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토끼와 푸른 용
……에이프릴은 이 정적이 불편했다.
저 녀석, 왜 아직도 말이 없는 거야? 그냥 내가 사람 모습을 할까?
불만스럽게 노려보는 작은 토끼를 향해, 푸른 용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용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 뒤로 한참이 지나서였다.
“이름 모를 하얀 토끼님, 당신은 내가 두렵지 않은가 보군요.”
‘흥, 당연하지. 네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난 하나도 무섭지 않아.’
“캬훙.”
에이프릴은 보란 듯이 코웃음 치며 새초롬하게 고개를 돌렸다.
다분히 무례한 토끼를 보고도, 푸른 용은 몰래 웃음을 삼킬 뿐이었다.
“내 이름은 블레셋입니다. 당신은요?”
“캬앙.”
어느새 바짝 앞으로 다가온 ‘블레셋’이 자못 정중하게 물었으나, 토끼는 앙칼지게 앞니를 드러낼 따름이었다.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없으시다면, 계속 토끼님이라고 부르는 수밖에 없겠군요.”
“…….”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 토끼가 주둥이를 씰룩거렸다.
그냥 사람 모습을 할까, 에이프릴이 고민하는데, 블레셋의 손이 슬며시 뻗어왔다.
“끄앵!!”
그 손을 옆으로 폴짝 뛰어 피한 토끼가 무슨 짓이냐며 소리쳤다. 블레셋은 멋쩍게 손을 거두며 이야기했다.
“털에 나뭇잎이 붙어 있어요, 토끼님.”
“……!”
고개를 홱 돌린 토끼가 자신의 몸을 살펴봤다. 확실히, 등 쪽에 나뭇잎이 하나 붙어 있었다.
문제는 앞발도, 주둥이도 닿지 않는 부위라는 점이었다.
토끼는 낑낑거리며 어떻게든 나뭇잎을 떼어내려 애썼다. 폴짝폴짝 뛰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털에 수액이라도 묻은 것인지 나뭇잎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끼애앵……!”
짜증이 난 토끼가 볼멘소리로 울었다. 그런 토끼를 향해, 블레셋은 재차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며 물었다.
“내가 떼어 줘도 괜찮을까요?”
“…….”
여태 경계해온 녀석의 도움을 받으려니 굴욕적이었지만, 에이프릴은 하는 수 없이 승낙했다.
왠지 얄미운(아무래도 크고 강한 청룡 수인이라 그런 것 같은) 이 녀석보다도, 털에 붙은 나뭇잎이 더 신경질 났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토끼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블레셋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서늘한 손이 몸에 닿아온 순간, 에이프릴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 떨었다.
그러나 아주 찰나였고, 블레셋은 나뭇잎만 떼어주고서 정중히 물러났다.
“…….”
에이프릴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블레셋을 쳐다보았다. 재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예의는 지킬 줄 아는 모양이었다.
멋대로 쓰다듬거나 안아올리려 하면 콱 물어버릴 생각이었는데.
블레셋이 에이프릴의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래서, 사람 모습으로 대화는 어려울까요?”
“캬앙.”
“……흠.”
블레셋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더니, 잠시 후에 절벽을 손으로 가리키며 떠보듯 물었다.
“저 위에 가보고 싶나요?”
“……!”
하얗고 보송보송한 토끼 귀가 살짝 쫑긋했다. 척 봐도 긍정의 신호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가에 띤 블레셋이 은근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마치 유혹하는 것처럼.
“내가 데려다줄게요.”
.
그래서 에이프릴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가 하면,
“끼얏꺄웅~!”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고 푸른 용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탔다. 블레셋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꺄웅잇!”
세찬 바람이 토끼 털을 마구 휘날리게 했지만, 에이프릴은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
실제로도 날고 있었다. 푸른 용은 승차감이 아주 좋은 탈것이었다.
“끼앙~.”
저 아래, 폭포의 근원인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높이 날아오르는 용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에이프릴은 그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진 토끼가 용의 머리 위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워낙에 중심을 잘 잡는 토끼인지라 위험하진 않을 테지만, 푸른 용은 조금 염려가 든 듯이 비행하는 속도를 늦추었다.
“꺄웅!”
토끼가 뭔가를 지시하듯이 용의 머리를 앞발로 툭툭 쳤다. 푸른 용은 그 뜻을 잠시 헤아려보다가, 이내 아래로 천천히 하강했다.
육중한 용의 몸이 절벽 위 호숫가에 내려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용의 머리에서 내려온 토끼가 자갈밭을 마구 뛰어다녔다. 무척 신이 난 것처럼.
“끼앙!”
한참을 놀다가 뒤를 홱 돌아본 토끼가 용의 곁으로 후다닥 달려왔다.
뒷발로 서서 용을 올려다보는 토끼의 까만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웅꺄앙.”
“…….”
어쩐지 고맙다는 것처럼 들리는 울음소리였다. 푸른 용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그렇게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하더니. 머리에 좀 태워준 것으로 이리도 쉽게 경계심을 허물 줄이야.
그러나 사람일 때의 모습을 보여줄 생각은 여전히 없는지―.
“……!”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토끼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작은 몸이 빛에 휩싸인 채 부풀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으로 바뀐 것이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나부꼈다. 눈송이가 내려앉은 듯 희디흰 속눈썹 아래로, 투명한 보석을 연상시키는 분홍빛 눈이 반짝였다.
“…….”
푸른 용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제 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던 ‘흥미’가, 좀 더 복잡하고 깊어지는 순간이었다.
소녀는 생긋 웃더니, 토끼일 때와는 전혀 딴판인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제 사람일 때 모습이에요.”
“……아하.”
담백한 반응은 동요를 감추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그 사실을 알 길 없는 소녀는 머쓱하게 뺨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은…… 블레셋이라고 했죠? 제 이름은, 에이프릴이에요.”
에이프릴.
그 이름을 속으로 읊조려 보는 블레셋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 * *
……자고 일어나 보니 토끼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 토끼가 정말!’
그레이안과 나는 곧바로 토끼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호숫가에 앉아 느긋하게 간식이나 먹고 있는 아르윈을 발견했다.
“아르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예요? 에이프릴은요? 어디 있는지 알아요?”
아르윈은 말없이 간식만 씹으며 고갯짓으로 절벽 위를 가리켰다.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그쪽을 쳐다보았다.
워낙 높아서인지, 저 위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볼 수 없었다. 저곳에…… 에이프릴이 있다고?
‘말도 안 돼. 저길 어떻게 올라간 거야?!’
그리고 아르윈, 이 흑룡은 왜 이렇게 태평한 건데?!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싶은 걸 참으며 재차 물었다.
“에이프릴이 저길 어떻게 올라간 거예요? 내려올 수는 있는 거예요? 데리러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말하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아르윈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고 있었다. 흠칫 깨달은 나는 재빨리 손을 떼어냈다.
아르윈은 덤덤한 표정으로 짧게 하품할 뿐, 나를 나무라거나 흘겨보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 부인. 공녀님께서는 다른 이와 함께 있으니까요.”
“뭐라고요? 다른…… 그게 누구…….”
아르윈의 말에 바로 대꾸하려던 나는, 순간 뇌리를 스친 가정에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설마.’
시선이 자연히 다시 절벽 위로 향했다. 저곳에 에이프릴과 함께 있는 게…… 설마…….
그때였다.
절벽 위에서 커다란 날개를 펼치며, 푸른 용이 날아올랐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둘이 만나 버린 거야?!
.
“꺙!”
“에이프릴! 너……!”
호숫가에 착지한 청룡의 머리 위에서, 하얀 토끼가 앞발을 흔들며 인사했다.
나는 기가 막혀 입만 달싹거리다가, 이내 청룡의 앞으로 재빨리 달려갔다.
멍하니 있던 그레이안도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내 곁을 바짝 따라왔다.
“꺄웅!”
청룡의 머리 꼭대기에서 폴짝 뛰어내린 토끼가 내 품에 바로 안착했다.
나는 토끼의 작은 몸을 두 손으로 꼭 붙들고 울컥한 어조로 나무랐다.
“에이프릴, 멋대로 쏘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니?”
“끼앙…….”
에이프릴은 드물게 진심으로 미안해 보였다.
또 귀를 긁거나 코웃음을 치며 모르는 체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니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다음부터는 꼭 말하고 가. 엄마랑 같이 가도 되잖아. 왜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 이렇게 조그마해선,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끼이웅― 꺗!”
방금 내 말에는 다소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 조그맣다고 한 게 문제였겠지. 그리고,
“알아, 너 강한 거. 검술 실력도 뛰어나고, 토끼 수인이라 민첩하니까. 그래도…… 걱정이 드는 게 보호자의 마음이란 거야.”
“……끼앙.”
에이프릴이 귀를 축 접으며 수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그런 토끼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내 옆에 서 있는 그레이안이 말을 보탰다.
“나도 부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에이프릴, 다음부터는 어딜 가야 한다면 꼭 이야기하렴. 혼자 행동하지 말고.”
“웅꺗…….”
고개를 슬그머니 들어 올린 에이프릴이 그레이안의 손바닥에 주둥이를 가져다 댔다. 미안하다는 의미인가 보다.
설핏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토끼의 목 부근을 살살 긁어 주자, 토끼가 그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가슴이 훈훈해지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가족 상봉 및 토끼 어린이의 반성 타임을 가진 후, 남은 것은…….
‘……저 녀석.’
남주 후보 3, 블레셋.
기어코 에이프릴과 만나고 말았구나.
‘어떻게든 막고 싶었는데…… 이런 게 운명이라는 건가.’
어느새 사람 모습을 한 블레셋이 이쪽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온화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으나, 눈빛만큼은 바늘처럼 날카로웠다. 특히, 나를 볼 때 더욱 그랬다.
‘그렇겠지. 예상했던 바야.’
원작에서도 가장 늦게 등장하는 남주 후보 3, 블레셋은 극렬한 인간 혐오자이다.
그는 에이프릴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인스턴 왕국과 모든 인간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 극단주의자였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실제로 그는 성지 히페리온에서 세계수의 일부를 얻어 그 힘을 인간을 말살하는 데 쓰고자 한다.
인간 중에서도 선량한 이는 있으며, 인간이 좋은 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에이프릴은 그를 막고자 그레이안과 다른 남주 후보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마침내, 세계의 운명이 걸린 결전이 펼쳐질 예정이었는데―.
‘작가가 연중을 때려 버렸지.’
그렇게 됐다.
아무튼 간단히 요약해서, 지금 우리와 마주하고 있는 저 푸른 용은 원작의 최종 보스이다.
“역시 일행이 있었군요. 그런데…….”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블레셋이 한걸음 다가왔다. 녀석이 내뿜는 위압감에 그레이안이 긴장하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한 팔로 토끼를 안은 채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중에 인간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네요.”
……그래, 인간 혐오자인 이 녀석은 필시 나를 경계하리라 예상했던 바다. 나는 주눅 들지 않으려 애쓰며 꼿꼿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난 에이프릴의 엄마예요.”
저 녀석의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일단은 존대하기로 했다.
용족의 특성상 인간으로 치면 14세 정도이더라도, 실제 나이는 114세 즈음일 테니…….
“……당신은 토끼 수인이 아닐 텐데? 부군 쪽이 토끼 수인이십니까?”
“아니요, 여기 내 남편은 늑대 수인이고. 에이프릴이 우리 딸인 건 사정이 있어요.”
“아하…….”
크악. 저 녀석의 말투며 몸짓이 전부 흑막 그 자체다. 역시 심상치 않은 놈.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한 세계의 조율자예요.”
“……?”
그러자 블레셋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녀석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건 의외로군요.”
블레셋은 소년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뒷짐을 진 채로 어슬렁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이쪽을 돌아보며 요구해 왔다.
부드럽지만, 칼날처럼 예리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그럼, 증거를 보여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