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조무래기 악당 퇴치
나는 잠시 심호흡했다.
‘좋아. 얘들아, 준비됐지?’
{당근~! 준비 만땅이지!}
{맡겨만 달라구!}
나비 녀석들, 이럴 땐 참 듬직하단 말이지.
토끼는 그레이안의 품으로 옮겨갔고, 블레셋은 가만히 선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절대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눈빛이었으나 나는 기죽지 않았다.
내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나비들은 명실상부 나의 든든한 아군이니까.
‘후, 그럼―.’
숨을 길게 내쉬며, 마침내 나비들을 소환하려던 순간이었다.
“……님! 청룡님!”
별안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뭐야?’
인상을 설핏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다급히 달려오는 마을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
하는 수 없이 잠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잘은 몰라도, 블레셋을 부르러 온 마을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으니까.
이윽고 숨을 헐떡이며 다다른 마을 사람을 향해, 블레셋이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마, 마을에, 외부인들이 침입했습니다!”
“외부인이라면, 지금 여기 있는데.”
“아니요, 이분들이 아닙니다! 방금 막 침입해온 자들인데, 인간 노예 상인으로 보입니다……!”
‘인간 노예 상인……?!’
퍼뜩 놀란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레이안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경악한 표정이었다.
한편 블레셋은 낯빛을 차갑게 굳히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이, 여길 어떻게…….”
“50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찾아온 게 아닐는지요? 여하튼, 어서 가보셔야 합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좋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어, 블레셋은 마을로 급히 향했고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얼마 후 마을 입구에 도착해 보니, 과연, 외부인 대여섯 명 정도가 마을 주민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부지깽이 따위를 들고 그들의 진입을 막는 중이었고.
“아, 글쎄, 우리는 그냥 여행객이라니까?”
“우, 웃기지 마! 너희는 인신매매범에, 살인자에, 노예 상인이잖아! 지난번에 산 아래 내려갔을 때 수배지를 본 적 있어!”
그야말로, 언제 물리적 싸움이 터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머릿수로만 봤을 땐 마을 사람들이 유리할 것 같지만, 저 인신매매범들 중에 마법사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럴 경우에는, 아무리 수가 많아도 마을 사람들이 불리해진다.
아인스턴 왕국이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고 수인들과 엘로윈 왕국을 탄압할 수 있는 이유도, 마법의 힘 덕분이니까.
긴장한 사람들 사이로 긴 침묵이 흘렀다. 그때 모습을 드러내며 앞으로 나선 것은, 당연하게도 블레셋이었다.
“……오랜만의 불청객들이로군.”
“……? 뭐야, 이건?”
열서넛 즈음 되어 보이는 소년이 분위기를 잡자, 인신매매범들은 황당하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놈들은 다분히 불쾌한 의도가 담긴 시선으로 블레셋을 느리게 훑어보고는, 씩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이거 이거, 곱상하게 생긴 도련님이네. 이건 수요가 있겠어. 여긴 죄 파충류 수인들뿐이라 실망하려던 차인데…….”
“어이! 여기 파랑새 수인도 있는데? 저기 길목에서 잡아왔다고! 봐!”
그 순간 사위가 싸악 얼어붙었다.
만면에 웃음이 피어난 건 인신매매범들뿐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충격에 젖은 얼굴로 막 나타난 일곱 번째 인신매매범을 쳐다보았다.
놈의 손에는, 파란 머리칼을 지닌 수인 여성이 붙잡혀 있었다.
‘저 사람……!’
나는 그녀를 즉시 알아보았다.
우리에게 마을 안내를 해주었던 뱀 수인 아저씨의 부인! 파랑 까치 수인이라던 바로 그 여사님이었다!
‘이…… 미친 새끼들이!’
저항하다 맞기라도 한 건지 파랑 까치 여사님의 얼굴에는 피멍이 들어 있었고, 인신매매범의 우악스러운 손이 그녀의 머리칼을 꽈악 움켜쥐고 있었다.
놈은 그 상태로 그녀를 질질 끌고 와서는, 킬킬 웃으며 다른 놈들에게 보여주었다. 마치 상품을 구경시키듯이.
“봐라, 얼굴이 제법 반반하지 않냐? 나이는 좀 들어 보이지만…….”
“야, 얼굴이 이게 뭐냐? 새끼야, 내가 얼굴은 때리지 말랬지! 흉이라도 지면 상품 가치 하락한다고!”
‘이 또라이 새끼들이…….’
방금까지 인신매매범이 아닌 척하더니, 이젠 그 짓도 귀찮아졌는지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면 비싸게 팔 수 있는 희귀 수인을 붙잡아서인지도 몰랐다. ……바로 저 파랑 까치 여사님을.
“여보!!”
그때, 여사님의 남편인 뱀 수인 아저씨가 애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저씨가 놈들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걸 마을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저놈들이라면 아저씨를 단칼에 죽이고도 남을 테니.
“어라? 뭐야, 결혼한 여자였어?”
“그럼 값어치가 좀 떨어지겠는…….”
“끄애앵―!!”
이 대노한 목소리의 주인은……!
‘토끼……!?’
놀란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토끼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안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토끼는 화난 기색으로 씩씩거리고 있었다.
“끄앵! 끼아앙!!”
“어…… 잠깐만, 저거 토끼 수인이야?”
“토끼 수인?!”
에이프릴을 발견한 인신매매범들의 눈이 희번덕 빛났다.
탐욕으로 가득한 놈들의 얼굴이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
“오, 저건 진짜로 횡재인…….”
스르릉―.
인신매매범 1이 에이프릴을 향해 손을 뻗은 것과, 솔즈베리의 기사들이 검을 뽑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기사들의 검이 놈의 목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 뒤에 선 그레이안은 스산한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죽고 싶은 모양이야. 뚫린 입이라고 아무런 말이나 지껄이는 것을 보면.”
“뭐……?”
그레이안이 차갑게 말하자, 인신매매범들은 눈을 끔벅이며 황당하다는 기색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레이안이 누구인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는 얘기는…… 이놈들은 인신매매범 중에서도 삼류라는 뜻.
“댁은 뉘쇼? 이 마을 주민은 아닌 것 같은데, 파충류 수인으로도 안 보이고…….”
건들거리던 인신매매범 1의 시선이, 기사들의 검 장식에 문득 가닿았다.
“……?”
그 검 장식은 솔즈베리 가문의 정식 기사가 되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것으로……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어, 어…… 설마?”
인신매매범 1이 주춤거렸다. 그레이안의 얼굴은 못 알아봐도, 그 문장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깨달은 듯이.
“소, 솔즈베리……?”
이내 놈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에, 다른 놈들도 점차 경악 어린 표정이 되어갔다.
“솔즈베리? 솔즈베리라고?”
“엘로윈의 공작 가문이잖아?”
“국경을 수호하고 범죄자를 잡아들인다는…….”
말을 주고받던 인신매매범들의 얼굴이 이윽고 창백하게 질렸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그레이안을 응시하는 그들의 눈동자에, 선명한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아, 아니, 설마 솔즈베리 공작……? 왜 여기에…….”
당황한 놈들과는 대조적으로― 여유만만한, 그러나 차가운 분노가 깃든 표정으로 그레이안이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나에게는 중범죄자를 즉결 처형할 권한이 있지.”
강간, 살인, 아동 학대 및 폭행, 납치와 인신매매 등, 사회를 크게 어지럽히는 중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개과천선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시에, 즉결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목숨 아까운 줄 알거든, 너희가 붙잡은 그 여성을 이리로 넘기고 얌전히 항복해라. 감옥에는 잡아넣겠지만 죽이진 않을 테니.”
참고로 인신매매범들은 종신형을 살아야 한다. 엘로윈 왕국의 법이 그렇다.
“……허…….”
인신매매범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파랑 까치 여사님의 머리채를 여전히 우악스럽게 붙은 채였다.
‘설마…….’
저 새끼들, 여사님이라도 얻고 튀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가 맞았다. 갑자기 아르윈이 잽싸게 튀어나갔기 때문이다.
“이 얌체 같은 새끼들이.”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르자 인신매매범들의 손아귀와 주머니에서 웬 쇠붙이들이 주르르 떨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아르윈의 주변으로 빠르게 날아와 공전하는 천체처럼 허공을 빙글빙글 돌았다.
자세히 보니, 그것들은 다 순금으로 만든 반지와 팔찌였다.
‘……마력이 느껴져.’
그리고 아마도, 이동 마도구일 것이 틀림없는.
“이 대마법사님 앞에서 어딜 튀려 작정을 해? 쥐새끼 같은 것들이…….”
아르윈은 예전의 인세구원회 때처럼 상당히 화난 듯이 보였다.
……이 흑룡, 가만 보면 보통 이상으로 정의로운 성격이라니까. 비뚤어진 것 같으면서도 말이지.
“뭐야……?! 저쪽에도 마법사가 있었어?!”
“야! 넌 왜 눈치 못 챘냐?”
“아니, 저건― 저 마법사는, 마력이…….”
인신매매범 놈들은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역시 저놈들 중에도 마법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대단한 마력의 소유자는 아닌 것 같지.
놈들이 혼란한 틈을 타, 잽싸게 움직인 그레이안이 파랑 까치 여사님을 구해냈다.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은 속도라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사님을 꽉 잡고 있던 인신매매범조차도.
“여보!!”
“당신…….”
뱀 아저씨와 파랑 까치 여사님이 재회하는 사이, 드디어 상황을 깨우친 인신매매범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다양하게 변했다.
그나마 붙잡고 있던 ‘상품’마저 잃었다는 사실에 성이 난 것이겠지.
“이…… 개자식들이……!”
그들 중 리더로 보이는 자가 욕지거리를 뱉었으나, 그뿐.
놈들 중 누구도 그레이안과 기사들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거겠지. 심지어 이쪽엔 아르윈도 있으니.’
결국 순순히 항복한 인신매매범들이 하나둘씩 구속되었다.
아르윈이 아공간에서 꺼낸 튼튼한 수갑이 여섯 명의 손목에 채워졌고, 나머지 한 명에게는 마력을 억제하는 특수한 구속구가 채워졌다.
이자가 바로 놈들 중 유일한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황이 일단락……된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블레셋이 앞으로 나섰다.
“과연, 대단한 분들이로군요.”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를 훑어본 물빛의 소년은, 인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입에 건 채로 말을 이었다.
“마을을 위해 애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상은 두둑이 치러드리지요. 하지만…… 이자들의 신병은 제게 넘기십시오.”
소년은 ‘자신의 힘으로 인신매매범들을 제압할 수 있음에도’ 우리의 실력을 떠보기 위해 여태 지켜본 듯싶었다.
그리고 인신매매범들의 신병을 넘기라는 것은, 즉…….
‘……이자들을 다 죽이겠다는 소리잖아!’
블레셋은 지독한 인간 혐오자다. 그러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녀석은 이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이다.
나는 황급히 뛰쳐나가 블레셋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년이 날 보며 눈썹을 쓱 치켜세웠다.
깊은 호수를 닮은 눈에는 일말의 호의도 담겨 있지 않았고, 첨예한 경계심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난 이 녀석이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확실히…… 얘는 다른 사위 후보들과는 결이 다르네.}
{위험해.}
{네가 회유하기 어려운 존재야, 글로리아.}
{그렇지만 네가 누구인지 보여준다면, 통할지도 모르지.}
나한테는 치트키가 있거든.
나는 자못 진지한 태도로 블레셋에게 이야기했다.
“이들은 분명 흉악한 범죄자들이야. 그렇지만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어, 블레셋.”
나도 모르게 반말이……. 심지어 이름까지 불러 버렸다!
‘모, 모르겠다. 이미 저질러 버린 거.’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세계수의 대행자로서, 세계의 조율자로서 허락하지 않겠어.”
“…….”
블레셋의 입가에 흐린 미소가 걸렸다. ……가소로워하는 것 같았다.
“세계의 조율자이니, 그런 것 따위…… 이미 오래전에 퇴색해 버린 낡은 약속에 불과할 텐데.”
소년은 냉소 어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당신의 선조들과 다르다고, 그리 자신하는 겁니까? 글로리아 아인스턴.”
“……!”
뭐, 뭐야? 나를 알아?
아니…… 그래, 알 수도 있겠구나. 주로 이곳에 은거한다고 해서 세상사에 완전히 어둡진 않은 모양이니.
나는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당연히, 나는 누구와도 달라. 내 선조들이고, 피를 나눈 아버지와 형제들이고 뭐고……. 나는 ‘나’라는 개인이니까.”
내 말에 블레셋은 그저 고개를 까닥했다.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로.
“그래서, 증거는?”
이 자식, 존칭을 쓰다가도 은근히 말이 짧지 않냐?
‘대략 114세 용족이니까 참고 봐주는 거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나는 블레셋을 똑바로 쳐다보며 단언했다.
“보여줄게. 바로 지금.”
그리고 마침내, 나비들이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사방에 현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