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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81화 (81/144)

##  81화. 온천, 이벤트, 로맨틱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나와 일행은 이 수상한 마을로 진입하기로 했다.

여태 지나쳐온 루트가 험준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을로 이어지는 길은 굴러가도 될 만큼 평탄했다.

물론 진짜 굴러갔다는 게 아니고 말이 그렇단 얘기다.

“꺄앙……!”

마을의 초입에 다다라 내 품 안의 토끼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한 게, 아름다운 조화 장식이 입구에 가득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방문객을 환영하는 것처럼.

‘여긴 폐쇄적인 마을이 아니었나……?’

의문을 품고 일행과 시선을 교환한 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자, 이윽고 믿을 수 없는 전경이 펼쳐졌다.

‘와……. 여긴…… 대체 뭐야?’

그야말로 장관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경치.

높은 절벽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그 폭포의 물이 이루어낸 호수를 낀 마을은 흡사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소였다.

나무와 돌로 지은 집들이 자연에 녹아들듯 이곳저곳 자리해 있고, 입구와 마찬가지로 집의 문이나 울타리, 나무 등에 다양한 조화 장식이 걸려 있었다.

“무슨 축제 중인 걸까요……?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네요.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 없는데…….”

안나가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 모두가 넋을 잃은 표정으로 마을을 구경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아르윈마저도.

“여긴 무척 아름다운 곳이로군요. 이런 곳에 사는 용 수인이라니, 조금 질투가 나려고 합니다.”

농담조로 말하긴 했으나 아르윈은 반쯤 진심인 것 같았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슬쩍 질문을 꺼냈다.

“흑룡이라고 하면 보통 용암지대나 황야, 그리고 깊은 동굴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런 동굴에 금과 보석을 가득 쌓아두기도 하고…….”

그러자 아르윈은 어이없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무슨 편견 어린 말씀이십니까? 흑룡들이 대체로 그런 성향이긴 하지만, 저는 아닙니다. 저도 취향이란 게 있어요.”

그러시군요. 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그럼 보석 싫어하시나요?”

“좋아합니다.”

“동굴은요?”

“어둡고 아늑한 장소는 좋아하지요.”

“펄펄 끓는 붉은 용암과 뜨겁고 새까만 화산석은?”

“물보다는 불을 좋아하는 편이죠.”

뭐야, 그냥 흑룡 맞잖아. 나는 가자미눈을 하고 아르윈을 흘겼다. 그제야 ‘아차.’ 했는지, 아르윈이 급히 덧붙였다.

“그런 것들을 좋아하긴 하지만 환장할 정도는 아닙니다. 저는 평화로운 숲속이나 책이 가득한 서재 같은 곳을 더 좋아해요.”

예, 그러시군요. 대충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니, 아르윈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모르는 척 걸음을 옮길 뿐이었지만.

.

마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축제 분위기가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드디어 이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는 경악했다가, 이내 감탄하더니, 끝으로는 매우 기뻐했다. 100년 만에 마을에 온 손님이라며.

‘100년이라니…….’

폐쇄성이 장난 아닌데, 이 마을.

외부와 단절된 채로도 오래 유지 중인 게 신기할 노릇이다……. 폐쇄적인 마을이면서 외부인에게 친절한 것도 신기하고.

“그렇지만 저희라고 해서 매일 마을에서만 지내는 건 아닙니다. 밖에 나가 물건도 사고 여행도 다니지요. 다만, 마을에서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이곳의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 몹시 애를 씁니다.”

“아하, 그렇군요…….”

대강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마을은 청룡을 신처럼 모시는 도마뱀과 뱀 수인이 사는 곳이라는 모양이다.

‘어쩐지 다들 피부에 비늘이 돋아 있더라. 동공은 세로로 찢어져 있고.’

그러나 주민 중에 파충류 수인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제 아내는 파랑 까치 수인입니다. 참고로 파랑 까치는 참새목 까마귀과의 조류이지요. 아내와 결혼한 후로 저는 새 고기는 일절 먹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좀 그렇잖아요? 하하하.”

그건…… 확실히 좀 그렇긴 하지. 내가 토끼 고기를 먹을 수 없듯이. 우리 토끼는 무슨 고기든 잘 먹어서 토끼 고기까지 먹을까 봐 겁나지만.

나는 우리에게 친절히 설명해준 뱀 수인 아저씨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지금 마을에서 축제가 열리는 중인가요? 사람들 옷차림도 화려하고, 여기저기 꽃 장식도 보여서요.”

“아, 이건 축제가 아니라…….”

뱀 아저씨는 멋쩍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장례식입니다.”

“……?”

자, 장례식?

이렇게 화사한 분위기인데?!

내 경악이 겉으로 드러났는지, 뱀 아저씨가 머쓱하게 허허 웃었다.

그러고는 마저 설명해 주기를,

“우리 마을은 죽음을 슬픈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죽음을 일종의 통과 의례로 보지요. 죽음을 통해 우리의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자연에 있는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되며, 영혼은 환생해 새 삶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는 모양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있어 죽음은 낡은 허물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과정인 것이지요. 오늘 장례가 치러지는 분은 이틀 전 돌아가셨는데, 150세까지 사셨으니 아주 장수하신 셈이지요.”

“배, 백오십 세요……?!”

아무래도 이 마을에서 나는 바보처럼 놀라는 역할인가 보다. 다른 일행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으니, 놀란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지만.

“영물이나 용 수인도 아니면서 그렇게나 장수하다니…… 이 마을에 청룡의 축복이라도 내린 겁니까?”

아르윈이 흥미롭다는 투로 떠보듯 물었다. 청룡 수인의 존재를 은근슬쩍 캐내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뱀 아저씨도 보통내기가 아닌지,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청룡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굽어살피시는 영험한 존재이시지요. 저희는 벌써 천 년도 넘게 이 마을을 유지하며 청룡님을 모셔왔습니다. 저쪽에 보시면 신상도 있고, 사당도 있지요.”

그러니까 이 마을에 청룡이 실재하는지 어떤지는 알려주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무척 친절하지만 필요하다면 선을 그을 줄 아는 아저씨였다…….

.

“결국 청룡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했네요.”

“뭐, 그걸 거라 예상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안내해 준 숙소. 이곳에 하룻밤 묵기로 한 우리는 둥글게 모여 앉아 다 같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 중에 말을 주고받는 인원은 주로 나와 아르윈이었지만.

“새벽에 몰래 나가서 살펴볼까요? 제 생각에는 왠지 호수와 폭포 근처가 수상하단 말이죠.”

내 말에 아르윈이 고개를 끄덕이며 요리를 입에 넣었다.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는지 표정을 설핏 찌푸리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신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되도록 신중히 움직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곳 주민들이 친절하기는 해도, 무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쇄적으로 살아온 집단입니다. 어떤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지,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이지요.”

이번에는 내가 그의 의견에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거지만, 아르윈은 아는 것도 많고 이치에도 밝구나. 역시 어르신…….

“마을을 몰래 살펴보는 역할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유사시에 대응하기에도 마법사인 제가 더 수월할 테고요.”

“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그리하여 새벽에 나가 마을을 몰래 조사하는 일은 아르윈의 몫이 되었다.

.

저녁 식후,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무려 온천까지 내어주었다.

덕분에 일행과 나는 뜨거운 온천욕으로 피로를 싸악 풀 수 있었다. 특히나 토끼가 온천을 아주 좋아했다.

“에이프릴……. 너 진짜 수영 잘한다.”

에이프릴과 목욕할 때마다 느끼는 건데 얘는 정말 헤엄을 잘 친다. 토끼 앞발과 뒷다리로 저렇게나 안정적인 수영이 가능하다니…… 대단한 토끼.

“이왕이면 사람 모습으로도 즐겨보는 건 어때? 날이면 날마다 올 수 있는 온천이 아니잖아.”

“…….”

내 제안에 토끼는 잠자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파티션 뒤로 폴짝 뛰어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목욕 수건을 두른 에이프릴(사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다.

‘와……. 진짜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다!

얼빠 기질이 발동한 나는 에이프릴의 백옥 같은 피부와 결 좋은 하얀 머리카락을 요목조목 뜯어보면서 마구 감탄했다.

우리 에이프릴은 나중에 커서 왕국 최고의, 아니, 대륙 최고의 미인이 되지 않을까? 내가 너무 팔불출인 건가?

“에이프릴, 내가 머리 손질해 줘도 될까?”

마을 사람들이 주고 간 나무 빗과 향유를 냉큼 집어 들며 물었다.

에이프릴은 조금 쑥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는데,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뺨이 발그레 물들어 있어서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와, 우리 딸 머릿결 진짜 좋다.”

정말로 명주실 같은 감촉이었다. 매번 감탄하게 된다니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빗질을 이어나갔다.

듬뿍 바른 향유에서 등나무꽃 향기가 물씬 올라왔다.

“저……. 공작 부인.”

“응, 왜?”

빗질을 거의 다 해갈 때 즈음, 에이프릴이 넌지시 말을 건네왔다.

“그게, 모처럼의 온천이니까, 공작님과도 시간을 보내시는 게 어떠세요……?”

“……!”

하마터면 빗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 그레이안과 온천에서 시간을 보내……?!

……불순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나간다……. 아, 안 돼!

“나, 난 에이프릴과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아!”

나도 모르게 불쑥 내뱉자, 에이프릴이 이쪽을 스윽 돌아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왜 그렇게 보니……?

“저도 공작 부인과 보내는 시간이 좋아요. 그렇지만, 공작 부인이 공작님과 보내는 시간은 또 다른 의미로 좋은 거잖아요……?”

“…….”

얘 열두 살 맞아……?

사실은 인생 2회차가 아닐까…….

“우리 에이프릴은…… 나이에 비해 참 성숙한 거 같아.”

토끼일 때는 안하무인 천방지축이라는 점이 갭이지만.

그러고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에이프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냉큼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에이프릴, 네 진짜 성격은 사람 모습일 때와 토끼 모습일 때 중에 어느 쪽이야?”

“……그건…….”

돌발 질문이었음에도 에이프릴은 그다지 당황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저 살포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할 뿐.

“당연히, 둘 다 제 성격이죠.”

.

‘둘 다 에이프릴의 성격이라고……?’

에이프릴의 미스터리를 곰곰이 생각하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에이프릴은 기어코 그레이안을 불러오겠다며 가버리고 말았다.

……말인즉, 곧 있으면 그레이안이 이곳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그것도 아마 목욕 가운만 걸친 모습으로…….

……이미 그의 벗은 몸도 다 본 마당에 왜 이런 걸로 긴장하나 싶지만―.

‘그렇지만, 여긴 온천이잖아!’

온천! 이벤트! 로맨틱! 무슨 일인가 벌어질 듯한 예감!

으아아아. 긴장 안 하려고 해도 긴장된다. 과연 내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그때였다.

“……부인?”

“……!”

기척도 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뻣뻣이 굳어 버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두 손을 가슴께로 꼭 모아 쥔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물기 어린 모습으로, 하얀 목욕 가운을 걸친 그레이안이 서 있었다.

조금 쑥스러운 듯, 그러나 분명한 열기를 띤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옆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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