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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80화 (80/144)

##  80화. 머리 꼭대기에서 춤춰

산의 초입에서 기웃거리는 아인스턴 왕국인들은 모두 세 명이었다.

그들은 부유한 계층인 듯 제법 좋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이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은 걸 보아하니 여행하느라 잠도 잘 못 잔 듯싶고?

“캬앙.”

내 품 속의 토끼가 그들을 향해 앞발을 휘두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응, 알아. 나도 저 사람들 마음에 안 들어.

나는 한껏 적대감을 품고 그들에게 다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거기 셋.”

“……?”

역시 이런 건 악녀 전문이지.

글로리아의 악녀 이미지, 마음껏 사용해 주겠어.

나를 돌아보곤 흠칫하는 삼인방을 향해, 나는 경고하듯 날카롭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 산에 오르려는 건가?”

“그, 그렇습니다만……?”

삼인방을 나를 보며 긴가민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 품 안의 토끼와, 내 뒤의 일행들을 쓱 훑어보더니―

이내 깨달았다는 듯이 손뼉을 치는 게 아닌가.

“아! 여러분은 타지에서 오신 수인 여행객들이로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하.”

……이 인간들, 글로리아를 몰라……?

아니, 그래, 뭐― 모를 수도 있지. 알려주면 그만이다.

재차 입을 열려는데, 아인스턴인1이 토끼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여기 이 토끼님은 혹시 토끼 수인이신 건가요? 그럼 귀하께서도……?”

“…….”

나와 에이프릴을 번갈아 보며 두 눈을 매우 초롱초롱 반짝이는데…… 뭐지……? 이 약간 소름 끼치지만 무해해 보이는 태도는……?

“저희는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연구생들이거든요! 수인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고자 이렇게 여행 중입니다!!”

아카데미…… 연구생……?

머릿속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떤 지식.

그러니까, 아카데미의 연구생이란 것은―

{대학원생 같은 거임ㅋㅋ}

{아 웃겨 ㅋㅋㅋㅋㅋ 얘들 피곤에 찌든 얼굴인 거 대학원생이라서.}

{다크서클도 맨날 밤새워 연구하느라고 ㅠㅠ}

“…….”

그랬던 것이었다.

이 삼인방은…… 납치범이나 인신매매범, 노예상이 아니라…….

‘학구열에 미친 진짜 광기 연구생…….’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약간 소름이 끼친 건…… 연구생의 광기를 느껴서…….

“뒤에 있는 분들은 무슨 수인이신가요……?? 아, 아무리 봐도 토끼 수인이신 거 같진 않아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저기 토끼님,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저도 좀…….”

“웅꺗.”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이런 아인스턴 왕국인들도 있구나.

하기야, 아인스턴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수인 혐오자이고 치졸한 악당들인 건 아니지.

‘당장 내 어머니와 유모만 생각해 봐도…….’

…….

……?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려 했던 거지?

뭐지?

혼란스러움에 눈을 마구 깜박이는데, 그레이안과 아인스턴인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해서, 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 말소리에 집중했다.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아, 그러시군요……! 사실 저희도 청룡 수인이 이 산에 산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말씀을 들어보니 청룡 수인을 직접 보기는 역시 힘들 것 같군요…….”

그레이안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는 미처 듣지 못했지만, 아인스턴인들의 반응을 보니 잘 설득한 듯싶었다.

이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럼 아쉽지만 저희는 이만 마을로 돌아가 보는 편이 좋겠네요……. 혹시 청룡 수인을 만나게 되시거든 꼭! 저희에게도 후기를 들려주세요!”

“토끼 수인에, 개 수인에, 늑대 수인에― 무려 블랙맘바 수인까지! 이렇게 다양한 수인 여러분을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중에 아르윈은 또 블랙맘바 수인인 척 행세한 모양이었다. 뭐, 그러는 편이 덜 성가시기야 할 테지.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떠난 후, 우리는 본격적으로 산길에 진입했다.

산길은 듣던 대로 가파르고 험준해서, 웬만한 베테랑 산악인이 아니고서는 등산이 힘겨울 듯싶었다.

“으아…….”

고로 나는 말할 것도 없이 죽어나는 중이었다.

무릎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는데, 그레이안이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응시하며 제안해 왔다.

“부인, 힘드시면 제가 업고 가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

“꺄웅잇!”

“에이프릴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라는군요.”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말을 알아듣는 척했다. 에이프릴 녀석은 힘들어하는 나를 배려해 아르윈의 품으로 옮겨가 있었다.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는 토끼를 흘끗 일별하고서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하는 수 없지. 어린애에게까지 걱정을 끼칠 순 없으니…….

“그럼…… 당신이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부탁할게요.”

“무리하다니요, 전혀 그럴 일 없습니다, 부인.”

씩 웃은 그레이안이 내 앞에 등을 보이며 앉았다.

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그의 등에 조심스럽게 업혔다. 밀착된 몸에서 전해져 오는 그의 체온이 무척이나 따뜻하다.

‘등이 넓어서 상당히 안정감 있네…….’

이런 생각이나 하려니 괜스레 부끄러워지는 건 어째서일까.

“그럼, 꽉 잡으십시오, 부인.”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레이안의 목을 꼭 껴안았다.

이윽고 그레이안이 빠른 속도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뛰는 거나 다름없었다. 경악한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펴보았다.

다른 일행도 그레이안과 마찬가지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심지어 내 시녀인 안나마저도!

‘또 나만 최약체인 세계관!’

수인들은 좋겠다. 신체 능력이 월등해서…….

‘나도 이왕 빙의할 거 수인이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아무튼 간에…… 그레이안과 일행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을 올라 빠르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빨리 움직였는데도 그레이안의 등에 업힌 나는 아무런 흔들림도 느끼지 못했다.

그야말로 초월의 경지에 다다른 편안한 승차감이라 할 수 있겠다…….

“저기, 이제 내려줘도 될 거 같아요. 태워 줘서 고마워요, 그레이안.”

“별말씀을.”

부드럽게 대답한 그레이안이 나를 살며시 내려주었다.

그의 입가에는 꽤나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나를 태우고 달린 게 재밌었나?

‘……그나저나, 여기서부터가 문제네.’

이 포인트까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산을 오른 건 좋은데…….

‘여길 어떻게 내려가지?’

휘이잉―.

가파른 협곡 사이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청룡 수인의 은거지는 이 협곡 아래, 사납게 흐르는 물길을 타고 내려가야 도착할 수 있었다.

‘아르윈의 이동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되려나?’

더해서 뗏목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이런 계곡 상류에서 배를 잘못 몰았다간 바위에 부딪혀 침몰하기 십상이겠구만.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 아닐 수 없는데.

나는 아르윈을 흘끗 훔쳐보았다. 그는 무언가 고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협곡 아래를 빤히 내려다보더니…….

“흠, 하는 수 없군요.”

대경실색할 만한 제안을 꺼내 들었다.

“저를 타고 가시지요.”

* * *

잠시 후.

나를 비롯한 일행은 모두 경악해 입을 딱 벌리거나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도 그럴 게…….

‘진짜 용이 맞긴 했구나…….’

흑룡으로 변한 아르윈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르르릉―.”

크고 아름다운 아르윈이 어서 등에 올라타라는 듯이 재촉했다.

그때까지 멍하니 있던 일행은 이내 서둘러 용의 등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넋이 빠진 채로.

“그레이안…… 당신도 아르윈의 이 모습은 처음 보는 거랬죠?”

“그렇습니다…….”

심지어 그레이안마저 혼이 나가 있으니 말 다 한 거였다.

정말 놀랍다. 설마하니 아르윈이 이렇게까지 헌신해 줄 줄이야.

‘이 일로 그레이안도 아르윈에게 마음을 풀 것 같은데…….’

용의 등에 오르기 전, 나는 아르윈의 흑룡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지금 실컷 봐둬야 한다!

‘일단, 비늘이 매우 반짝거려. 빛이 나.’

마치 얇은 흑요석이 세밀하게 박혀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날개는 박쥐 날개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좀 더 튼튼하고 위협적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실례가 아니라면 한번 만져보고 싶다……. 아르윈이 허락해 주려나…….

‘눈은 사람 모습일 때와 마찬가지로 담황색이고.’

맑은 시트린 같은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아르윈과 시선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나도 모르게 놀라 움찔하자니 흑룡이 콧김을 뿜는다.

“그르릉.”

‘얼른 등에 올라타기나 해’라는 뜻인가 보다. 당황한 채 눈을 빠르게 깜박이던 나는 후다닥 용의 등에 올라탔다.

참고로 이 흑룡에게는 멋진 뿔도 있다.

‘……역시 드래곤은 세계 제일로 멋진 듯.’

갑자기 호감도 급상승.

“그르르릉.”

일행이 모두 올라타자 아르윈이 출발을 알리듯 울었다.

곧이어 두 쌍의 커다란 날개가 펄럭이더니, 육중한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대, 대박.’

그야말로 엄청난 체험.

떨어질까 봐 좀 무서웠지만, 안정감 있게 앉아 있는 그레이안을 꼭 잡고 있어(……) 큰 걱정은 없었다.

문제는 토끼였다.

“꺄아앙~!”

‘저, 저, 겁도 없는 토끼가!’

도대체 어느 틈에 저기까지 간 것인지는 몰라도, 토끼는 용의 머리 위에 꼿꼿하게 서서 마치 지휘관처럼 앞발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나는 기막혀 입을 달싹이다가 그레이안에게 급히 물었다.

“그레이안, 에이프릴 당신이 안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그랬……습니다만…….”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그도 나만큼이나 당황한 듯싶었다.

“끼얏꺄웅~!”

겁을 상실한 토끼가 용의 머리 위에서 폴짝이며 스릴을 즐겼다.

그 광경을 지켜보느라 나는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에이프릴……! 제발 가만히 앉아 있어!”

“끼앵!”

쟤 방금 ‘싫어!’라고 한 거지? 진짜 미치고 환장하시겠네!

거대한 용의 몸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협곡을 통과했다. 머리 위의 토끼를 의식해서인지 아르윈은 천천히 날고 있었다.

일행 중 신이 난 건 토끼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천방지축 토끼를 걱정스럽게 지켜보느라 좌불안석이었다.

나 역시 토끼를 신경 쓰느라 용을 타고 허공을 나는 기분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했다.

5분쯤 지나, 흑룡이 날개를 펄럭이며 지상에 착륙했다.

나는 아쉬움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며 재빨리 용의 머리 위로 기어가 토끼를 낚아챘다.

“끼앙!”

“이 겁도 없는 토끼야! 자꾸 엄마 걱정시킬래?!”

내 등 뒤로 그레이안이 크게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한숨이 꼭 내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토끼를 꼬옥 껴안고서 불안정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이 사고뭉치 토끼 때문에 진짜 수명이 줄어드는 기분이라니까.

* * *

“흐음……. 아무래도 이곳이 맞는 듯합니다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람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윈이 크고 반질반질한 비석 앞에서 나직이 말했다.

방금 본 그 흑룡과 저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니, 영 적응이 안 된다…….

나는 왠지 어색함을 느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나비들이 알려준 장소는 여기가 맞아요. 설마하니 마을……인지는 미처 몰랐지만.”

그렇다.

청룡 수인의 은거지라는 곳에 도착하긴 했는데―

여긴, 아무리 봐도 사람이 사는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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