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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82화 (82/144)

##  82화. 푸른 용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해 있던 몸이 더욱 굳는 게 느껴진다.

그레이안은 그 자리에 계속 얌전히 서서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하게 웃은 그레이안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은 더욱 빠른 속도로 요동쳤다.

첨벙―.

온천에 입수한 그가 마침내 내 곁에 다다랐고…….

나는 스윽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어쩐지, 눈을 마주치기 힘들어서.

“부인.”

“……!”

그레이안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감싸 쥔 순간, 반사적으로 움찔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끝내 마주하고야 만 은회색 눈은…… 한없이 다정해 보이면서도, 뜨겁고 위험한 열기를 품은 것도 같았다.

“…….”

두근두근―.

요동치는 내 심장 소리가 그의 귀에까지 들릴 것만 같아서, 무의식중에 뒷걸음질 친 순간이었다.

“……!”

순식간에 뻗어온 그레이안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고 끌어당겼다.

그와의 거리가 단번에 좁혀졌다. 바짝 맞닿은 몸의 체온이 뜨겁다.

은빛 홍채의 결이 아주 세세하게 보이고, 서로의 숨결이 피부를 스치는 게 느껴진다.

“…….”

무르익는 긴장감 속에서, 아득한 침묵이 흐르고…….

극이 다른 자석처럼 서로에게 자연히 이끌리다가―

어느 순간에, 그와 내 입술이 하나로 포개졌다.

“흡…….”

말랑한 입술이 부드럽게 뭉개지고, 삼켜지고, 습윤하고 뜨거운 숨이 뒤섞인다.

그렇지 않아도 올라 있던 체온이 열기에 더욱 달아오르고,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릴 듯 나른해져 간다.

“하아…….”

숨을 뱉어내기도 잠시, 그가 재차 입술을 겹쳐 왔다. 갈증이 난 것처럼 조급하다가도, 배려를 잊지 않은 듯 다시 조심스러워지는 키스.

등을 쓸어내리고 뺨을 쓰다듬는 손길이 마냥 상냥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야외인데…….’

누가 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은 이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깊은 입맞춤과 능숙한 어루만짐에, 속수무책으로 몽롱해지고 말아서.

* * *

정말로 그럴 필요 없는데도, 그레이안은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고서 방까지 옮겨 주었다.

이런 모습으로 아르윈이나 다른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꺄앙~.”

방에 가서 2차전이 시작될 일은 없었다. 토끼 어린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끼는 어서 오라는 듯 앞발로 침대를 탁탁 치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어째 우리를 보며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의 큐피드 토끼…….

“꺄아앙~.”

“그래, 이제 자야지……. 졸리지? 에이프릴. 여행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꺄우웅, 꺗!”

발라당 누워 버리는 토끼를 보자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손을 뻗어 배를 마구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무척 좋은가 보다.

“그럼 이제…… 불 끄겠습니다.”

그레이안이 등잔의 불을 끄자 사방이 어두컴컴해졌다. 그와 나는 토끼를 사이에 두고 침대에 누웠다.

‘하, 아직도 심장이 조금 두근거리네…….’

잠을 청하기 전, 나는 에이프릴에게 신신당부를 해뒀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혼자 나가지 말고, 어디 갈 땐 엄마를 꼭 깨워. 알았지?”

그러나 에이프릴은 대답 없이 모른 척할 따름이었다. 아니, 이 녀석이…….

어둠 속에서 설핏 웃은 그레이안이 토끼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조그만 토끼는 그의 커다란 손에 폭 파묻힐 지경이었다.

“에이프릴,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 착하지.”

그레이안도 당부를 더했지만, 에이프릴이 말을 들을지는 미지수였다…….

벌써 사춘기인가……. 청개구리 같은 반항을 어째 자주 한단 말이지.

‘잠들지 말고 밤을 새워야 하나……. 에이프릴 감시하게…….’

그러나 피로를 견디지 못한 몸은 쏟아지는 잠에 하릴없이 휩쓸리고 말았다.

* * *

푸르스름한 새벽.

에이프릴은 생체 시계라도 맞춰놓은 듯 눈을 반짝 떴다.

원하는 시간에 딱 맞춰 일어나는 것은 에이프릴의 특기였다. 딱히 자명종이 없어도, 언제든 쉽게 눈을 뜰 수 있었다.

“…….”

잠든 글로리아와 그레이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이프릴이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토끼의 조그만 몸은 들키지 않고 몰래 움직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살금살금 움직여 침대 아래로 폴짝 내려간 에이프릴은 문을 향해 단숨에 달려갔다.

이제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이 방에는 작은 동물용 출입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

뒤를 흘끗 돌아본 에이프릴은 두 사람이 아직 잠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최대한 빠르고 조용하게 모습을 바꿨다.

길고 하얀 머리카락이 허공에 나부꼈다. 마찬가지로 순백색인 속눈썹을 들어 올리자 분홍빛 눈이 드러났다.

에이프릴은 재빨리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아주 살짝만 문을 열고, 그 틈새로 잽싸게 빠져나갔다.

‘공작님이 눈치채셨을까……?’

사람으로 변한 순간 자신의 기척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에이프릴은 다시 토끼 모습으로 변한 뒤 바삐 달리기 시작했다. 들킬지도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토도도도―.

빨리 달리니 확실히 네 발이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에이프릴은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열심히 달렸다.

마침내 숙소의 출구에 다다라, 작은 동물용 출입문에 몸을 날렸다. 이 문에는 동물용 출입문이 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밖으로 나왔다!’

에이프릴은 기뻐서 폴짝 뛰었다. 여기서부턴 잡힐 확률이 50%로 줄어든다.

작은 토끼 발을 움직여 토도돗 달려나가, 숙소의 울타리를 폴짝 뛰어넘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와 자유를 만끽했다. 새벽 특유의 고요함도.

‘기분 좋다!’

신이 난 에이프릴은 제자리에서 몇 번 폴짝폴짝 뛰다가, 이내 고개를 두리번거려 방향을 잡고는 호수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저곳으로 가야만 했다.

.

이틀 전, 에이프릴은 예지 능력으로 무언가 중요한 미래를 보았다.

배경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장소였고, 누군가 자신에게 호감 어린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에이프릴은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에 예지로 글로리아의 모습을 보았던 때처럼 말이다.

글로리아가 청룡 수인의 은거지를 찾아 여행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에이프릴은 번뜩이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자신이 본 미래가 실현되는 곳이, 바로 그곳이리라는 직감.

그렇기에 글로리아에게 혼날 것을 감수하고 짐칸에 몰래 숨어든 것이었다.

‘도착했다!’

마침내 호숫가에 다다른 에이프릴이 자갈밭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지로 본 장소는 여기가 확실한데…….

‘그 사람’을 언제 보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본 것은 단편적인 장면에 불과했으므로.

‘앉아서 기다릴까?’

앉을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에이프릴은 곧 매끄러운 바위 하나를 찾아냈다.

그 바위로 달려가 폴짝 뛰어오른 뒤, 빵 굽는 자세로 동그랗게 몸을 말아 앉았다.

여기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지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

에이프릴은 그대로 가만히 앉아서 깊고 맑은 호숫물과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구경했다.

폭포수가 쏴아아― 떨어지는 소리에 긴 토끼 귀가 쫑긋거렸다.

절벽은 하늘을 찌를 듯 까마득히 높았고, 저 위에 있을 수원(水源)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저 절벽을 오르려면…… 체력이 보통 이상이어야 할 테지.

‘공작님은 가능할 테지만, 지금의 나로선 무리일 거야.’

어김없이 울컥하고야 만 에이프릴이 절벽에서 시선을 뗐다.

오르지 못할 벽을 계속 보다간 박탈감과 열등감이 심해질 것 같으니, 호숫물이나 들여다보는 게 좋을 듯싶었다.

‘……이 호수엔 물고기가 안 사나?’

혹시 물고기가 있을까 싶어 눈을 부릅뜨고 빤히 관찰했지만, 물고기는커녕 소금쟁이도 안 보였다.

그렇게 시간만 하염없이 흐르고…….

‘……심심해.’

처음엔 구경도 재밌었지만, 계속 같은 것만 보다 보니 역시 지루해졌다.

물장구라도 칠까 싶었지만 저 호숫물은 분명 얼음장처럼 차가울 것이다. 그러니 달리 뭘 하고 놀지 생각해야…….

그때였다.

자박―.

등 뒤에서 자갈을 밟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

바짝 긴장한 에이프릴은 귀를 한껏 접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도망가거나 맞서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한 채로, 느직이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야로 들어온 것은…….

“……!!”

푸른빛 비늘을 지닌, 거대한 용이었다.

.

아르윈만큼은 아니지만 푸른 용은 몸집이 매우 컸다. 그리고 에이프릴은 이 용이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정도로 조그만 토끼였다.

그러니 두려워해야 마땅할 테지만, 늘 그렇듯 에이프릴은 이 커다랗고 강인한 생명체에 질투심이 먼저 들었다.

“…….”

“…….”

정적 속에서 눈매를 가느스름하게 뜬 토끼가 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용은 그저 가만히 앉아 토끼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어떤 위협적인 행동도 하지 않으며.

“……캬웅.”

위협적인 소리를 낸 것은 오히려 토끼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앞발을 휘두를 것처럼 전투태세가 만만한 토끼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푸른 용은 눈을 두어 번 깜박거렸다.

토끼의 위협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한 태도로.

“그르릉…….”

“캬앙!”

목 긁는 소리 좀 냈다고 토끼가 용을 향해 버럭 노성을 질렀다.

푸른 용은 다소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고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

그 순간 움찔한 토끼가 퇴로를 찾듯이 눈을 굴렸다. 마음 같아선 덤벼들고 싶지만, 체급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에 달아날 생각이었다.

푸른 용이 느릿느릿 다가왔다. 토끼는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토끼가 우려하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

푸른 용이 순식간에 모습을 바꿔 사람의 형상을 했기 때문에.

“…….”

에이프릴은 자신의 앞에 선 사람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외모. 깊은 물빛을 닮은 머리카락과 눈, 그리고 눈처럼 하얀 피부.

긴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어내렸고,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에 온화한 인상을 띠고 있었다.

‘……이 사람!’

눈을 크게 뜬 에이프릴이 파르르 떨었다. 자신이 예지로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용 수인이었다니!’

게다가 비늘 색을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이 예의 그 청룡 수인인 듯했다.

그레이안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봐야 할까, 에이프릴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당장 입을 열기보다는 상대를 관찰하는 쪽을 택했다.

여전히 조금은 경계심 어린 눈으로 빠안히 쳐다보자니, 청룡 수인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심지어는 빙그레 미소를 짓기까지 했다.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기라도 하듯이.

그리고 잠시 후 들려온 목소리는…….

“미안해요. 내가 겁먹게 했나요?”

깜짝 놀랄 만큼 부드럽고 듣기 좋았다.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놀랄 것도 없는 일이다. 외모와 잘 어울리는 목소리였으니까.

“…….”

아직 방심하긴 이르지만…… 에이프릴은 경계심을 약간 풀고 울음소리를 냈다.

“꺄웅.”

“……당신도 수인인 것 같은데, 사람 모습으로 대화하는 게 어떨까요?”

흥, 내가 그 말에 순순히 따라줄쏘냐.

에이프릴은 대놓고 코웃음 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이어진 긴 침묵 속에서, 아직 이름도 모르는 청룡 수인의 묘한 시선이 닿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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