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미치도록 좋아
‘사람을 좀 찾아 줘.’
남주 후보 3, 그 녀석의 소재지를 찾아내려면 역시 나비들의 도움을 받는 편이 빠를 테지.
아르윈에게도 부탁할 거긴 하지만…… 그 블랙맘바에게 뭐라고 설명할지부터 궁리해 놔야 한다.
내 비밀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
{좋아, 열심히 찾아볼게! 근데 너무 멀리 갈 수는 없어. 계약자인 너와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안 되거든.}
{그리고 너무 오래 떨어져 있을 수도 없어. 시간이 많이 지체되면 다시 너에게 돌아오게 될 거야.}
나비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근차근 물어보았다.
‘그래, 그렇구나.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데? 또 얼마나 오래 떨어져 있을 수 있고?’
{음…… 이 별을 한 바퀴 빙 도는 건 어려워.}
{한 5주? 정도는 괜찮아.}
……그럼 그냥 문제없는 거 아니냐? 남주 후보 3이 미지의 대륙에 있을 리도 없고.
{그래도 혹시 모르지. 정말 미지의 대륙에 은둔하고 있을 수도 있잖아.}
{맞아, 그 종족은 그러고도 남아.}
‘……확실히…… 그렇긴 해. 그래도 어쨌든 이 대륙 전체를 조사하는 건 어렵지 않지? 미지의 대륙이고 뭐고, 일단은 이 에프로사 대륙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봐 줘.’
{응, 알았어!}
{맡겨만 달라구~!}
{우리만 믿어, 글로리아!}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자신만만하게 외치고는 창밖으로 훨훨 날아갔다.
내 곁에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나비들이 남아 있었는데, 그 이유가 유사시에 나를 지키기 위해서라나 뭐라나.
{조심해야 해, 글로리아.}
{아직 국왕에게 답신 안 보냈지? 그 작자, 분명 벼르고 있을 거야.}
‘……응, 슬슬 답장해야지.’
아인스턴 국왕의 이혼 명령서에 대한 답은 최대한 미루는 중이었다.
거절의 답을 보냈을 때, 국왕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여러 일에 대한 대비를 미리 해두기 위해서.
간단히 말해, 시간을 버는 중이다.
‘그레이안 말로는 길어야 일주일이랬으니 금방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은데…….’
대비를 마치고 나면 거절의 답을 보낼 예정이었다. 뭐라 쓸지도 미리 다 생각해 뒀고.
‘내 예상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가 훨씬 빨라서, 알폰스 지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지금쯤 아인스턴 국왕의 귀에도 다 들어갔을 텐데…….’
그런 것치곤 잠잠하단 말이지.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내가 당연히 이혼에 찬성할 거라고 믿는 건가?
‘뭐…… 원래 글로리아의 성정을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해.’
팔짱을 끼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새벽 공기가 너무 싸늘해서 결국 창문을 닫았다. 환기 좀 하려 했는데 추워서 못 하겠군.
다시 침대 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자, 아직 자는 중이던 그레이안이 조금 움찔했다.
무의식중에 내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이윽고 뻗어온 단단한 두 팔이, 내 몸을 부드럽게 휘감고는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졸지에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폭 안기게 된 나는 심장이 콩닥거려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상태로 다시 잠들 수 없으리란 건 자명한 일. 그냥 얌전히 눈을 감고 누워 있기로 했다.
그레이안 특유의 서늘한 체향이 은은하게 전해져 왔다.
‘……어떻게 사람한테 이런 향기가 날 수가 있지? 이거, 페로몬이 확실해.’
이 향기만 맡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몸이 달아오르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페로몬의 효과가 분명했다!
‘페로몬 기능을 ON/OFF 할 순 없는 건가……. 평소에도 이런 걸 흘리고 다니는 거냐고……! 이 파렴치한 늑대가! 나한테만 흘리라고!’
내 마음의 소리가 너무 컸던 것일까? 그때까지 곤히 자고 있던 그레이안이 스르륵 눈을 떴다.
잠에서 막 깬 그의 눈동자는 안개 낀 듯 흐리멍덩했다.
그 상태로 멍하니 나를 응시하더니, 그가 픽 웃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입술이 살결에 닿아온 탓에 나는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다.
“앗, 힉, 아니, 그, 그만―.”
목덜미에서 축축하고 간지러운 느낌이 연달아 느껴졌다. 혹시…… 지금 개 같은 상태인 건가……?! 또 정신 줄을 놓은 거냐고?
당황해 바둥거리는 나를 그는 세심한 손길로 어루만지더니, 내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빛을 보니 알겠다. 이 사람, 제정신이다.
‘이 남자가 진짜.’
나는 별 타격도 없을 것 같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때리며 나무랐다.
“왜 아침부터 핥……고 난리예요!”
그러자 그가 배시시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서요.”
“……!”
미, 미친.
방금 진짜로 심장 떨어질 뻔했다. 뭐냐고, 저 미소는 뭐야……! 꽃과 반짝이가 날아다니는 듯한 착시가 든다.
그 정도로 예쁘고 화사한 미소였다.
“너무 좋아서…… 미칠 거 같습니다.”
아니, 미치지는 말고.
“당신이 너무, 너무나 좋습니다, 글로리아.”
이쯤 되니 좀 무서워지려 하는데.
그레이안은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게 내 몸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겼다.
씻으려고 욕실로 와서 거울을 보니, 붉은 꽃잎 같은 자국이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래서는 입을 옷이 없잖아! 미라가 되어야 한다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게 생겼네!
‘매일 이러면 좀, 아니 많이 곤란할 거 같은데…….’
“부인, 씻겨 드리겠습니다.”
와중에 그레이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는 낯으로 해면과 비누를 들고 다가왔다.
나는 대놓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쉬며 대꾸했다.
“알아서 씻을 테니 이리 줘요.”
그러자 대번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내가 저 불쌍해 보이는 얼굴에 약하다는 사실을 아는 거다. 요망한 늑대 같으니라고.
“그, 그런 표정으로 쳐다봐도 허락 안 할 거예요.”
단호하게 말하려 했던 것치곤 말을 조금 더듬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저 올망졸망한 눈빛은 도저히 못 견디겠으니까……!
‘이 남자, 진짜 유죄야……!’
왜 멋지고, 잘생기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다 하고 난리람? 한 가지만 하라고! 매력이 너무 넘치잖아!
“부인…….”
아, 그렇지. 목소리도 좋다. 저 좋은 목소리로 간절하게 부탁하니 뭐든 다 들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의 매력에 승복하고 말았다. 작정하고 유혹하니 이길 도리가 없다…….
“알았어요……. 그럼, 서로 씻겨 주는 거로 해요…….”
……내가 방금 뭐라고 한 거지?
미친, 무슨 소릴 지껄인 거야?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나 이미 뱉어 버렸기에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부인.”
활짝 미소를 지은 그레이안이 따뜻한 물을 가득 받아둔 욕조로 나를 이끌었다.
나는 허망한 웃음을 흘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길 따름이었다. 그래, 그냥…… 즐기자. 피할 수 없다면 즐겨!
* * *
그러니까, 그레이안은 ‘자신의 본능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글로리아와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볼 작정이었다.
어떤 의미로는 지독했다. 지독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동시에 지독한 집념으로 야금야금 욕망을 채우는 중이었다.
“……기분 좋아 보인다?”
어쨌든 그레이안 솔즈베리는 기분이 좋았다.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아르윈을 흘끗 보고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로리아는 나를 좋아해, 진심으로.”
“안 물어봤어……!”
아르윈이 기가 막혀 펄쩍 뛰거나 말거나, 그레이안은 기분 좋게 차 한 모금 마시고 업무를 시작했다.
어젯밤 글로리아와 털어놓고 대화한 후로, 이 찻물처럼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것만 같았다.
“새삼스레 감사하고 있어. 내 부모님께서 나를 이렇게 잘생기게 낳아주신 것에.”
“풉―.”
차를 마시다 뿜은 아르윈은 사레가 걸려 캑캑거렸다.
천년도 넘게 살아온 흑룡 수인을 사레에 걸리게 했으니 솔즈베리 공작은 과연 위대하다 할 만하다.
“이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글로리아는 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넌, 가만 보면 자존감이 높은 거냐, 낮은 거냐? 알다가도 모르겠다…….”
“음, 자존감은 높은 편이지만 자기 객관화가 잘 되는 거겠지?”
빙그레 웃는 그레이안을 보며 아르윈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아주 오래 살아온 아르윈 리벤티움은 사랑에 빠져 멍청이가 된 놈들을 많이 봐 왔는데, 이제 보니 그런 놈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심지어 이놈은 증세가 매우 심각하다. 보던 중 최고였다. 최고의 멍청이라 할 수 있겠다.
“어디 가서 그렇게 팔불출처럼 굴지 마라. 격 떨어진다.”
아르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충고하였으나 그레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얀센의 로베르트는 나보다 더하다는데.”
“그 작자는 공처가의 대명사잖아! 네가 그 이름을 뛰어넘고 싶은 거냐?”
“어느 분야든 최고가 되는 건 좋은 일이지…….”
미친놈…….
아르윈은 차나 더 마셨다.
“……네가 공작 부인에게 전보다 훨씬 진심이 됐다는 건 잘 알겠다. 뭐, 나쁜 일은 아닌데…….”
‘좀 심각할 정도로 진심인 것 같은데.’ 하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행복하게 웃는 낯에 침 뱉기도 뭐 해서.
‘그래, 부부 사이가 나쁜 거보단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체념하고 나니 마음이 좀 침착해지는 것도 같았다.
곧이어 들려온 말에 또다시 기겁하고 말았지만.
“그래……. 글로리아가 너무 좋아서 미칠 거 같아.”
진득한 감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
아르윈은 순간적으로 찻잔을 놓칠 뻔했다. 너무 소름이 돋아서.
“……미쳤냐?”
“아직 미치진 않았어…….”
그 말은 꼭 ‘곧 미칠 거 같다’라는 것처럼 들렸다. 이제 보니 눈빛도 정상이 아니다. 이 자식, 이거 심각한데…….
“너 말이다……. 공작 부인이 첫사랑이지? 그전까진 이성에게 호감조차 느껴본 적 없고…….”
아르윈이 기억하기에도 그레이안은 연애에 관심을 두지 않고 목석처럼 살아왔다. 글로리아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랬던 그레이안 솔즈베리가 사랑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저러는 그레이안이 아르윈은 아직도 낯설었다.
저 안에 그레이안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놈이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고 보니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네…….”
“…….”
그레이안이 맥락 없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아르윈은 한숨을 삼켰다.
포기하면 편하다고 생각하며 그러려니 넘기려 했다. 궁금하지도 않은 정보를 그레이안이 늘어놓지만 않았더라면.
“글로리아에게서는 라일락과 바닐라 향기가 나거든. 너도 알다시피, 늑대 수인들은 사람이 지닌 고유의 체향을 맡을 수 있잖아.”
“…….”
제발, 그런 건 그냥 혼자 알고 있어라.
“……생각해 보니 다른 놈들도 글로리아의 체향을 맡았겠네.”
그 점이 거슬린다는 듯이 그레이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아르윈은 차를 마시며 쿠키나 먹었다. 상대하기 싫다.
“뭐…… 그건 됐고. 어젯밤에 글로리아에게 털어놓았어.”
불안한 예감에 아르윈이 쿠키를 집으려다 말고 멈칫했다.
아니나 다를까,
“솔즈베리 가문의 저주에 대해서.”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