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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77화 (77/144)

##  77화. 다 계획이 있다

아르윈은 굉장히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그도 청룡의 피가 지닌 효능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하기야, 용족들은 서로 왕래가 거의 없는 데다 가족 단위로 흩어져 사니까…….

청룡의 피가 어떤 효험을 지녔는지 흑룡 수인이 알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각 용족이 지닌 능력은 엄중한 기밀로 부쳐지기 때문에.

‘그렇다고는 해도 천 년이나 살아온 아르윈이 청룡 수인에 대해 모른다는 건 뜻밖이지만.’

이 흑룡,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만 해박한 부류인 게 아닐까?

아무래도 마법사이니까 그럴 확률이 높다. 마법사들은 좀 그런 편이지.

“청룡 수인이라……. 그러고 보니 저도 예전에 그들의 은거지를 찾아내려 한 적이 있습니다.”

“엇……. 그래요?”

“예, 제 피에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듯, 다른 용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다른 용족의 피에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를 풀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르윈도 그렇게 생각했던 거로군요?”

“그렇지요.”

씩 웃으며 대답한 아르윈이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으려던 나는 잠시 멈칫하고 그레이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아르윈 때문에 그런 거 같은데…….

그레이안의 손을 슬그머니 잡고 끌어당기자, 나를 바라본 그가 굳어 있던 표정을 스르르 풀었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자니 따라 웃는다.

음, 잠깐은 시간을 빼앗아도 괜찮을 듯싶은데. 청룡 수인에 대한, 중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는 그레이안의 눈치를 살피며 그를 자리로 끌어당겨 앉혔다. 얌전히 앉는 걸 보니 안심이 된다.

그렇게 아르윈의 맞은편에 우리 둘이 앉고 나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청룡 수인의 은거지는 깊은 산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어디의 어느 산인지,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지…… 끝내 알아낼 수 없었죠.”

“아하…….”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으나, 청룡의 피는 정화의 힘을 지녔다는 추측이 무성합니다. 청룡의 뿔을 약재로 쓰면 만병이 낫는다는 소문도 있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청룡 수인들은 쉽게 표적이 되었고, 그 탓에 더욱 치밀하게 숨어살게 된 것입니다.”

마침 비슷한 지식이 머릿속에 떠올라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르윈은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공작 부인께서는…… 청룡 수인에게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를 풀 해답이 있다고 확신하시는 겁니까?”

“어……. 확신이랄 것까진 아닌데, 저도 청룡 수인에 대해 비슷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서요.”

일단은 그렇게 둘러댔다. 제법 그럴싸한 해명이라 그런지, 아르윈도 더는 캐묻지 않고 고개를 주억였다.

“혹시 세계수의 성령들을 풀어 청룡 수인을 찾게 하셨습니까?”

귀신이다. 혹은 족집게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부정할 이유는 없으므로 묵묵히 수긍해 보였다.

그러자 아르윈은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행동이 빠르시군요, 공작 부인. 설마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를 풀기 위해 벌써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것 참…… 감격이라 해야 할지.”

저 까탈스러우신 분이 웬일로 나를 칭찬하나 싶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을 깜박이며 볼을 긁적이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그레이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왜인지 멍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 공작님께서도 감명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렇죠? 공작 각하.”

아르윈의 말에 그레이안은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쏘아볼 뿐이었다. ……확실히, 아르윈에게 화가 나 있는 것 같지.

그 이유야 쉬이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솔즈베리 공작가의 비극에 대해 그레이안이 나에게 직접 알려주기도 전에 아르윈이 선수를 쳤으니.

그레이안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만도 하다.

“그럼, 저도 청룡 수인의 은거지를 다시 수색해 보도록 하지요. 사실 제 쪽에서는 백룡 수인을 찾고 있었습니다만.”

“백룡 수인이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되물었다.

백룡 수인이라면…… 청룡 수인보다도 희귀한 존재가 아니던가? 세상에 남은 개체가 있는지조차 의문이라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실마리를 잡아서요. 뭐, 정말로 찾아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백룡 수인의 피에도…… 정화나 치유의 힘이 깃들어 있을까요?”

“글쎄요. 확실한 건 백룡 수인을 직접 만나 봐야 알겠지요. 그들이 우리를 도와줄지도 만나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청룡 수인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용족은 대체로 폐쇄적이니까.”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사는 아르윈이 특이하다고 봐야겠지. 블랙맘바로 위장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아르윈이 흑룡 수인이라는 사실은 또 누가누가 알고 있을까?

여하튼 간에, 청룡 수인의 은거지를 찾는 데 아르윈도 힘을 보태기로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더하여 백룡 수인도 찾아본다고 하니, 나도 내 곁에 남은 나비들을 시켜 거들면 어떨까 싶었다.

그러나 나비들의 의견은 달랐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청룡 수인만 찾으면 되잖아? 청룡 수인의 피에 저주를 풀 힘이 있다는 건 확실하니까.}

{맞아. 우리는 네 곁에 남아서 너를 지켜야 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구.}

나비들의 말도 과연 일리가 있는지라 나는 고민에 빠졌다.

백룡 수인……. 궁금하긴 하지만, 청룡 수인만 찾으면 되는데 굳이 백룡 수인까지 찾아볼 필요는…… 없겠지, 아무래도.

결국 백룡 수인을 찾는 일은 거들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레이안과 아르윈이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내 방을 나서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곧 둘이서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겠군.’

뭐…… 별일이야 있겠어? 알아서 잘 풀겠지. 한 명은 천 살 먹은 용족이고, 다른 한 명은 어엿한 성인이니까.

* * *

“있잖아, 그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최근, 아인스턴 왕국은 글로리아 왕녀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엘로윈 왕국의 늑대 수인 가문인 솔즈베리의 가주와 결혼해 모국을 떠났던 왕녀가, 다름 아닌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했다는 소문.

“글로리아 왕녀는 백치에 개차반이라며? 그런 사람이 어떻게 세계수의 성령들과 계약해? 말도 안 되는 소문이야.”

대다수가 그 소문을 믿기 어려워했지만, 글로리아 왕녀가 성령들을 부리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는 이들의 증언이 제법 생생했기에 의외로 신빙성이 있었다.

“마수의 피와 살점이 땅에 뿌려지면 토양이 오염되잖아. 근데 그걸 완벽하게 정화해 냈다나 봐. 정말 굉장하지 않아?”

“셀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나비들이 날아올랐는데, 반투명한 형체에 오팔처럼 영롱한 빛을 내뿜었대.”

“세계수의 전설과 똑같네.”

“그러게 말이야. 정말로 글로리아 왕녀가 세계수의 나비들과 계약한 걸까?”

담론은 ‘그래서 글로리아 왕녀가 아인스턴 왕국으로 돌아올 것인가.’라는 의문으로 흘렀다.

“알폰스라면 엘로윈 왕국의 영토잖아. 수인들의 영지일 텐데 힘을 쓴 걸 보면, 거기서 꽤나 잘 대접받고 사나 본데? 내 생각엔 글로리아 왕녀가 아인스턴으로 돌아올 일은 없을 것 같아.”

“어차피 아인스턴에서는 왕위 계승 서열도 낮고, 권력도 뭣도 없는 왕녀잖아. 나 같아도 그냥 엘로윈에서 대접받으며 살겠다.”

“그렇지만 세계수의 성령들과 계약했잖아? 국왕 폐하께서 장난 아니게 밀어주실 거 같은데.”

“얘는 무슨 소리람. 우리 국왕 폐하께서는 그러실 위인이…….”

그때였다. 자습실의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리자, 둥글게 모여 떠들던 학생들은 재빨리 자리로 가서 앉았다.

아인스턴 왕립 아카데미의 교수, 테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부에 열중하는 척하는 제자들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진심을 담아 당부했다.

“모두 말조심해라. 낮말도, 밤말도 전부 높으신 분 귀에 들어가게 되어 있으니…….”

“네…….”

작게 대답한 학생들이 얼른 다시 자습하는 체를 했다.

테나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제자들을 훑어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으며 자습실을 빠져나왔다.

국왕의 폭정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아인스턴 왕궁 내, 왕녀 에반젤린의 궁전.

“그 빌어먹을 계집애가 날 속였어!”

에반젤린은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지며 패악을 부렸다.

시녀들은 주춤거리며 몸을 사릴 뿐, 그 누구도 나서서 에반젤린을 말리려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괜히 에반젤린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불똥이 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저 우악스러운 손에 머리털이 한 움큼 뽑혀 정수리에 구멍이 날 수도 있었고, 그보다 더 운이 나쁘면 몸의 뼈 하나가 부러질지도 몰랐다.

시녀들도 최소 기사의 딸 이상의 신분을 지닌 규수들이었으나, 에반젤린은 왕족이었다.

아인스턴에서 왕족이 지닌 힘은 막강했다.

왕자와 왕녀들은 국왕의 폭정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글로리아 아인스턴……. 네가 감히…….”

이를 바드득 갈며 허공을 노려보는 에반젤린의 두 눈에 선명한 핏발이 섰다.

에반젤린은 너무도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얼마 전 글로리아를 가든 파티에 초대하고도 세계수의 나비들에 관해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조롱당했기 때문에.

자신을 비웃은 형제자매들에게도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으나, 역시 가장 거슬리는 상대는 글로리아였다.

‘그 망할 천것, 어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려서 뭘 모를 때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렸어야 했는데.’

어떻게 그런 사생아 따위가 세계수의 성령들과 계약할 수 있단 말이지?

너무 분하고 억울했다. 왜 내가 아니라 그 계집애인 건데? 멍청한 짓밖에 할 줄 모르는 그 백치가 어떻게…….

‘……부왕은 보나 마나 글로리아를 아인스턴으로 다시 불러들일 생각이겠지.’

그럼 글로리아는 좋다고 돌아올 테고, 부왕의 꼭두각시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들은 그 멍청이를 성녀로 추앙하겠지.

‘안 돼. 그 꼴은 죽어도 못 봐.’

에반젤린의 녹색 눈이 희번덕 빛났다. 그녀는 늘 그렇듯,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유능한 종을 찾았다. 바로―

“세이렌! 어디 있어?! 당장 내 곁으로 와!”

글로리아가 결혼할 때 두고 간 주술사, 세이렌이었다.

비록 글로리아를 모시던 종이었지만, 현재의 세이렌은 온전히 자신에게 충성하고 있다고― 에반젤린은 그렇게 믿었다.

“부르셨습니까, 에반젤린 님.”

아니나 다를까, 부른 지 10초도 채 안 되어 세이렌이 에반젤린 앞에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충직한 시종이라 생각하면서 에반젤린은 흘리듯 웃었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턱을 치켜들며 명령을 내렸다.

“글로리아, 그 천하고 분수도 모르는 년을 내가 필히 저주해야겠다.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예, 준비하겠습니다. 다만 꽤 오랜 시일이 걸릴 수 있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난 그 계집애가 설치는 꼴은 도저히 더는 못 봐주겠으니까. 글로리아에게 세계수의 나비들이 있다는 거, 알지? 저주를 걸 때 그 점을 주의해야 해.”

“물론입니다.”

“그래, 알았으면 이만 가 봐. 그리고 오늘 자정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내게 보고하러 와!”

“네, 에반젤린 님.”

세이렌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엉망이 된 방 한가운데서, 에반젤린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어깨에 힘을 쭉 뺐다.

그녀는 자신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요소 중, 이 천장화를 가장 좋아했다.

드높은 하늘에서 구름이 걷히며 축복의 빛이 쏟아지는 장면…….

수많은 사람이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지만, 하늘 위에 오를 수 있는 선택된 자는 단 한 명뿐.

에반젤린은, 그 한 명이 바로 자신이라고 언제나 철석같이 믿어왔다.

나는 천재적이고, 유능하며, 특별하다.

그런 내가 글로리아 따위에게 밀리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그 천한 것을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수밖에.

그 계집애는 가장 더럽고 비천한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니까.

천장화를 올려다보는 에반젤린의 입가에 서서히 냉소가 번져나갔다.

* * *

세이렌은 아무도 안 보는 장소에 다다라 후드를 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날씨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기실 ‘아무래도 상관없는 게’ 어디 날씨뿐일까?

창백한 입술에 가벼운 웃음이 맺혔다.

에반젤린은 과연 다루기 쉽다.

국왕인 라니에로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세계, 어느 시대이든지 간에, 인간은 어리석고, 나약하고, 추악하고…….

아주 사소하고 사악한 동기만으로도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아무리 방해해 봐야 소용없어, 에티엔.”

후드를 내려 웃음을 감춘 뒤, 세이렌은 다시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야유회를 나가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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