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뱁새는 악의가 없다
“어머나……! 그럼 당신이 그!”
‘그’ 악명 높고 지은 죄가 많은 악녀, 글로리아냐고요? 네, 맞습니다. 제가 바로 그 글로리아입니다.
흑흑……. 나쁘게 산 건 남인데 왜 내가 고생해야 하는 거냐고~! 원래 몸 주인아, 저승에서 보자. 이 한은 갚고야 말겠…….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던! 바로 그분이시로군요!”
“……?”
예상과는 다른 전개에 당황해 눈을 마구 깜박거렸다. 당연히 악녀인 쪽으로 더 유명한 줄로 알았습니다만……?
“언제 한번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이에요!”
“어, 저…….”
“괜찮으시다면 저를 이름으로 편하게 불러 주시겠어요? 저도 글로리아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 거리를 좁히는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요?
날 보는 피오렌 공작 부인의 하늘빛 눈이 초롱초롱 반짝였다. ……사심이 있어 이런다기보다는…… 그래,
{머리가 꽃밭인 사람이구나!}
나비A야, 예의 지켜 말해라.
“글로리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너무 신기하고 대단하고 동경해 왔거든요! 이렇게 친해지게 되어 너무너무 기뻐요!”
“아, 네, 그러시군요.”
만난 지 10분도 안 됐는데 갑자기 친해지고 이름도 텄다. 마냥 기쁘다기보단…… 이거 이래도 괜찮은 건가?
‘뭔가 굉장히 순진하고 사람 잘 믿고 착한 사람인 것 같긴 한데…….’
영악한 내가 이 순진한 사람을 꼬드겨 이용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살 법도…….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세계수의 나비들을 보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피오렌 공작 부인, 간단히 비앙카라고 하자. 비앙카가 두 손을 꼬옥 모아 쥐고서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해 왔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나를 동경하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워지려 하는데…… 뭐, 세계수의 나비들을 보여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소란을 피우면 안 될 것 같아서…… 조금만 불러낼게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곧이어 대여섯 마리의 나비들이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비들은 팔랑팔랑 부드럽게 날갯짓하며 비앙카의 주변을 맴돌았고, 비앙카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작게 감탄사를 흘린 비앙카가 엷은 홍조가 어린 얼굴을 두 손으로 포옥 감싸 쥐었다.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나비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슬그머니 손을 뻗는다.
그러나 비앙카의 손은 나비들의 몸체를 통과해 버릴 따름이었다.
“아, 만져지진 않네요……. 정령이라 그런 거겠죠?”
살짝 아쉬운 기색으로 말한 비앙카가 손을 거두었고, 나는 주변을 흘끗 살펴보았다.
어느새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기에, 이쯤에서 그만 나비들을 불러들일까 하는데―.
{좋아, 서비스다.}
{우수 고객 서비스.}
별안간 나비들이 비앙카의 머리 위에 자잘한 빛의 알갱이를 뿌려댔다.
놀란 비앙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도 잠시, 이번에는 푸르스름한 꽃 한 송이를 만들어낸 나비들이 그 꽃으로 비앙카의 분홍색 머리를 제법 그럴듯하게 장식해 주었다.
{예쁘다.}
{잘 어울려!}
{역시 우린 센스가 좋아~!}
그러게. 제법 서비스할 줄 알잖아? 너희의 유능함을 인정해 주마.
{와! 칭찬받았다!}
{글로리아도 역시 우리를 좋아하는 게 분명해!}
{우리가 좀 유능하긴 하지. 후훗.}
자화자찬하는 나비들을 잠시 옆으로 치워두고, 비앙카에게 진심을 담은 칭찬의 말을 건넸다.
“이 꽃은 푸른색 모란이네요. 잘 어울려요, 비앙카.”
“……!”
이런. 나도 모르게 자연스레 이름으로 부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거리를 두고 예의를 지킬 생각이었는데…….
비앙카는 여전히, 아니, 어쩌면 아까보다 훨씬 더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아 잡았다.
그러고는 매우 감격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글로리아……!!”
이러다 포옹까지 할 기세다. 어색하게 웃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한 나는, 이쯤에서 그만 나비들을 사라지게 했다.
{앗~ 더 놀고 싶었는데!}
조용히 해, 철부지야.
.
이름으로 부르며 칭찬해 준 게 결정타였던 것일까?
비앙카는 내가 어미 오리라도 되는 양 졸졸 따르며(이 경우에는 어미 뱁새라고 해야 할 것 같지만……), 심지어는 내 팔에 꼬옥 팔짱을 낀 채로 파티장까지 이동했다.
‘왜 나한테…… 남편은 어디에다 두고…….’
그리고 하도 조잘대는 탓에 TMI를 잔뜩 알게 되고야 말았는데, 예를 들면 비앙카는 20세로 나보다 더 어리다는 점이라든가, 4월이 생일이라는 사실이라든가, 온실에서 꽃을 가꾸는 게 취미라든가…… 뭐 그런 것들이었다.
“언제 한번 글로리아를 온실 티파티에 초대하고 싶어요! 나중에 초대장을 보낼 테니, 꼭 와주셔야 해요?”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없었다. 나는 내심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의례적인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비앙카와 친해져서 나쁠 건 없지. 피오렌 공작령은 부유하니 사업에도 도움이 될 테고, 무엇보다 비앙카는 착한 사람이니까.’
너무 착해서 이 사람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걱정마저 들지만…… 비앙카의 남편인 피오렌 공작이 알아서 잘 챙기고 있지 않을까?
“피오렌 공작 부인, 그리고 소, 솔즈베리 공작 부인께서 드십니다……!”
파티장 입구에 다다르자 사회자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를 소개하는 부분에선 말을 더듬더니 목소리마저 떨려 나왔다. 당신, 프로답지 못했어!
“솔즈베리 공작 부인……?”
“레이디 비앙카가 왜 저런 사람과…….”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이쪽을 흘끔거렸다. 다들 ‘왜 저 둘이 같이 왔지?!’ 하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저도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모두 인사하세요! 제 친구인 글로리아 솔즈베리 공작 부인이시랍니다!”
비앙카의 해사한 발언에 사람들은 “치, 친구?” 하며 주춤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기색들이었다.
나를 향한 경계심을 내비치며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는 이들 가운데, 누군가 당당한 걸음으로 총총 다가왔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히아신스 시몬이었다!
우리 앞에 다다른 히아신스 시몬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태연자약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네요, 피오렌 공작 부인. 그리고…… 처음 뵙겠습니다, 솔즈베리 공작 부인.”
‘처어어음?’
알폰스의 별장에서 그 난리를 쳐놓고, 뻔뻔스럽게 초면인 척하다니…… 과연 철면피였다.
듣자 하니 그레이안이 나에게 각인했다는 소문은 이미 쫙 퍼진 것 같던데.
그 문제로 히아신스 시몬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는 얘기는 안 떠도는 걸 보면…… 그녀 본인과 친구들이 그 사실을 숨기는 모양이다.
‘그래도 수치심이란 게 있긴 한가 보구나…….’
그래, 뭐. 이런 데까지 와서 사사롭게 말다툼하고 싶지 않으니, 적당히 맞장구를…….
“두 분이 초면이라고요?”
……쳐주려 했는데, 비앙카가 불쑥 끼어들었다.
“제가 듣기론, 시몬 양이 솔즈베리 공작 부부가 머물던 알폰스의 별장에 찾아가 민폐를 끼쳤다던데요?”
순식간에 사위가 싸악 얼어붙었다. 히아신스 시몬의 표정이 딱딱해진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뱁새 레이디…… 순수한 만큼 공격력도 세구나! 악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더 강력해!
“제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요? 시몬 양?”
그저 정말로 궁금할 뿐이라는 뉘앙스였다. 악의 제로. 깜박이는 두 눈동자가 아~주 말갛다.
이런 비앙카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역시 아방한 사람이 다 이긴다니까.
“저는, 그 일은…….”
히아신스 시몬은 당황한 듯 입을 달싹이더니,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그리고 나는 어김없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얘 또 우는 거 아니야?!’
나랑 싸우다 우는 것은 괜찮다. 고작 악녀 이미지 조금 더 적립하는 정도이니까. 하지만 비앙카가 질문한 후에 울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비앙카의 이미지에 타격이 가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비앙카가 당황할 거 아니야!’
우리 뱁새 레이디는 정말로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갑자기 울기 시작하면?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 싶겠지. 기실, 비앙카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데도.
‘이 착해빠진 뱁새는 자책할 게 분명하다고.’
그건 안 되지. 자책은 잘못한 사람이 해야지, 왜 애먼 사람을 마음고생시킨단 말인가. 나는 냉큼 비앙카의 앞을 가로막으며 입을 열었다.
“시몬 양, 그때 일은 더 문제 삼지 않겠지만, 오늘은 더는 당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이만 내 앞에서 사라져 주세요.”
일부러 좀 나쁘게 말했다. 이래야 효과가 확실할 테니까.
히아신스 시몬은 충격받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리며 뒤돌아 도망쳐 버렸다…….
‘예상대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저 아가씨는 불리할 때마다 울음을 터뜨리는 미성숙한 행동을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하려나?
‘어쨌든 비앙카는 지켜냈…….’
“아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저는 사실인 줄 진즉에 알았어요. 시몬 양이 원래 좀 막무가내잖아요.”
“레이디 히아신스가 또…….”
“솔즈베리 공작 각하가 결혼하시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분께 민폐를 끼치더니.”
“심지어 알폰스의 별장에서라면…… 그때 솔즈베리 공작님이 공작 부인께 각인하셨다면서요.”
“각인 기간에 찾아가다니…… 속이 훤히 보이네요. 매우 실례되는 행동이기도 하고요.”
“어디 실례된다 뿐이에요? 품위가 없는 행동이죠. 솔즈베리 공작 부부도 몹시 당황스러웠겠어요. 나 같아도 시몬 양 얼굴 보기 싫을 거예요.”
……?
어라, 뭐지? 여론이 갑자기 내 편이 됐다. 이건 뜻밖인데.
심지어 사람들은 날 향해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오기까지 했다.
히아신스 시몬이 그레이안에게 끼쳐온 피해가 그만큼 엄청났던 건가?
‘시몬 양, 당신도 제법 빌런이었군요.’
나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비앙카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인상을 설핏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이었다.
“시몬 양은 왜 거짓말을 한 걸까요?”
그러게요. 상상 이상으로 염치가 없는 사람인가 봅니다.
.
히아신스 시몬으로 인한 소동이 마무리된 후, 사람들은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는지 슬그머니 다가와 인사를 건네거나 대화를 나누고 갔다.
그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친절히 모두를 응대했다. 이 기회에 이미지 개선을 할 수 있을지도……!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 같구려.”
“그러게요. 악명대로일 줄 알았는데, 친절하고, 대화도 잘 통하던데요?”
“수인을 싫어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일세.”
크큭…….
나는 핑거푸드를 고르는 척하며 내심 음흉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이로군. 큭큭큭…….
‘……그나저나 새고기 요리가 있는데 이거 괜찮은 거냐…….’
조류 수인들이 이런 걸 먹어도 되는……?
“앗, 트로이!”
그때, 비앙카가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트로이’라면…… 피오렌 공작의 이름이잖아?
궁금해진 나는 비앙카가 보는 방향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다름 아닌 입구 쪽이었다.
그 자리에 막 나타난 한 남자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Wow……. 체격이 무슨…….’
남자는 건강미 넘치는 구릿빛 피부에 금갈색 눈을 지녔으며, 머리는 잿빛이 섞인 특이한 금발이었다.
게다가 키가 굉장히 크고 어깨가 딱 벌어져 다부진 몸이 인상적이었다. 저 남자가 바로 피오렌 공작인가 본데…….
“피오렌 공작 각하께서 드십니다!”
역시.
피오렌 공작은 사람들의 인사를 대충 흘려넘기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직 비앙카 한 사람만을 직시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