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뱁새 주의보
‘비록 조건부이긴 하지만, 언젠가 피를 내어주기로 블레셋과도 약조했고.’
조만간 엘로윈 국왕과 만날 약속도 잡았다!
‘게다가…….’
나는 방금 전에 아르윈이 주고 간 상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이 안에는 우여곡절 끝에 최종형으로 완성된 사진기가 들어 있었다.
‘후후…….’
이 사진기는 이틀 후면 열릴 사교 행사에서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 행사에는 엘로윈에 우호적인 아인스턴의 귀족들도 참석한다고 하니, 대단한 홍보 효과를 볼 수 있을 터.
‘아주 좋아. 계획대로 척척 잘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탄탄대로이면 좋겠다.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아인스턴 국왕이나, 에이프릴과 블레셋의 비밀 등등, 신경 쓰이는 점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래도 잘 헤쳐 나가 봐야지.’
그리하여 이틀 후.
고대하던 사교 행사가 열리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 * *
“그럼 다녀올게. 말썽 일으키지 말고 있어야 해! 알았지?”
“끼웅.”
알았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모르겠다. 일단 나한테서 떨어지기 싫어한다는 건 알겠다.
지금도 내 어깨 부근에 착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에이프릴, 엄마 이제 마차에 타야 해.”
“캬우웅……!”
“올 때 선물 사 올게. 착하지, 응?”
“…….”
토끼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풀썩 떨어져 나갔다.
선물 사 온다는 말에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니, 미래 예지로 나쁜 광경을 보거나 한 건 아닌가 보다.
“우리 착한 토끼. 금방 올 테니 좀만 기다려.”
“꺄웅.”
허리를 숙여 토끼를 쓱쓱 쓰다듬어 준 뒤, 근처에 서 있는 그레이안과 눈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올랐다.
그레이안은 나와 함께 가지 못하는 게 몹시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별수 있나. 일이 많아 바쁜 사람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내 앞좌석에 앉은 아르윈이 말했다. 그가 동행하기로 한 건 매우 뜻밖이었다.
그야 물론, 사교 행사가 열리는 곳까지 빠르게 가려면 마법의 힘을 빌려야 하지만.
솔즈베리 성에는 아르윈 외에도 다른 마법사들이 있으니 그들의 손을 빌리면 될 일. 그런데 아르윈이 나와 동행하겠다며 나선 건 정말로 의외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
고개를 갸웃한 아르윈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와 동시에 공기의 흐름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그냥 뭐…… 의외라서요.”
이윽고 순식간에 마력에 휩싸인 마차가 통째로 공간을 넘었다.
살짝 어지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뜨니, 창밖의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오늘 사교 행사가 열리기로 한 곳. 엘로윈 왕국 남서쪽, 대륙 전체로 보면 서쪽이지만― 어찌 됐든 엘로윈 왕국에서 제일 풍요로운 땅, 피오렌 공작령에 도착한 것이다.
.
‘우와…….’
피오렌 공작성으로 향하는 내내,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피오렌 공작성으로 가려면 그곳과 가장 가까운 도시, 아란사를 경유해야 했는데, 이곳은 피오렌 공작령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도시 조경이 매우 잘 되어 있고, 상가 건물도 아주 번쩍번쩍했다.
‘솔즈베리 공작령의 디아만트시도 제법 번화한 대도시이지만, 여기는 훨씬 더 화려한 느낌이야.’
역시, 엘로윈 왕국에서 제일 따뜻하고 풍요로운 지역이다, 이건가…….
뭐 그만큼 피오렌 공작가는 중앙 정부에 가장 많은 세금을 내고, 그 세금은 솔즈베리 공작가가 국경을 수호하는 데 보탬이 되기도 한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엘로윈 왕국은 국경 수비를 솔즈베리 공작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이미 오래전에 그렇게 굳어진 체계라 이제 와서 바꾸기도 어렵겠지만…….’
아인스턴 왕가에서 눈에 불을 켜고 솔즈베리 공작가를 무너뜨리려 하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
……그레이안과 내 결혼이 얼마나 큰 스캔들이었을지, 새삼스럽게 실감이 나기도 하고.
‘오늘 사교 행사에서도,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테지.’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나에 대한 엘로윈 왕국인들의 시선을 바꿔야 한다. 바로 오늘을 기회 삼아서.
‘잘 할 수 있어. 힘내자……!’
사교계는 처음이지만……!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나비들이 곁에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럼 그렇고말고. 우리만 믿어, 글로리아!}
{이때를 위해 우리가 시스템창을 개발해둔 거라고!}
……그건 좀 끼워 맞추기 같지만.
.
“공작 부인, 피오렌 공작성에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며 공손히 고했다.
나는 아르윈과 흘끗 시선을 교환한 뒤에 마차에서 내렸다.
아르윈은 마차에 남기로 했으니, 나는 그의 도움 없이 혼자서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으, 긴장된다.’
그래도 내 시중을 들어주기 위해 안나가 함께이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진짜로 나 혼자였으면 지금보다 더 긴장했을지도.
“마님, 잠시만요.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해 드릴게요.”
“으응, 고마워…….”
안나의 야무진 손이 내 머리와 옷 위를 바쁘게 오갔고, 나는 긴장해서인지 머릿속이 하얘진 채로 멍하니 있었다.
잠시 후, 안나가 손거울을 꺼내 내 모습을 비추어주며 말했다.
“다 되었습니다. 보세요.”
“……그래, 깔끔하네. 고마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이 완벽하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만의 말씀을요.”
안나가 생긋 웃으며 거울을 집어넣었고, 우리는 곧 있어 피오렌 공작성 본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곳의 정원도, 그 심장부에 자리한 건물도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순수하게 감탄할 여유는 없었다.
‘잘하자, 나 자신!’
사진기 팔아먹어야 해!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머지않아 본관에 도착했다.
‘사람 많네…….’
나 외에도 오늘의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홀 입구로 분주히 향하는 중이었는데, 다들 파트너가 있거나 친구와 함께였다.
……흑……. 갑자기 외로워지려 하는데. 우리 늑대 보고 싶다.
‘그래도 씩씩하게 가자!’
여기까지 왔으니 본전 뽑아야지! 나는 고개를 쳐들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으…… 엥?
“……?!”
홱!
툭―.
‘뭐, 뭐야?’
까무러치게 놀라는 바람에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지만, 가까스로 중심를 잡았다.
내 두 손바닥 위에는― 웬 분홍 새가 놓여 있었고.
‘……? ……??’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에 엉겁결에 받긴 했는데, 뭐, 뭐냐 이거. 왜 갑자기 새가 떨어지냐고……! 심지어 분홍색이야! 분홍색 새 처음 봐!
“삐잇…….”
분홍 새가 내 손바닥 안에서 바르르 떨며 작은 몸을 뒤척였다.
가만 보니…… 꼭 뱁새처럼 생겼다. ……세상에 분홍색 뱁새도 있나? 그나저나, 왜 이러지?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삐이잇―!!”
“아 깜짝이야!!”
걱정이 들기 무섭게, 분홍 뱁새가 벌떡 일어났다. 우렁찬 포효와 함께.
벌써 두 번이나 심장 떨어질 정도로 놀란 나는, 팔을 쭉 뻗어 분홍 뱁새와 최대한 거리를 벌렸다.
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으니 이게 최선이었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너무 작아서 사람들 발에 이리저리 치일 것만 같으니까.
‘도대체 정체가 뭐지? 뭐 하는 뱁새야? ……설마…… 수인인가……?’
뱁새는 동그란 눈을 깜박이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분홍색 털 때문인지 솜사탕처럼 보인다.
혹은 딸기맛 봉봉 같기도 하고. 겉보기에는 마냥 무해한 생물체 같은데…….
“삐잇―!!”
목청이 장난 아니게 높아.
한 성격 하는 뱁새일 수도 있다, 이 말이다.
“삐이이잇~!!”
제, 제발 진정해……! 뱁새가 내 손바닥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 이쪽을 힐끔거렸고.
나는 곤란한 티를 한껏 내며 어떻게든 뱁새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저기, 뱁새님? 어디의 누구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진정하세…….”
“삐이삐잇!! 삐이이잇!!”
그러나 진정하기는커녕 미친 듯이 날개를 파닥거린다. 그러다 훌쩍 날아오르더니,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게 아닌가.
이쯤 되니 무서워졌다.
‘조그마한 새에게 공포를 느끼긴 처음이다…….’
여긴 혹시 몸집이 작을수록 사나워지는 세계관인가? 에이프릴처럼?
“삐―잇!”
빙빙 도는 것을 마침내 뚝 멈춘 뱁새가 내 코앞에서 날개를 퍼덕거렸다. 다행이다. 내 머리도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삐이이~.”
뱁새는 공전하는 행성처럼 빙그르르 돌더니, 이어서 순식간에 모습을 바꾸었다.
‘역시 수인이었어!’
뱁새가 변한 사람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탐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에, 최상질의 아콰마린처럼 투명한 하늘색 눈.
뽀얀 얼굴에 발그레 피어오른 홍조.
동글동글 순한 눈매와 크고 짙은 쌍꺼풀, 예쁜 곡선을 지닌 코와 적당히 도톰하면서도 작은 입술…….
한마디로 요약해서, 아주 예쁜 사람이었다.
얼빠의 심장이 어김없이 두근거릴 정도로.
‘대박…….’
하늘에서 떨어진 뱁새가 아니라 천사였던 건가? 이렇게 사랑스러운 외모로 목청이 높다니! 사람 모습일 때도 그러려나?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레이디!”
그렇군. 사람 모습일 때도 텐션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그나저나, 구해주셔서 감사하다니?
“어, 제가 뭘…….”
“떨어지는 저를 받아주셨잖아요! 덕분에 살았어요! 레이디는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냥 지나가다 우연히 받았을 뿐인데……? 생명의 은인이랄 것까지야?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였던 건가?
“제가 저혈압이 있어서 종종 그렇게 쓰러지거든요…….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
아니, 뭐라고? 저혈압?!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거야? 응급처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당황한 나는 뱁새―영애인지 귀부인인지 모를― 레이디를 면밀히 살펴봤다. ……멀쩡한…… 것 같기는 한데…… 괜찮은 거 맞지……?
“그러고 보니 소개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비앙카 피오렌이에요!”
뱁새 레이디가 방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여전히 당황이 가시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구나, 비앙카 피오…… 아니, 뭐?
‘피오렌? 비앙카 피오렌이라면…… 설마, 피오렌 공작 부인……?!’
피오렌 공작 부인이…… 뱁새였어?!
나는 떡하니 입을 벌린 채로, 며칠 전 일을 회상했다.
‘어디 보자, 피오렌 공작은 참수리 수인이고…… 피오렌 공작 부인도 조류 수인이로군.’
사교 행사에 참석하기 전, 여러 귀족을 비롯해 피오렌 공작 부부의 정보를 수집한 바로는…… 그랬다.
그때 나는, 더 알아볼 생각도 못 하고 ‘피오렌 공작 부인도 참수리나 혹은 그에 준하는 매목 수리과 수인이겠지, 뭐.’라고 판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뱁새라니…….
뱁새는, 딱새과의 소형 조류다. 참수리와는 여러모로 크기 차이가 나는.
‘……알 수 없고 신비한 수인 세계로고. 허허허.’
하기야 파랑 까치 수인과 결혼한 뱀 수인도 있는 마당에, 뱁새와 결혼한 참수리도 있을 법하지.
나는 애써 점잖은 태도를 꾸며내며 피오렌 공작 부인에게 악수를 청했다.
“피오렌 공작 부인이셨군요.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어머, 아니에요! 레이디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저는…….”
……하 이거 참, 또다시 ‘네, 제가 바로 그 소문난 악녀입니다.’ 하고 소개할 타이밍이로군.
나에 대한 피오렌 공작 부인의 태도가 확 바뀌더라도…… 어쩔 수 없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나는 각오를 하고서 재차 입을 열었다.
“글로리아 아인스턴 솔즈베리예요.”
그러자 피오렌 공작 부인의 하늘빛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