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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여주의 새엄마가 되었다-76화 (76/144)

##  76화. 비극

이야기는 약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도 솔즈베리 가문은 아인스턴 왕국의 큰 골칫거리였다.

솔즈베리 가문이 엘로윈 왕국의 국경을 수호하고 있었기에, 아인스턴 왕국으로서는 영토 확장에 큰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다.

“아인스턴 왕국은 예로부터 대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려는 욕심이 강했습니다. 세계수가 있는 성지, 히페리온을 사이에 두고 대륙을 반으로 나눠 그중 풍요로운 남쪽을 가졌음에도 만족할 줄 몰랐지요.”

그래서 늘 엘로윈의 국경을 침범하려 했지만, 솔즈베리 가문의 무력에 번번이 저지당해 왔다. 현재까지도 말이다.

“거듭되는 패전에 아인스턴 왕국은 국경을 수호하는 늑대 수인들의 상식을 넘어선 전투력이 가장 걸림돌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그 최고 통솔자인 솔즈베리 가문을 무너뜨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솔즈베리 가문에 치명적인 저주를 내리는 것이었고.

“계획대로 저주는 제대로 먹혀들었지요. 사실 솔즈베리의 혈통은 주술에 강한 편입니다만…… 저주를 건 그 주술사가 정말로 강력한 힘을 지녔던 모양인지, 어처구니없게도 너무 쉽게 걸려들고 말았지요.”

그리하여, 백여 년 전의 선대 솔즈베리 공작은 저주를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도 저주를 풀 수 없었고, 저주를 건 주술사의 행방도 묘연했다.

결국 저주를 풀지 못한 선대 공작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짐승이 되고야 말았고―.

“……최악의 비극이 일어났지요.”

짐승이 되어 가던 선대 공작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

바로 선대 공작 부인, 그의 반려를…….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늑대의 본능에 따라, 잡아먹게 되고야 만 것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충격에 젖은 채로, 온몸의 말초 기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멍하니 느끼고 있을 뿐.

“인간을 잡아먹으면 저주가 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바로 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어디 끔찍하다 뿐일까.

비참하고 참혹한 일이었다.

“……이후로 솔즈베리 가문에서 인간을 반려로 맞이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습니다. 백여 년 동안, 저주가 발현된 가문의 직계 후손들은 스스로 지하에 갇히기를 택했지요.”

“…….”

하지만 그레이안의 어머니, 전대 솔즈베리 공작 부인은 인간이라고 했다.

그레이안의 아버지는 금기를 깨면서까지 그녀를 반려로 맞이했던 것이다.

‘……전대 솔즈베리 공작은…….’

그레이안의 아버지인 그 사람은, 늑대의 모습으로 지하에 갇혀 있는 것일까?

그런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아르윈이 답을 내어 주었다.

“그레이안의 친부는, 저주에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

“그래서 지하의 늑대들 중에 그는 없습니다.”

저주에 완전히 잠식당하고 나면, 솔즈베리의 피가 흐르는 늑대 수인은 그야말로 짐승이 되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죽지 못하는 불사의 괴물이 되어, 인간의 피와 살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된다고 하니…….

전대 솔즈베리 공작의 선택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갔다.

“그의 반려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데에는 반려의 곁으로 가고자 했던 이유도 있었을 겁니다.”

“…….”

“바람직한 죽음은 아니었죠. 남겨진 그의 아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레이안.

그를 생각하자 뜨거운 무언가가 명치까지 울컥 차올랐다.

자신의 아버지가 자결한 후에 혼자 남겨져야 했을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레이안이 여태 무슨 마음가짐으로 꿋꿋이 살아왔는지도.

“제가 들려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렇게 아르윈은 장장 이십여 분 동안 이어나간 이야기에 끝을 맺었다.

이야기하는 내내 가끔 허공을 헤매기도 했던 그의 눈은 이제 올곧게 나만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필시 선택이리라.

양자택일.

앞으로도 계속 그레이안의 반려로 남을 것인지, 흑룡의 피를 마시고 각인을 끊어 낼 것인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고민 따위는 애초에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겠지.

빛나는 크리스털 병과 아르윈의 담황색 눈을 번갈아 보며, 살며시 입을 연 순간이었다.

벌컥!

노크도 없이 갑작스레 문이 열리더니, 방 안으로 누군가 들이닥쳤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그레이안이었다.

* * *

제발, 늦지 않았기를.

마침내 글로리아의 방 앞에 다다라, 그레이안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노크조차 하지 않고 문을 연 것은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이대로 폭발할 것만 같았다.

“……글로리아.”

초조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읊조린 그레이안은 성큼성큼 걸어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글로리아는 소파에서 반쯤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손을 뻗으려던 그레이안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크리스털 병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 병 안에는 핏빛 액체가 들어 있었다.

‘저건…….’

그레이안의 시선이 아르윈에게 가 닿았다. 아르윈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레이안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아르윈과 크리스털 병을 번갈아 본 그레이안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아르윈의 피로군.’

모든 마법을 무효화하는 흑룡의 피.

저게 왜 테이블에 놓여 있는지는, 묻지 않아도 명확한 일이었다.

“…….”

아르윈을 매섭게 노려봐 준 후, 그레이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면서 글로리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을 빠르게 깜박이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레이안…….”

그녀가 슬그머니 자신을 부른 순간, 그레이안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움찔했다.

눈꺼풀이 경련이 난 것처럼 떨렸다. 그레이안은 머릿속으로 말을 고르며 입을 달싹였지만, 쉬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적 속에서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걸음을 뗀 것은 뜻밖에도 글로리아였다.

그녀가 소파를 넘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그레이안은 놀라 움츠렸다.

“…….”

글로리아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가만히 그를 살펴보기만 하더니, 별안간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

그에 비하면 한참 자그마한 그녀의 몸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그레이안은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조금 비틀거렸다.

방황하던 두 손이, 그의 상체를 더욱 꼭 껴안는 그녀의 등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이야기, 들었습니까?”

“네…….”

그의 품 안에서 작게 대답한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맑고 선명한 파란 눈 안에 자신의 모습이 가득 담기는 것을, 그레이안은 잠시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

그리 묻는 목소리는 의외로 덤덤하게 흘러나와서, 그레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설핏 자조할 뻔했다.

사실은 두려움에 떨고 있으면서.

“그렇지 않아도 그 얘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입을 연 글로리아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아르윈이 불쑥 끼어들었다.

느직이 몸을 일으킨 그는 나른해 보이는 태도로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예의 크리스털 병이 들려 있었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공작 부인.”

그것을 글로리아에게 내밀며, 아르윈이 사뭇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이 작은 병 안에 든 약간의 피로 각인을 없던 일로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나는…….”

글로리아가 입을 달싹였다.

그레이안은 아르윈의 손에 든 저 크리스털 병을 낚아채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 내고 있었다.

그런 짓을 해봤자 글로리아만 놀라게 할 것이다.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아르윈은 제 피를 또 뽑아내고도 남을 위인이었으니.

‘……제발, 글로리아.’

그렇기에 초조하고도 간절한 마음으로 바랄 뿐. 그녀가 부디 자신을 선택해 주길. 자신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길. 나는 당신을 믿고 있노라며 눈빛으로 전하며.

“……나는 그 피가 필요 없어요, 아르윈.”

마침내 대답한 글로리아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그레이안을 끌어안은 채로.

“처음부터 고민조차 하지 않았어요. 내 마음은 확고하니까.”

이내 그레이안을 올려다본 글로리아가 그와 눈을 마주치며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이, 올곧고 또렷할 따름이었다.

* * *

사람은 자신과 가까운 이의 감정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생물이다.

그건 상대가 수인이어도 마찬가지였으니, 나는 그레이안이 불안해하고 있음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어서 그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표현하고 싶었다. 내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내가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나는 그 피가 필요 없어요, 아르윈.”

작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고서 그레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어서 덧붙이는 말에는, 좀 더 힘이 실렸다.

“처음부터 고민조차 하지 않았어요. 내 마음은 확고하니까.”

나를 보는 그레이안의 눈빛이 연약하게 떨렸다.

나는 그를 더욱 강하게 껴안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정말로 괜찮다는, 안심해도 된다는 의미로.

내 뜻이 전해진 것인지, 여태 머뭇거리던 그레이안이 드디어 나를 힘껏 마주 안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한편에서 아르윈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그레이안이 나를 슬그머니 놓아주었다.

얼굴을 살짝 붉힌 채 눈을 빠르게 깜박이는 그는 조금 민망한 기색이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좀…… 어리숙하게 굴었군요.”

“아니에요, 얼마든지 어리광 부려도 괜찮아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머리에 물기가 가득했다.

피부도 촉촉해 보이고, 좋은 향기도 난다. 급히 씻고 부랴부랴 온 모양인데.

“이러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그레이안.”

“……괜찮습니다. 저는 워낙 튼튼해서…….”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나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머리를 말려 주었다. 작은 손수건이 금세 젖어버려 별 소용은 없었지만.

“…….”

자신을 챙겨 주는 나를 그레이안은 묘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일을 조금 낯설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복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슬펐던 마음 위로 포근한 무언가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나는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나에게 다정함을 주었듯이, 나도 그러고 싶다고― 문득 생각하면서.

* * *

아르윈이 가져왔던 흑룡의 피는 결국 폐기처분되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르윈이 직접 불태워 버렸다.

“실례 많았습니다, 공작 부인. 앞으로는 당신을 의심하는 일 따위 추호도 없을 겁니다.”

갑자기 태도가 180도 변해서는 깍듯이 구는 아르윈을 보니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예전처럼 오만불손한 태도로 나를 대하는 게 차라리 편할 거 같은데.

‘어르신이기도 하고…….’

천 살이라니. 그렇게 오래 산다는 건 도대체 어떤 감각일까? 나는 못내 신기해하며 아르윈을 힐끔거렸다.

“저를 그렇게 걸어 다니는 유물 보듯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평소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

드, 들켰나. 민망함에 눈을 깜박이며 아르윈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다소 재미있어하는 기색이었다.

이어서 그레이안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윈, 잠시 이야기 좀 해.”

그 순간, 마침 내 머릿속에서도 아르윈에게 하려던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정확히는 ‘할까 말까’ 고민 중이던 이야기.

잠시 망설였을 뿐, 기회가 있다면 이때뿐이라는 생각에 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고 보니 저도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지금이라면 이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저자세로 나오는 와중에 꼬치꼬치 캐묻진 않을 테니.

나는 아르윈을 향해 냉큼 물었다.

“혹시, 청룡 수인의 은거지가 어디인지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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