있었다. 바로 그!
‘사진기!’
마도 공학으로 제작한 사진기는 가볍고 작은 크기로 휴대하기 편리했다.
안에는 일회용 필름이 들어 있고, 피사체를 촬영하면 즉석에서 바로 사진이 나온다. 그것도 무려 컬러로.
‘마도 공학의 위대함을 새삼 깨달았달까…….’
흐뭇하게 사진기를 쓰다듬은 나는, 안나와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내가 저 특별한 손님들을 마주할 기회는 빠르게 찾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어……? 저분은?”
“헉, 글로리아 왕녀님?”
……이러니 저러니 해도, ‘글로리아’는 아인스턴 왕국 출신이니까 말이지.
{글로리아, 저 사람들 다 너와 구면이야! 참고해! 이름이 생각 안 나는 사람이 있거든 우리가 알려줄게!}
든든하구만.
아인스턴 왕국의 손님들이 자못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예의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들 모두에게 생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랜만이네요.”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 처세술은 완벽했고 실수는 없었다.
다만 아인스턴 왕국의 손님들은 나를 해괴한 것 보듯 했다.
‘진짜 글로리아 공주가 맞나……?’ 하는 의문이 떠오른 표정들.
의심하지 마세요, 물론 제가 진짜 글로리아는 아닙니다. 하지만 모두에겐 비밀이죠.
‘얌전히 내 상술에 넘어오기나 하라고.’
“그럼, 지금부터 제가 여러분께 보여드릴 특별한 물건이 있는데요.”
나는 비즈니스 미소를 입에 건 채로 안나에게 손짓했다.
내 뒤에 서 있던 안나가 사진기가 든 상자를 들고 다가왔고,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확 쏠렸다.
‘저게 뭐지?’ 하는 표정들.
‘후후후, 기대하시라.’
나는 일부러 느릿한 동작으로 상자를 열었다. 사람들의 기대감이 더욱 부풀 수 있도록.
그리고 마침내 은빛의 사진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두의 얼굴에 떠오른 반응은…….
“……?”
딱 그거. 물음표였다.
‘그러시겠지.’
이 사진기가 뭐에 쓰이는 물건인지 당장은 감이 오지 않을 테니까.
나는 여전히 자본주의 미소를 지은 채로 상자에서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직사각형의 사진기는 확실히 이곳 사람들이 보기엔 이질적인 디자인이었다.
“다들, 이게 뭔지 궁금하시겠죠?”
내 물음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칼윈 공작도 나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고, 피오렌 공작은…… 비앙카를 품에 쏙 안은 채 이쪽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 저런 로맨스 소설 남주 같은 양반이 다 있냐.’
나는 속으로 구시렁대며 사진기를 들고 피오렌 공작 부부 앞으로 다가갔다.
내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비앙카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피오렌 공작은 눈썹을 쓱 휘며 경계하는 기색을 보였다.
“피오렌 공작 각하, 그리고 공작 부인. 잠시 협조를 구해도 될까요?”
“그 물건―.”
“당연하죠! 그런데 그게 뭔가요, 글로리아? 그리고 비앙카라고 편하게 부르세요!”
피오렌 공작이 대답하기도 전에 비앙카가 냉큼 선수를 쳤다.
하하하. 이럴 줄 알았지롱. 다 계산하고 일부러 이 부부 앞으로 온 거라니까?
나는 피오렌 공작 보란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이쯤 되니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비앙카의 질문에 대답했다.
“협조 고마워요, 비앙카. 이 물건이 뭔지는 곧 알게 될 거예요. 위험한 건 아니니 걱정 말고요.”
비앙카가 신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이 뱁새 레이디……. 진짜 심각하게 순진하구나……. 피오렌 공작이 싸고도는 이유를 알 것 같긴 해…….
어쨌든 나는 한 쌍의 바선생처럼 착 달라붙어 있는 피오렌 공작 부부를 렌즈에 담았다.
그러고는 찰칵― 셔터를 눌러 두 사람의 모습을 촬영했다.
‘……좋았어.’
잠시 후, 컬러 사진이 빠르게 출력되어 나왔다. 나는 먼저 그것을 받아들고 확인해 보았다.
몇 초쯤 기다리자, 피오렌 공작 부부의 모습이 사진 안에 선명하게 나타났다.
‘역시……!’
이미 아르윈과 몇 번이고 테스트를 마친 뒤라 완벽한 성능이리라 확신하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성공하니 무척 뿌듯했다.
“자, 그럼…….”
나는 씨익 웃으며 피오렌 공작 부부와 다른 사람들에게 사진을 대공개했다.
모두, 심지어는 피오렌 공작마저 눈을 크게 뜨고 사진을 쳐다보았다.
“이게…….”
“네, 보시다시피, 이런 물건이죠.”
그리고 나는 모두에게 사진기의 기능과 쓸모를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곧 대량 생산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덧붙임도 잊지 않았다.
당연히, 사람들은 눈에 불을 켜고 사진기에 달려들었다.
“이 하나뿐만 아니라 조만간 대량으로 만들어서 판매하실 거라는 말씀이시죠?”
“이거라면 여행 다닐 때마다 즉석에서 풍경을 담을 수 있겠는걸!”
“이런 획기적인 마도구가…….”
“설계도는요? 공개하실 생각은 없겠지요……?”
그렇게 사람들의 질문에 바삐 답해 주느라 한참이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참고로 설계도 질문을 한 사람은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박사라는 테나 위즈벨이었다.
난 당연히 향후 10년간은 공개할 생각 없다고 답했고.
‘뭐, 사진기를 뜯어보면 설계도쯤이야 유추해낼 수 있을 테지만…….’
이 위즈벨 박사는 그걸로 이득을 볼 사람 같지는 않다. 마도공학자라더니, 단순히 학문적 호기심에 물어본 것 같다고나 할까.
어찌 됐든, 사교계에 사진기를 선보이는 일은 성공적으로 해냈고―.
“이 사진기는 오늘의 파티를 열어주신 피오렌 공작 부부에게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서비스도 잊지 않았다.
비앙카는 너무 기뻤던지 폴짝 뛰다가 뱁새로 변해 버렸다.
……보면 볼수록 에이프릴이 생각난단 말이지. 원작의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한’ 에이프릴이 딱 이런 느낌이었을 것 같다.
.
그렇게 사교 행사에서의 활약을 무사히 마친 후.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십니까?”
“그렇네만?”
“가시죠. 국왕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약속했던 대로, 엘로윈 국왕과 독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