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발칙한 토끼
나비들이 알려준 장소로는 내일 당장 가보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분주하게 움직여 준비를 해나갔다.
오전 10시쯤 모든 준비를 마친 후, 나는 정원에 세워져 있는 마차 앞에 섰다.
온갖 짐이 실린 이 마차째로, 아르윈이 이동 마법을 써서 옮겨 준다고 했다.
물론 지도에 찍힌 좌표로 곧장 이동하는 건 아니고, 그 인근의 마을이 목적지라고 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여행객이 자주 들르는 곳이라 제법 괜찮은 숙소도 있다나 뭐라나.
“끼우웅…….”
참고로, 토끼 어린이는 함께 가지 않는다.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어린이를 데려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웬만해선 에이프릴과 남주 후보 3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끼우우웅……!”
근처의 풀숲에 숨은 채 나를 쏘아보며 토끼가 계속 뭐라고 울어댔다.
나 들으라고 일부러 저러는 것 같은데. 그냥 모르는 척하도록 하자.
“네, 다 챙겼어요.”
당연한 일이지만, 그레이안은 우리와 동행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저주에 걸린 당사자니까, 함께 가는 게 맞겠지.
정작 그레이안은 다른 이유로 동행을 결정한 것 같지만.
‘부인을 혼자 가도록 둘 수는 없습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하지만 그레이안의 걱정과는 달리 나는 혼자 가는 게 아니다. 아르윈과 기사 둘, 그리고 안나가 동행하니까.
그러나 그레이안은 그 인원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특히, 아르윈이.
‘도대체 언제 화해할 거람…….’
둘 사이의 분위기가 묘―한데, 이것 참, 끼어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다 큰 성인들끼리의 문제이니 알아서 해결하게 두는 수밖에. 내가 굳이 중재할 필요까진 없겠지.
“공작 부인, 혹시 공녀님께서 어디 계신지 아십니까?”
슬슬 출발하려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어디선가 급히 달려온 로드리가 나를 향해 물었다.
“에이프릴이라면…….”
토끼가 숨어 있는 풀숲을 가리키려던 나는, 그곳에 더는 에이프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멈칫했다.
‘그새 또 어딜 간 거지?’
자기만 쏙 빼고 간다며 계속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설마 너무 화난 나머지 가출한 건 아니겠지…….
일단 나비들을 풀어 에이프릴을 찾게 한 뒤, 나는 로드리에게 짐짓 진지한 태도로 당부했다.
“에이프릴이 어딜 갔나 모르겠네. 화가 나서 신경이 예민한 상태일 거야. 네가 잘 좀 찾아봐 줘. 달래주면 더 좋고.”
“달래…… 제가, 말입니까……?”
“응, 너만 믿을게!”
로드리는 눈을 크게 뜬 채 멍한 표정으로 잠시 굳어 있었다. 그런 부탁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것처럼.
“공작 부인, 이제 출발해야 합니다.”
마침 아르윈이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로드리를 뒤로한 채 나는 마차에 올랐다.
“자, 그럼 출발합니다.”
그리고 막 떠나려는 순간에, 공교롭게도 나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로리아! 토끼 찾았어!}
{이 토끼 지금―.}
……뭔가 불길한데.
아르윈의 마력에 공간이 흔들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장소는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못다 한 나비들의 말이 이어졌다.
{짐칸에 숨어들었어!}
* * *
“에이프릴, 벌을 서도록 하자.”
“끼앵.”
“너 그거 싫다는 뜻이지? 그렇지? 이 발칙한 토끼야.”
“캬훙~.”
나를 비웃은 에이프릴이 뒷발로 귀를 긁으며 딴청을 피웠다.
부들부들…….
나는 주먹을 꽈악 쥔 채로 천천히 심호흡한 뒤,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이왕 따라온 거 어쩔 수 없지.”
“꺄앙!”
“단, 엄마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단독 행동하고 그러면 안 돼!”
“끼얏웅.”
아 뭐라고 하는 걸까 진짜? 통역 귀걸이가 또 고장이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에이프릴 녀석은 일부러 토끼 모습을 하는 것 같고.
“……당황스럽구나, 에이프릴. 네가 위험해질까 봐 데려가지 않으려 한 건데…….”
그레이안이 에이프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자, 토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끼아웅…….”
오? 뭐라고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미안해하는 것 같다!
“캬앙……. 키웅.”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마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는 내내 에이프릴은 비교적 얌전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차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지만. 누가 저 토끼 좀 잡아!
“어이쿠, 혼자 그렇게 막 가시면 안 됩니다, 공녀님. 여긴 타지잖아요.”
다행히 아르윈이 에이프릴을 잽싸게 낚아채 주었다.
그의 손에 잡힌 채 버둥거리던 토끼는 사납게 캬악질하다가 아르윈의 손가락을 콱 물어 버렸다.
‘히익, 아프겠다.’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는데, 정작 당사자인 아르윈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천 년의 연륜이란 바로 저런 것인가……!
“공녀님, 그렇게 콱 물어봤자 하나도 안 아픕니다.”
“……!”
“보세요. 공녀님의 앞니가 들어가지도 않죠? 제 가죽이 이렇게나 튼튼합니다.”
대단하다, 천 년의 내구성.
하기야 용족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강해지고 육체 능력도 상승한다던가.
나이를 먹을수록 약해지는 인간과는 딴판이로군. 부럽다.
“꾸우웅……!”
토끼는 아르윈의 손가락을 계속 콱 문 채로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호승심이 강한 토끼이니 패배감을 느껴야 하는 이 상황이 못내 굴욕이지 않을까…….
저러다 또 비뚤어질까 싶어, 나는 얼른 토끼의 곁으로 다가가 달래주었다.
“에이프릴, 그만하고 이제 엄마한테 와. 네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 사줄게.”
“……!”
토끼는 대번 눈을 반짝이더니 내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역시 고기밖에 모르는 바보. 바보 토끼. 육식 토끼.
그렇게 토끼를 잘 달랜 후, 일행과 나는 근처에 마차를 잘 세워두고 숙소로 들어갔다.
일부러 평범한 옷을 입긴 했지만, 척 봐도 눈에 띄는 우리의 등장에 숙소 안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 척하며 방을 잡고 음식도 주문했다. 당연히, 토끼를 위한 거다.
우리 중에 배고픈 사람은 먹보 에이프릴밖에 없으니까.
“에이프릴, 토끼 모습으로 먹을 거니?”
“끼앙~.”
……그렇다는 뜻인가? 잘 모르겠군.
얼마쯤 기다리자 음식이 나왔고, 에이프릴은 당연하다는 듯이 앞발로 먹기 시작했다.
늘 그렇지만 저렇게 먹고 나서 털에 묻으면 씻겨 주는 건 내 일이다.
……저 녀석, 가만 보면 그게 좋아서 일부러 토끼 모습으로 다 묻히며 먹는 것 같기도 하고.
‘뭐…… 한창 어리광 피울 나이지.’
토끼님 좋을 대로 하게 내버려 두고, 나는 물이나 홀짝였다. 음, 물맛이 좋군. 마을 근처가 산이라 그런가.
“……어째, 분위기가 영 이상하군요.”
그런데 아르윈이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주변을 훑는 그의 눈은 경계심 어린 채 빛나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나도 슬그머니 고개를 움직여 사위를 살펴보았다.
이 숙소의 1층 라운지는 주점, 혹은 식당과 같은 구조였는데,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여행객은 일부고 대다수가 마을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말인가 주고받는 중이었다.
‘설마 우리 때문에 그러는 건가?’
보다 정확히는, 글로리아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마을도 글로리아가 만행을 저지르고 간 곳 중에 하나일 수도…….
……진짜 그런 거면 어떡하지.
‘빌어먹을 원래 몸 주인……!’
“서비스입니다~.”
속으로 글로리아를 마구 욕하는데, 마침 다가온 종업원이 우리 테이블에 맛있어 보이는 빵을 내려놓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종업원이 싱긋 웃는다. ……글로리아 탓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이보게, 혹시 저기 저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인지 아나?”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던 차에 그레이안이 선수를 쳤다.
질문을 들은 종업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뺨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지금 이 마을에 아인스턴 왕국 사람들이 와 있어서요.”
뜻밖의 이야기에, 일행도, 나도 깜짝 놀랐다. 토끼는 먹던 고기를 툭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종업원의 말이 작은 소리로 이어졌다.
“아시다시피 저희는…… 그러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이 곰 수인이잖아요? 그래서 아인스턴 왕국인들을 더욱 경계하는 분위기이죠…….”
곰 수인들은 아인스턴 왕국의 노예상들에 의해 자주 납치, 인신매매를 당한다.
몸이 튼튼하고 험한 일을 잘한다는 이유로.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저렇게 심각한 낯으로 수군거리는 것이 백번 이해가 갔다.
“……과연, 그렇게 된 거로군. 이야기 들려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별말씀을요.”
그레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를 표하자, 종업원은 사람 좋은 얼굴로 씩 웃고는 재차 말을 건네왔다.
“뭐 더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가요? 손님들은 멀리서 봐도 모두 외모가 훤칠하셔서, 저도 괜히 더 얘기하고 싶고 그러네요. 하핫.”
이 종업원은 얼빠인 모양이다.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는군.
다음으로 질문을 건넨 사람은 아르윈, 아니―
“그럼…….”
“꺄웅잇?”
아르윈이 말하려는데 불쑥 끼어든 토끼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종업원은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는데, 아무리 봐도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곰 수인이라는 이 종업원이 무슨 수로 토끼 말을 알아듣겠는가.
나는 에이프릴에게 짐짓 상냥하게 권유했다.
“에이프릴, 사람 모습으로 물어보는 게 어때?”
하지만 에이프릴은 나를 새침하게 노려볼 뿐, 사람 모습으로 변할 의향이 없어 보였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녀석아.
허탈한 웃음을 흘린 뒤, 잠시 고민하던 나는 에이프릴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래, 네가 뭘 궁금해하는지 내가 맞춰볼게.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여긴 무슨 용건으로 온 것인가.’ 맞지?”
“……!”
그냥 찍었을 따름인데, 토끼는 즉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내가 자신의 뜻을 알아준 것에 굉장히 감동한 눈치였다.
“꺄아앙!”
“그래, 다 먹었으면 앞발 좀 닦자. 입가도…….”
나는 토끼를 안아들고 냅킨으로 앞발을 쓱쓱 닦아 주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종업원은 여전히 멋쩍은 미소를 입에 건 채 이야기했다.
“그런 질문이었군요. 음……. 그게 실은 말이죠, 이 볼로스 마을에서 서쪽으로 쭉 가면 필리온 산이 나오는데, 최근 그 산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청룡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
방금 그 이야기에는 더욱 놀라 일행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쩐지 나비들이 너무 빨리 찾아냈다 싶었는데, 그게 다 ‘그 녀석’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서였나?
‘아니, 가만……. 그 녀석…… 설마 벌써 성체가 된 건가?’
그럴 리가? 인간으로 치면 에이프릴과 비슷한 나이일 텐데……?
“그래서 이 근처를 여행하던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그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더라고요.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청룡을 찾아서 필리온 산을 오를 거라고…….”
“끄앵!”
토끼가 버럭 내지른 소리는 통역이 필요 없었다. 나도 방금 똑같은 생각을 했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안 돼!’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무슨 목적으로 청룡을 찾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절대, 절대 그 녀석과 그 사람들을 먼저 만나게 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그 녀석, 더욱 꼭꼭 숨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아인스턴 왕국인들…… 죽을지도.’
나야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 녀석을 만나겠다고 하는 거고.
수인도 아닌 ‘인간’이 무슨 배짱으로 그 녀석을 만나겠다는 건지.
왜냐면 그 녀석…….
‘……지독한 인간 혐오증 말기란 말이야.’
그 녀석이라면, 아인스턴 왕국인들의 목숨을 빼앗고도 남는다.
사실 친분도 없는 아인스턴 왕국인들이 죽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그래도 목숨은 소중하니까.’
그 어리석은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당장 산에 올라야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서두르죠!”
* * *
그렇게 씩씩한 마음가짐으로 서쪽으로 향한 것까진 좋았는데.
산의 초입에 도착하자마자, 딱 맞닥뜨려 버렸다.
예의 아인스턴 왕국인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