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이혼? 안 해!
그레이안의 친부, 전대 솔즈베리 공작은 저주에 완전히 잠식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런 그가 죽기 직전 아르윈에게 남긴 유언은, ‘그레이안을 도와주고 지켜달라, 그리고 솔즈베리의 저주를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르윈 리벤티움이 그 부탁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는 필요에 의해 솔즈베리의 요새를 지키고 있을 뿐, 솔즈베리에 충성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결국 아르윈이 전대 공작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결정한 까닭은― 그가 자신의 친구였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아르윈은 사람을 허투루 사귀지 않았다. 그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늘 그래왔다.
그리고 요하네스 솔즈베리는 그의 아홉 번째 친구였다.
그리하여 현재. 조카와도 같은 존재인 그레이안을 옆에서 보필하는 것으로, 아르윈은 요하네스와의 약속을 착실히 지키는 중이었다.
“그 얘기를, 벌써 했다고?”
“내 반려이니 그녀에게는 알 권리가 있어. 그리고, 더는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 않았어.”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아르윈이 이마를 탁 쳤다.
각인도 너무 이른 게 아닐까 싶었는데, 이건 이거대로 시기상조라는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졌다.
글로리아가 (의외로) 좋은 사람이라는 데에는 동의하는 바이지만, 그녀를 100% 믿는 것은 아니었다. 호감과 신뢰는 엄연히 다른 문제이기에.
“그레이안, 네 심경은 이해한다. 하지만 좀 더 신중했어야 한다고 봐.”
“내 이야기를 듣고서, 그녀는…… 화를 냈어.”
“뭐?”
“그리고 슬퍼했지. 저주를 풀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도 했어.”
“…….”
그레이안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점점 짙어졌다. 은회색 두 눈은 회상에 잠긴 듯 깊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를 믿어, 아르윈.”
“…….”
푹 한숨을 쉰 아르윈이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부전자전 같기도 하다.
요하네스 솔즈베리도 제 아내를 아주 끔찍이 아꼈으니.
‘하여간 늑대들이란.’
식은 차를 마시며 한숨 돌리는데, 그레이안이 더 할 말이 남은 듯 머뭇거렸다. 왜인지 아까보다 사뭇 어두워진 얼굴이다.
“그런데, 실은…….”
“……?”
“……그 이야기는 꺼내지 못했어.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가 처음으로 발현되었던 때의…….”
“아…….”
아르윈이 낮게 탄식했다. 몇 분 사이 100년은 더 늙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서? 어떡할 건데? 그 이야기는 그대로 묻어두길 원해?”
“그럴 수야 없지.”
아르윈의 물음에 씁쓸하게 웃은 그레이안이 다시 일에 집중하는 척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의미 없이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즈음,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 *
“부인, 어쩐 일이십니까?”
그레이안이 활짝 웃으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미소는 마냥 해사한데, 집무실 안의 공기는 묘하게 침잠되어 있었다. 나를 보는 아르윈의 눈빛도 영 수상하고.
“에이프릴이랑 같이 딸기잼 쿠키를 구웠거든요. 그래서 당신에게도 나눠주려고 가져왔어요.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먹어요.”
어찌 됐든 나는 여기까지 온 이유와 목적을 밝혔다. 내가 건넨 꾸러미를 보고는 그레이안은 대번 화색이 되었다.
그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인.”
그러자 내 품에 숨어 있던 에이프릴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나한테는 안 고마워?’ 하고 묻는 듯이.
그런 에이프릴을 보고는 너털웃음을 흘린 그레이안이 상냥한 어조로 덧붙였다.
“고맙구나, 에이프릴. 잘 먹으마.”
“끼앙.”
짧게 대꾸한 에이프릴이 도로 내 품에 쏙 숨었다. 그레이안에게 선물을 한 것이 부끄러운가 보다. 과연 츤데레 토끼.
“그럼 이만 가볼게요. 일하는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방해라니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
우리를 배웅하는 그레이안은 못내 아쉬운 기색이었다. 한편에서는 아르윈이 뚱한 얼굴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얼른 일을 마치고 오후에는 가족끼리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 좋은데,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꺄앙~.”
의욕에 눈빛을 불태우는 그레이안을 뒤로한 채 집무실을 나서려는데, 저만치 복도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그레이안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마침내 우리 앞에 다다른 하인이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해 왔다.
“주인님, 마님. 급한 일입니다. 인세구원회의 잔당이 또 난동을 피우는 중이라고 합니다.”
‘인세구원회의 잔당……. 설마 또 올리비에인가?’
그들 중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라면 올리비에뿐이었다.
얼마 전에는 자해 소동까지 일으켜 사람들을 몹시 당황하게 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알았다, 내가 가보도록 하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한 그레이안이 검과 외투를 챙겨 들었고, 소파에 앉아 빈둥대던 아르윈도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 우리는 인세구원회 일반 신도들을 수용 중인 구금 시설로 향했다.
사실 에이프릴은 두고 가려고 했는데, 계속 고집을 피워서 어쩔 수 없이 동행해야 했다.
열두 살 어린이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듯싶은데…….
시설 안으로 들어서며, 나는 유사시에 에이프릴의 눈을 가릴 준비를 했다.
마침 토끼 모습이라 한 손으로도 충분히 가릴 수 있으니 다행이라 봐야 할까…….
“놔! 이거 놔아! 차라리 죽을 거야! 죽어 버릴래!!”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올리비에를 양쪽에서 붙잡고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올리비에는 계속해서 몸부림치며 난동을 피웠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었고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문의에게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이 세상에도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있다고 들었다. 솔즈베리 성에 없다는 게 문제이지만.
“그, 그레이……?”
때마침 이쪽을 돌아본 올리비에가 그레이안을 발견하곤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어서 그녀가 비척비척 다가오자, 내 품 안의 토끼가 앞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캬악거렸다.
올리비에는 토끼를 겁내며 흠칫대면서도 조금씩 거리를 좁히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그레이안의 앞에 다다라, 그녀는 사뭇 간절한 표정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레이, 그레이 맞지? 제발 맞다고 해 줘……. 내가 다신 안 그럴게……. 앞으로는 정말 잘할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는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가 안쓰러웠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사람이 이리도 정신을 놓아 버렸을까.
“올리비에 테레즈.”
“……!”
그레이안의 서늘한 음성이 적막을 가로질렀다.
올리비에를 향한 그의 시선에는 명백히 연민이 담겨 있었으나, 그저 그뿐. 선을 긋는 태도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네 남편이 아니다.”
“아……. 우으…….”
“똑바로 봐. 네 남편이 나처럼 검은 머리에 회색 눈이었나?”
“흐으……!”
주춤거리던 올리비에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은 그레이안의 얼굴을 집요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에게서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찾기라도 하듯.
“그, 레이, 는…… 흐윽…….”
이윽고 올리비에의 낯빛이 절망으로 물들었고, 그녀는 바닥을 짚은 채 목놓아 울음을 쏟아 냈다.
“흐으으어……! 흐으으윽……!”
처량한 울음소리가 실내에 가득히 울려 퍼졌다. 지켜보던 이들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거나 탄식했다.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선뜻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 일 이후로, 올리비에는 비교적 정신을 차린 듯이 보였다.
더는 그레이안을 자신의 남편으로 착각하지도 않았고, 난동을 피우거나 말썽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다만 여전히 치료가 필요한 상태라는 건 의심할 여지 없었다.
내가 그레이안의 결정을 전해 들은 것은 어느 목요일의 늦은 아침이었다.
“보호 시설……?”
“예, 디아만트 시에 있다는데 심리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의사가 자원봉사자로 활동 중인가 봐요. 잘 됐죠. 워낙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들이었잖아요.”
안나가 머리를 빗겨 주며 건넨 이야기에 멍하니 눈을 깜박이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 나는 딱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세구원회 사람들을 이렇게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도 괜찮은 건가……?’
오전 내내 고심하던 나는, 결국 그레이안을 찾아가 그 일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리고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반 신도들은 인세구원회에 대해 깊이 아는 정보가 아예 없더군요. 그들을 계속 솔즈베리 성에 두는 것도 무의미한 일이라, 이만 보호 시설로 넘기기로 했습니다. 물론 경관을 파견해 감시는 계속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그렇구나……. 그럼 아르윈이 심문 중이던 다른 이들은요? 특히, 아인스턴의 귀족 출신이라던 그 병사요.”
그때, 익숙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제가 아직 잡아두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르윈이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나타난 것인지 모를 그는 검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척척 다가와서는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러고는 늘 그렇듯 권태로워 보이는 태도로 이야기했다.
“나중에라도 뭔가 건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놈들을 이용하는 작전도 생각 중에 있습니다. 인세구원회의 배후가 누구인지, 정확한 증거를 찾아내야지요.”
나는 수긍한다는 뜻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윈은 왜인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불쑥 질문을 던졌다.
“공작 부인, 아인스턴 국왕의 이혼 명령에 대한 거절의 답은 보내셨습니까?”
“아직이요. 오늘이나 내일쯤 보낼 예정인데, 그렇죠? 그레이안.”
그레이안을 돌아보며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히 힘을 주어 감싸 쥐면서 이야기했다.
“오늘, 지금 당장 보내도록 하지요.”
“어, 그래도 괜찮겠어요?”
뭔가 대비할 게 많아 보이던 눈치던데. 이렇게 갑작스레 결정을 내려도 되나?
그런 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이, 그레이안은 엄지로 내 손등을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다정하기 짝이 없는 미소인데도, 묘하게 위험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대비는 충분합니다. 그러니 부인께서는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한편에서 아르윈이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그레이안과 나는 그런 아르윈을 무시하며 함께 테이블로 가서 마주 앉았다.
아니, 마주 앉으려 했는데, 그레이안이 의자를 끌고 내 옆으로 오는 바람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이러고 있으니, 이건 또 이거대로 설렌다. 고작 함께 앉아 있는 것에 설렐 건 또 뭐람. 그와 나란히 누워 잠든 적도 많으면서.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된다더니 내가 딱 그런 거 같다.’
아무튼 우리는 오순도순 사이좋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서한을 작성해 나갔다.
다 쓰기까지 한 30분쯤 걸렸나?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했다.
그레이안과 뜻이 잘 통한 덕분이겠지. 어쩌면 우리는 천생연분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팔불출인가…….’
나는 계속 헤벌쭉 올라가려는 입매에 힘을 주며 애써 진지한 표정으로 편지를 봉했다.
이제 이 서신이 아인스턴 국왕에게 전달될 일만 남았다.
* * *
서한을 보낸 지 벌써 사흘째.
아인스턴 국왕에게는 이렇다 할 답신도, 보복성 무력행사도 무엇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니까 오히려 더 불길한데.’
국왕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은, 간단히 축약하자면 ‘이혼? 안 해!’였다.
당연히 괘씸하게 여겨 무슨 짓이든 저지를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잠잠한 걸까? 뭘 꾸미는 거지?
‘흐으으음…….’
창가에 앉아 무릎 담요를 덮고, 황량한 겨울 정원의 풍경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즈음.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불청객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공작 부인, 아르윈 리벤티움입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신지요?”
“……?”
나는 문을 돌아보던 자세 그대로 뻣뻣이 굳어 버렸다.
갑자기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