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아르윈이 개인적으로 나를 찾아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블랙맘바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나 싶어 나는 자못 긴장한 채로 그를 힐끔거렸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작 부인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러 왔으니까요.”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요?”
“예, 다름이 아니라…….”
아르윈은 말을 흐리더니 허공에 웬 크리스털 병 하나를 소환해 냈다. 작고 투명한 병 안에는 정체 모를 붉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이건 제 피입니다, 공작 부인.”
“……!”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아르윈과 크리스털 병을 번갈아 보았다.
그의 손짓에 따라 병이 흔들리며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지만, 용족의 피에는 저마다 신비한 힘이 담겨 있지요.”
“용족의…… 피요?”
용족이라고? 이 사람 방금 용족이라고 한 거야?
‘아니, 그럼 설마―!’
“예, 제가 흑룡 수인이거든요.”
“그럴 줄 알았어!!”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가 재빨리 헛기침하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민망해하는 나를 보며 아르윈은 입매를 한쪽만 끌어올려 웃고 있었다.
나는 그를 힐끔거리며 그간의 내 추측이 정확했음에 내심 뿌듯함을 느꼈다. 역시, 단순한 뱀 수인이라기에는 너무 비범하다 싶었지!
“계속 블랙맘바 수인인 척 공작 부인을 속이는 것도 꽤 즐거웠는데 말입니다. 뭐,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 법이지요.”
‘즐거웠다고……? 방금 즐거웠다고 한 거지? 이 블랙맘바― 아니, 흑룡이!’
파르르 떨며 그를 노려보자니 아르윈이 사뭇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무해함(?)을 어필하려는 듯이.
물론 나는 저 미소에 단 1%도 속아 넘어가지 않고 그를 더욱 매섭게 쏘아볼 따름이었다.
아르윈은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 부인께서 저를 좋게 생각해 주시면 참 기쁠 텐데 말입니다. 아무래도 첫인상부터 글러 먹었던 거겠지요.”
‘알긴 아는구나?!’
비록 미친놈이지만 자기 객관화는 잘 되는 모양이다! 머리 좋아야 할 수 있는 마법사라 그런가.
“아무튼, 오늘은 단순히 제가 흑룡 수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려 온 게 아닙니다.”
갑자기 확 낮아진 목소리로 이야기한 아르윈이 예의 크리스털 병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둔탁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꼿꼿이 자리를 잡은 크리스털 병을 나는 흘끗 살펴보았다.
저 안에 든 게 아르윈의 피라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아시다시피, 용족은 그 개체 수가 현저히 적고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지요. 대다수가 깊은 산이나 호수 같은 곳에 은둔해 살아갑니다.”
“…….”
“그 이유는, 용족의 피와 살점, 뼈, 혹은 뿔과 비늘 따위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인 용은 스스로 지킬 줄 알지만, 어린 용은 사냥감이 되기 십상이지요.”
머릿속에 그와 관련된 지식이 몽글몽글 떠올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아인스턴 왕국의 서고에서 보았던 책에 용족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이건 글로리아의 기억일 테지만.
“후손이 인간에게 사냥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용족은 은둔하는 길을 택했지요. 그래서 저 역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허공을 더듬는 아르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먼 과거를 회상하듯이.
나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슬며시 물어보았다.
“아르윈, 대체 몇 살이에요……?”
답은 의외로 빠르게 들려왔다.
“천 살부터는 안 세서 잘 모릅니다.”
“흐억……!”
경악한 나머지 이상한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충격에 머리가 굳었다가 다시 팽팽 돌아가기 시작한다.
천 살…… 천 살이라고……? 이건 뭐 조상님도 아니고 유물 수준이잖아!
‘내 눈앞에 걸어 다니는 유물이 있다!’
용 수인들이 오래 사는 거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심마저 든다.
앞으로는 미친놈이 아니라 미치신 분이라 해야 할지도……? 호칭도 아르윈이 아니라 어르신이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어르신…….”
“예?”
“아뇨, 저도 모르게…….”
나도 모르게 흘린 어르신 소리에 아르윈은 설핏 웃고는 조금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며 가만히 생각해 보다가, 나는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아르윈의 성격이 이상해진 건, 너무 오래 살아서였구나!
‘하여간 너무 오래 살면 다 미친다니까!’
“저에게 있어 당신의 존재는 수수께끼입니다, 공작 부인.”
아르윈이 넌지시 운을 뗐다. 수수께끼라는 말에 지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나는 조금 움찔할 뻔하였으나 가까스로 아닌 척했다.
아르윈의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올곧게 나를 향해 있었다.
“당신에게는 비밀이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 참 궁금합니다만…… 쉽게 이야기해 주실 것 같진 않군요.”
아르윈이 테이블에 놓여 있던 크리스털 병을 집어 들고 만지작거렸다.
저건 대체 왜 들고 온 것인지,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슬슬 대화가 본론으로 흐르려는 조짐이 느껴졌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소문과는 다르게 좋은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만요.”
“…….”
“그러니 묻고 싶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되더라도, 전과 다름없이 그레이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확신에 차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레이안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거 아니에요. 진심이거든요.”
“……좋은 대답입니다만.”
싱긋 웃은 아르윈이 크리스털 병을 다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의 말이 잔잔한 어조로 이어졌다. 폭풍 전의 고요함처럼.
“흑룡의 피에는, 어떤 마법이든 무효화하는 힘이 깃들어 있습니다. 다만 생명체에 한해 효력을 발휘하는 데다, 주술에는 통하지 않지요.”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요?”
“각인이란 것은 마법의 일종입니다.”
“……!”
“까마득한 고대에서 유래한 마법의 서약이지요. 누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그 힘이 일부 수인들의 핏줄을 타고 흐르며 영혼을 묶는다는 것은 분명하지요.”
심장이 불안정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르윈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어쩐지 알 것만 같아서.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반강제적으로 누군가에게 각인하고, 그 상대를 반려로 영원히 사랑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어떤 의미로는 저주와 다름없지요.”
“…….”
“그래도 같은 종의 수인이 서로에게 각인해 반려로 맞이하면 괜찮습니다. 서로를 향한 마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한쪽이 각인을 하지 않는 일족이거나, 인간일 경우에는…….”
태양을 닮은 선명한 담황색인데도, 나를 보는 아르윈의 눈은 얼음처럼 차갑게만 느껴졌다.
“언젠가 변심하게 되겠지요. 절대적인 각인에 묶인 것은 두 사람 중 한 명뿐이니.”
“……언젠가는 나도 변심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가요? 당신은?”
“네, 그렇습니다.”
“…….”
……황당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저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뭐라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만 달싹일 따름이었다.
언젠가는 내 마음이 변하게 될 거라는 아르윈의 주장에 수긍해서가 아니었다.
새삼스럽게 깨달아서였다. 각인이라는 현상이 지닌 부조리함을.
상대가 변심해도 평생 그 사람만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니, 얼마나 비참한 심정일까?
‘……아르윈은 그레이안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는 걸 테지.’
“그래서 저는 공작 부인께 선택지를 드릴까 합니다.”
“……선택지요?”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미소를 지은 아르윈이 크리스털 병을 내 앞으로 쭉 밀어 놓았다.
마치, 그것을 마실 기회를 나에게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지금부터 솔즈베리 가문의 가장 처참한 비극에 대해서 들려드릴 겁니다.”
“…….”
“이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바뀌게 된다면, 그 크리스털 병을 집어 제 피를 마시십시오. 그럼 그레이안과 당신을 묶고 있는 각인은 무효화됩니다. 당신은 각인 때문에 그의 곁에 머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레이안도 자유를 얻겠지요.”
나긋나긋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그는 꼭 창세의 뱀 같았다.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며 이브를 유혹했던.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금부터 들려드리는 이야기는,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가 최초로 발현되었던 때의 일입니다.”
* * *
같은 시각.
기사들의 훈련을 감독하던 그레이안은 집사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전해 듣고 멈칫했다.
“……아르윈이 누구를 만나러 갔다고?”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마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
그레이안의 은회색 눈에 감돌던 살벌한 기운이 삽시간에 짙어졌다.
그 기세에 눌린 집사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무슨 용건이라고 하던가?”
이어서 들려온 그레이안의 물음에, 집사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에 대해선 듣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알았어.”
스릉―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그레이안의 시선이 연무장의 벽 너머, 본관이 있는 곳을 향했다.
야성을 띤 무채색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 * *
땀을 많이 흘린 상태였기에 그레이안은 급히 자신의 방으로 와서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를 다 말리지 못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으나, 서둘러야 했으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정도로는 감기에 걸리지도 않으니까.
‘아르윈이 글로리아를 만나러 간 게……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 때문인가?’
언제나 자신의 보호자처럼 구는 아르윈이라면 참견하고도 남으리라 예상했지만, 설마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
‘언젠가 그 이야기를 글로리아에게 해야 한다면…… 내가 직접 말하고 싶었는데.’
초조함에 걸음이 빨라졌다. 글로리아의 방으로 향하는 길이 유난히도 길게 느껴졌다.
아르윈이 그녀에게 이미 이야기한 뒤일까?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글로리아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내가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붙잡아도 되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그레이안은 자신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더하여 두려워하고 있음을.
그녀를 잃게 될까 봐.
“…….”
애당초 그녀는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었으니 원한다면 놓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벗어나려 하거나, 도망치려 한다면…… 어디로도 갈 수 없게 단단히 붙들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아는데, 그런데, 몰아치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
그레이안은 잠시 복도에 멈춰 서서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무거운 한숨이 잇따라 입에서 흘러나왔다.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모든 진실을 다 전해 듣고도 자신을 선택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보신의 욕구가 있으니 당연히 도망치려 할 거라는 절망.
그 두 가지가 혼재되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
어김없이 한숨을 떨어트리고서 고개를 든 그레이안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아갈 방향을,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신뢰의 문제다.
그래, 신뢰의 문제라고 했었지.
그는 두려움을 걷어낸 맑은 정신으로 결론을 내렸다.
‘나는 그녀를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