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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78화 (78/144)

##  78화. 돈이 없어

‘돈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돈이 필요한데, 돈이 없다!

아니 뭐 아예 없는 건 아닌데, 그레이안에게 손 벌리기보다는 이왕이면 내 힘으로 마련하고 싶다.

그래서 보석을 좀 팔았는데 그래도 역시 부족하다. 내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이 돈으로는 수인 노예 100명은커녕 50명도 못 사…….’

얼마 후면 아인스턴 왕국에서 대규모 노예 경매가 열리는데, 그 경매에 나올 수인 200명을 모조리 구출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

수인 노예의 가격이 생각보다 비싸더라고. 어떤 종족인가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지만…….

‘그냥 노예 경매장을 습격해 버리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러려면 또 아르윈과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괜히 무력을 동원했다가 솔즈베리 가문의 짓이란 게 발각되기라도 하면, 외교 문제로 번질 테지.

그러니까 습격은 안 된다……. 마음 같아선 다 뒤집어엎고 깽판 치고 싶지만.

‘후우, 생각해 보자. 당장 돈 나올 구석이 어디 있을까?’

여러 가지 사업 구상안을 떠올려보긴 했는데 전부 실용성이 없었다.

이세계물 소설이나 만화에서처럼 주인공이 아무거나 해도 대박이 나면 참 좋을 텐데…….

이곳, 엘로윈 왕국에서는 현실적으로 무리수인 게 너무 많았다.

일단 편의 용품을 만들어 파는 사업. 이건 웬만해선 마도 공학으로 해결이 되기 때문에 패스.

요식업? 프랜차이즈? 큰 도시가 몇 없는 엘로윈 왕국에서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식자재 유통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사치품 사업을 하자니, 엘로윈 왕국의 사람들은 사치를 즐기지 않는다. 사치품의 수요가 아인스턴 왕국에 비해 현저히 적다.

‘사업을 할 거라면 차라리 아인스턴 왕국에서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여하튼, 돈이 있어야 뭐든 한다.

여태 솔즈베리 공작가가 노예 수인들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던 까닭이, 바로 돈 때문이었다.

‘솔즈베리 공작가는 그렇지 않아도 돈 들어갈 데가 많으니까.’

솔즈베리 공작가의 1년 예산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국경 방위를 위한 군사 자금.

‘아무래도 그게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지. 국경이 뚫리면 아인스턴군이 엘로윈의 수도까지 침공해 오는 건 시간문제이니.’

……가만 생각하면 할수록, 아인스턴 왕국인들의 주머니를 털어야겠다는 의지가 강해진다…….

그러니 아인스턴 왕국으로 수출할 만한…… 아인스턴인들이 안 사고는 못 배길, 그런 물건을 만들어내야 할 거 같은데…….

“역시 사진기가 제격이지 않으려나.”

“꺄웅?”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했더니, 토끼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는 의미겠지.

귀여운 토끼를 보자니 긴장이 풀려서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손을 뻗어 토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자, 쫑긋 솟아 있던 귀가 자동으로 접힌다.

‘그러고 보니 내 통역 귀걸이…… 어디에 뒀더라.’

최근 나에게 친절해진 아르윈에게 수리를 맡겼었는데.

어제 저녁인가, 아르윈이 나에게 돌려주면서 이리 말했다.

‘일단은 고쳤습니다만, 이게 워낙 오래된 마도구라 계속 잔고장이 날 겁니다. 그러려니 하시는 수밖에 없어요.’

뭐, 고친 게 어디인가 싶어 고맙다고 하며 넙죽 받았더랬지.

나는 침대 옆 협탁 위에서 귀걸이를 찾아 착용한 후, 다시 토끼의 곁으로 돌아왔다.

이 고물 귀걸이가 오늘은 제대로 좀 작동해 주면 좋겠다. 그리 생각하며 에이프릴에게 말을 걸었다.

“사진기가 뭐냐면, 내가 생각해 낸 마도구인데…… 대상의 순간을 포착해 낼 수 있는 거야. 그림처럼, 아니, 그림보다 훨씬 선명하게 어떤 풍경이나 사물의 모양 같은 걸 종이에 남기는 거지.”

열심히 손짓하며 설명해 주자니 에이프릴이 귀를 쫑긋거렸다.

흑요석처럼 까만 두 눈은 호기심을 품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귀엽다. 꼭 끌어안고 싶어.

“끼앙 까우웅 꺗.” (그런 게 있으면 편하고 좋을 거 같아.)

오, 귀걸이가 제대로 작동한다.

나는 화색을 띠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걸 아르윈에게 부탁해서 만들어 달라고 할까 고민 중이야. 만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면, 아인스턴 왕국에 수출해서 부유한 남부인들의 지갑을 털…… 아니,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 같아. 네 생각은 어때?”

“끼아앙! 꺄웅!” (내 생각도 그래! 잘 될 거 같아!)

토끼가 읽고 있던 책을 팽개치고 폴짝 뛰어오르며 말했다.

이렇게나 격하게 긍정해 주다니……! 감동한 나는 토끼를 붙잡아 품으로 쏙 끌어당겨 안았다.

“좋아, 그럼 사진기 사업 계획을 아르윈에게 말해 봐야겠어……. 그 사람, 요새 나한테 되게 친절하거든.”

그레이안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태도가 아주 깍듯해졌다.

그레이안과 아르윈은 군신 관계라기에는 어딘지 미묘한 데가 있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대충, 조카와 삼촌 같은 관계인 듯하다.

그렇다면 무려 천 살이나 먹은 흑룡 수인이 그레이안의 말 한 마디에 태도가 확 바뀐 것도 이해는 간다.

예를 들어 조카가 ‘계속 그런 식이면 삼촌 안 볼 거야’라고 한다든지― 그러면 아무래도 쩔쩔매게 되는 법이지.

‘아니면 단순히 그동안 나를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친절해진 걸 수도 있고.’

뭐, 여전히 장난스러운 사람이기는 하다.

“그런데…… 무슨 책 읽고 있었어?”

그나저나 아까부터 토끼가 뭘 열심히 읽던데.

궁금함에 토끼를 옆자리에 내려두고 책의 표지를 살펴봤다.

‘음, 이거…… 책이라기엔 너무 얇은데?’

자세히 보니…… 책이 아니라 잡지였다.

그것도 무려 정치, 경제 이슈를 다룬 잡지.

‘아니, 무슨 12살짜리가 이런 걸 다 읽어……? 영재 교육의 일환인가? 그런 것인가?’

나는 허허 웃으며 잡지를 들고 펼쳐보았다.

그다지 흥미를 끄는 내용은 없는데…… 유독 신경 쓰이는 헤드라인이 하나 있었다.

‘[엘로윈 왕가의 철도 사업, 반 년째 지지부진……. ‘왕국 전체를 편하고 빠르게 잇는 꿈’ 물거품 되나]……?’

철도라니, 증기 기관을 이용한 기차가 다니게 되는 건가? 아니면…….

관련한 내용을 나는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열차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마정석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도 문제이다. 마정석 값이 최근 계속 급등하고 있으므로, 철도 공사를 무사히 마쳐 열차가 다니게 되더라도 필연적으로 높은 가격을 표 값으로 책정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순간, 머릿속에 형광등이 켜진 듯 생각이 번뜩였다.

‘철도 사업, 이거 잘만 하면 초대박인데…….’

나는 서둘러 나비들을 불러들여 ‘마정석’에 대한 내용을 원작에서 찾게 했다.

물론 에이프릴이 안 보는 데서. 대정령과 계약한 뒤로 에이프릴은 나비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됐으니 조심해야 했다.

곧이어 나비들의 들뜬 말소리가 들려왔다.

{앗, 찾았어!}

{이게 있네.}

{이것도 다 내다본 건가?}

‘얼른, 얼른 띄워 봐!’

몇몇 나비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뒷전으로 미뤄두고, 원작 내용부터 얼른 확인해 봤다.

현재 시점에서 약 5년 후에 발견될, 대규모 마정석 광산의 위치.

{……그 광산은 솔즈베리 공작령, 카나번에서 발견됐지만 결국 엘로윈 왕가의 소유가 되었다. 욕심 없는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왕가의 철도 사업을 위해 흔쾌히 양보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애국심 넘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달리 보면…….}

‘아아아악 바보 같은 그레이안 솔즈베리! 그걸 왜 양보해!!’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적 비명을 질러댔다.

착한 것도 정도가 있지! 그게 어떤 광산인데! 앞으로 마도 공학에 혁신을 불러일으킬 초-거대 광산이라고!

‘이 광산은 반드시 사수한다. 내가 먼저 발견한다. 기필코.’

물론 그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만!

‘철도 사업부터 인수해야겠어.’

헐값에 인수하려면, 왕가에서 그 사업을 손놓은 지금이 제격이지.

‘나중에 왕가에서 광산을 탐내더라도, 철도 사업을 들먹이면 방어가 될 테고……. 좋아, 가보자고!’

나는 앞뒤 안 가리고 얼른 계획을 실행했다.

1. 나비들을 시켜 광산의 위치를 찾아내게 하기.

2. 엘로윈 국왕에게 좀 뵙자고 서신 보내기.

3. 그레이안과 상의하기…… 이걸 2번보다 먼저 해야 하나?

에라, 모르겠다. 일단 국왕에게 보낼 서신부터 썼다.

[……존엄하신 국왕 폐하, 이리 서신을 보내게 된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 * *

“사진기요?”

“네, 사진기요.”

더해서 아르윈에게도 사진기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흐음…….”

그는 영 뚱한 반응이었으나, 구체적인 사업 계획― 그리고 (아인스턴 왕국인들의 지갑을 털 거라는) 내 야망을 설명해 주자 눈을 빛냈다.

“제법 그럴듯한 계획이로군요……?”

“그렇죠? 솔직히 엘로윈에서는 그다지 수요가 없겠지만, 아인스턴이라면 얘기가 다르죠!”

아인스턴 왕국인들은 자본주의형 과소비에 미친 자들이라 ‘사진기’에도 틀림없이 지대한 관심을 보일 것이다.

화가를 고용하지 않고도,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빠르고 손쉽게 포착해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물욕을 돋우는 물건인가!

‘여기에 거대 마정석 광산에 철도 사업까지 더하면…… 조만간 돈방석에 앉겠군. 하하하하하.’

그날 내내, 내 입가에는 자본주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밤이 되어 그레이안과 긴밀히 상의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음……. 그러시군요. 부인이 뭘 하든 부인의 자유이니 저는 반대하지 않겠습니다만,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이시는군요.”

“에헤헤. 그래 보여요? 사실, 맞아요. 대박이 날 거라는 확신이 있거든요. 후후후후…….”

너무 들뜬 나머지 이상한 웃음도 여러 번 흘렸다.

그런 내 손을 꼬옥 잡으며, 그레이안이 은근한 목소리로 청해 왔다.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리하여 얼떨결에 들어주게 된 그 부탁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

‘은근히 파렴치한 구석이 있어. 아주 요망해.’

마냥 정직하고 올바를 것 같은 이미지의 그레이안이지만 말이다.

밤만 되면 무서울 정도로 요망해진다. 덕분에 오늘도 늦잠을 잤다…….

“아이고…….”

시큰거리는 허리를 두드리며 욕실로 가서 거울 앞에 서 보니…….

역시나, 불그스름한 꽃잎 같은 자국이 온몸에 가득 퍼져 있다.

“미치겠네.”

내가 무슨 사탕이라도 되는지 맨날 물고 핥는 그레이안 솔즈베리를 속으로 욕하며,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목이 긴 옷을 입어야 해서 여러모로 불편했다……. 그레이안 용서 못 해…….

아무튼 토끼와 함께 아침을 먹을까 해서 에이프릴의 방으로 향하려는데―.

{글로리아!}

{신난다! 찾았어!}

갑자기 내 곁에 나타난 나비들이 호들갑을 떨며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찾았다니, 설마……?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데,

{……?}

나비들이 멈칫하더니 나를 쓱 살펴보곤…….

{어제도 뜨거운 밤을 보냈구나!}

‘아니야!’

{아니긴~! 다 티 나~!}

{우린 다 알 수 있어!}

{언제 아기 생겨?}

‘아니야……! 아니라니까? 끝까진 안 갔다고!’

그렇게 약 5분간 대환장쇼를 치른 후, 겨우 본론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자, 바로 여기야. 네가 찾아달라 한 그 청룡 수인의 은거지.}

나비들이 허공에 띄운 푸르스름한 지도.

그 위에, 선명한 붉은 점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남주 후보 3.

청룡 수인인 그 녀석을, 마침내 찾아냈다.

……그런데 그 녀석, 몇 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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