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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85화 (85/144)

##  85화. 세계의 조율자

……블레셋의 얼굴에 표정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까무러치게 놀란 건 마을 사람들이었다.

다들 눈을 보름달처럼 크게 뜬 채로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웬 나비들이지?!”

“우와! 나비들이야! 엄마! 저것 좀 봐! 반짝반짝해!”

……이건 뭐랄까, 마을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를 제공해 준 느낌인데.

‘드론쇼…….’

{띵동―☆ 미션 완료! ‘드론쇼’를 성공적으로 실행하였습니다!}

……이런 것 좀 하지 마라.

“뭐, 뭐야? 이게 다 뭐냐고……!”

“방금…… 저 여자가 글로리아 아인스턴이라고 하지 않았어?”

“뭐……?”

한편에선 내 정체를 알아차린 인신매매범들이 경악하고 있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놈들을 짐짓 매섭게 노려봐 주었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것이, 과연 강약약강이 확실한 놈들이다.

“쯧.”

짧게 혀를 찬 나는 블레셋을 재차 돌아보았다.

녀석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자식, 로봇이냐. 반응이 너무 없잖아.

불퉁한 표정으로 블레셋을 쏘아보자니, 녀석이 별안간 픽 웃고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흐악, 뭐야.’

나도 모르게 주춤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아니, 거기서 얘기하지 왜 코앞으로 오고 그래. 난 네가 불편하단 말이다!

“과연…….”

내 앞에 다다른 블레셋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며 운을 뗐다. ……얘, 역시 키가 작구나. 하기야 인간으로 치면 14세 정도일 테니까…….

“당신이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로군요.”

……블레셋은 제이드나 로드리보다 더 애늙은이 같았다.

저렇게 폼 잡고 말하는데, 소년의 외모라 그냥 귀여워 보일 뿐…… 아니, 뭐라고? 내가 미쳤나! 눈앞의 이 녀석은 원작에서 세상의 절반을 멸망시키려 한 최종 보스라고!

“이 흉악범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뭐, 어쩔 수 없죠. 대신 강력히 처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말하며 인신매매범들을 흘겨보는 블레셋의 눈동자가 살의로 번득였다. ……역시 위험한 녀석이다.

극단적인 수인주의자라, 인간 목숨은 파리처럼 여길 게 분명하다니까.

어쨌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담했다.

“처벌은 확실하게 이루어질 거야. 엘로윈 왕국의 법대로 말이지.”

법을 지키는 건 중요하단다, 114세 소년아. 기분 나쁘다고 사람을 막 죽이고 그러면 안 돼!

.

인신매매범들은 아르윈의 아공간에 집어넣어졌다.

솔즈베리 공작령에 도착하고 나면, 재판에서 변호할 기회도 없이 바로 감옥으로 이송되겠지…….

그리고 평생 노역하며 종신형을 살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죽는 것보다도 끔찍한 삶이지.

인생의 즐거움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식사는 딱 죽지 않을 만큼만 배급받으며, 노역장에서 온종일 험하게 굴려질 테니까.

“자, 그럼…… 이제 중요한 문제인데.”

그레이안과 나, 아르윈, 우리 셋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 아르윈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여기서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 에이프릴은 어느새 사람 모습으로 변해 블레셋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룡 수인을 진짜로 찾아낸 건 좋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 녀석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아르윈의 물음에, 나는 블레셋 쪽을 힐끔 살펴보고서 답을 이었다.

“가능성이 매우 적어 보여요. 저 녀석, 성격이 나빠서.”

“역시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

저주를 풀어야 하는 당사자인 그레이안은 그저 쓴웃음을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러다 그레이안이 ‘나는 괜찮으니 반드시 저주를 풀지 않아도 상관없다’라고 할 듯해, 나는 재빨리 선수를 쳤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죠. ……불행인지 다행인지, 블레셋이 에이프릴에게 호감이 있어 보이거든요.”

사실 나로선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블레셋이 에이프릴에게 흥미를 느끼는 거야 당연한 일이다.

아픈 역사를 지닌 희귀한 토끼 수인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에이프릴의 순수함.

순수하다는 건 세상 물정 모르고 바보 같다는 게 아니다.

그야 물론 원작의 에이프릴은 딱 그랬지만……. 아무튼 그게 아니라, 순수함이란 영혼의 투명도에 대한 것이다.

에이프릴이 불의를 못 참는 정의로운 성격인 것도 다 순수하기 때문이다.

누굴 돕거나 구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도 순수하기 때문이고.

세상의 욕망과 부조리에 때묻지 않은 투명한 영혼. 그렇기에 순도 높은 빛으로 타오를 수 있는.

바로 그런 에이프릴이기에, 블레셋은 흥미를 느꼈을 테고, 이제 점차 빠져들게 되겠지.

블레셋의 인간 혐오는 인간이 지닌 천박함― 이를테면 타인을 착취하면서까지 부를 추구하는 것, 권력과 물질 지향적인 점, 욕망의 실현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점. 바로 그런 속성들에 기인한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그런 속성들에 정확히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이다.

진창에서 피어난 순수한 연꽃 한 송이. 블레셋의 이상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에이프릴의 도움을 좀 받아야 할지도요.”

다만 둘이 만난 지 이제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블레셋도 에이프릴이 원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승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가져볼 수 있겠지. 지금 당장 도움을 받지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에이프릴의 순수함이 저 녀석을 백화시키길…… 진심으로 바라는 수밖에 없어.’

에이프릴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블레셋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까르르 웃고 있었다.

그런 에이프릴을 보는 블레셋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확실히…….

‘……청춘이네.’

봄날의 꽃내음 섞인 산들바람처럼 부드러웠다. 최종 흑막답지 않게 말이지.

.

“……아하.”

으으, 저놈의 ‘아하’!

블레셋에게서 저 ‘아하’를 압수해야 한다. 쟤가 저럴 때마다 진심으로 무섭다고.

“그런 거였군요.”

우리가 이 마을에 온 목적을 들은 블레셋의 반응은 사뭇 덤덤할 따름이었다.

화난 것 같지도 않고, 질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저 무심한 ‘아하’였다.

‘음흉한 놈 같으니…….’

하여간 저 녀석의 표정이나 목소리에서 뭘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니까. 용족은 다 저런가? 아니, 이쯤 되니 같은 용족인 아르윈이 선녀처럼 보일 지경.

“어쩐지…… 공작 각하, 당신에게서 사특한 주술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청룡 수인인 저는 그런 나쁜 기운에 아주 민감하지요.”

블레셋이 그레이안을 보며 이야기했다. 다시 토끼로 변한 에이프릴은 그레이안의 품에 쏙 안겨 있었다.

블레셋의 시선이 잠시 토끼를 향하는 듯하더니, 이내 눈길을 올리며 설핏 미소를 짓는다. 기계적으로 자아낸 듯한 미소였다.

“사정은 잘 알았습니다.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청룡의 일부라는 것은, 쉬이 내어줄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그럴 줄 알았다. 사실 나 같아도 생판 모르는 남이 다짜고짜 나타나 피 좀 달라고 하면 꺼림칙할 것이다.

그러니 블레셋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는 입술을 꾹 내리 물었다가, 가슴께에 올린 손을 힘껏 주먹 쥐며 앞으로 나섰다.

“……부탁할게. 우린 정말로 간절해. 그레이안이 이대로 저주에 먹히는 것은, 꿈에서라도 보고 싶지 않아.”

“…….”

간절히 호소하는 나를, 블레셋은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온정이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눈으로.

……블레셋을 설득시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역시 안 되는 걸까? 이렇게나 까다로운 녀석일 줄은…… 알았지. 이게 ‘블레셋’이니까.

그래도, 나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인간은 싫어해도 수인에게는 관대한 녀석이니까.

솔즈베리 가문의 비극에도 틀림없이 선심을 베풀어줄 거라고…….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

긴 침묵이 흐른 후에, 블레셋이 마침내 말을 꺼냈다. 푸른 눈은 평소보다 밝은 색으로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글로리아 아인스턴, 당신은 수인을 혐오합니까?”

“뭐? 아니……. 혐오하지 않아. 그리고 이왕이면 ‘솔즈베리’라고 해줄래? 아인스턴 왕가와는 거의 척지다시피 했거든.”

“……당신에 대한 소문을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수인을 혐오하고, 학대하고, 폭력을 일삼는 희대의 악인. 그게 당신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개과천선했다고요? 솔직히 말해서, 믿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글로리아 아인스턴 본인이 맞습니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조금 움찔하고 말았다. 여기서 ‘본인이 맞다’고 대답하면 거짓말하는 게 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방법이 없잖아? 살면서 때론 거짓말도 해야 하는 법이지.

“당연히 나는 글로리아 아인스턴 본인이지. 내가 갑자기 변한 게…… 의심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애써 침착한 태도로, 그렇게 대답했다.

블레셋은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이 아니로군요.”

그리 읊조림과 동시에 블레셋의 눈이 다시 깊은 물빛으로 돌아왔다. ……잠시만, 방금 뭐였던 거야?

“청룡 수인의 능력 중 하나입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간파할 수 있는…… 일종의 통찰력이죠.”

“……?”

난 거짓말을 했는데?

“아무튼 간에…… 청룡의 피를 쉬이 내어줄 수 없다는 제 뜻은 공고합니다. 그렇지만…….”

눈을 살포시 감았다 뜬 블레셋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누그러진 시선이었다.

“당신은 세계의 조율자이니까요.”

“……!”

“저는 궁금합니다. 당신이 그 역할을 완수해낼 수 있을지……. 만일 당신이 세계의 조율자로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장이 빠르게 뛴다. 긍정적인 예감이 차올랐다.

“―제 피를, 내어주도록 하겠습니다.”

.

그리하여, 청룡의 피는 ‘블레셋이 나를 지켜보다가 언젠가 마음이 내키면’ 주기로 약속받았다.

……그때가 도대체 언제일지, 과연 내가 녀석이 인정할 만한 ‘세계의 조율자’가 될 수 있을지 문제이지만, 어찌 됐든 나쁘지 않은 결론이었다.

청룡의 피만 얻으면…… 그레이안과 솔즈베리 가문은 저주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앞으로 더 열심히 하면 돼.’

수인 노예들을 구할 계획도 다 세워놨으니까 말이지. 블레셋 녀석, 나중에 내 업적을 보면 깜짝 놀라게 될 거다.

“제 아내를 구해주셔서, 정말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은혜라니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마을을 떠나기 전. 우리를 배웅 나온 뱀 아저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파랑 까치 여사님도 고마움이 가득한 얼굴로 아저씨 옆에 서 있었다.

“솔즈베리 공작 각하이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만…… 명성대로 정의롭고 자비로운 분이라는 사실을 이 일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언제나 각하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뱀 아저씨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을을 떠나게 됐다.

에이프릴과 블레셋도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말이다.

“……그럼, 그때 찾아갈게요. 에이프릴.”

“응, 꼭 다시 만나요!”

……? 그때? 그게 언제인데? 블레셋이 찾아올 거라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한 거지……?

‘어째 불안한데…….’

.

마을을 빠져나와 우리 일행만 남게 되자, 나는 에이프릴에게 냉큼 물어보―려고 했는데 에이프릴이 토끼로 변해 버렸다!

“꺄웅~!”

“……너, 일부로 변신한 거지?”

“끼얏웅?”

모르는 척 고개 갸웃하지 마라, 이 얌체 토끼야……!

이후로도 종종 기회를 노리고 떠보았으나, 토끼는 계속 모른 체할 따름이었다.

‘이 토끼 녀석이……. 나중에 두고 보자.’

방심했을 때 콕 찔러서 캐내야지.

* * *

솔즈베리 공작성에 돌아와, 나는 빠르게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국왕 폐하.]

드디어 며칠 후, 엘로윈 국왕을 알현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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